상상하지 말고 관찰하라
본 회고록은 개인적인 생각 정리에 더불어 인터뷰에 응하신 작가님들을 위해 작성된 글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번 카카오 인턴 채용에는 지원자들에게 사전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친절하게도 10가지나 되는 주제와 선택권을 주는데, 내가 선택한 것은 브런치 서비스에 관련된 것이었다.
브런치에서 활동하는 창작자들이 더 높은 수준의 동기부여를 받아 더 나은 창작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브런치 서비스가 제공해줄 수 있는 베네핏을 제안해주세요.
주제를 선택한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문제정의의 출발은 유저에 대한 공감으로부터 시작하라는 교과서적인 말도 있듯이, 나 자신이 이미 플랫폼에 속한 유저로서 다른 지원자들보다 약간의 우위에 설 수 있다는 막연한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자신감은 오히려 나에게 독이 되었다. 개인적인 경험에 한정 지어 편협한 생각들로 작가들을 예단했고 이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억지 논리들을 부풀려 대충 채워 넣기에 급급했다. 디자이너로서 뭔가 예쁘거나 특이한 것을 디자인해서 제시하면 작가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쉽게 쉽게 생각했다. 이런 안일한 생각들로 과제를 진행하며 참고자료를 찾기 위해 책장을 뒤지는데 어떤 분이 나를 매섭게 쳐다보고 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니체가 망치로 머릿속을 내려친다면 이런 느낌이려나. 속 빈 강정처럼 만들기에 급급한 과제를 교수님한테 들켰을 때의 화끈한 기억이 내 머릿속을 스쳐갔다. '상상하지 말라'는 다음소프트 부사장이자 데이터 분석가 송길영이라는 저자분이 집필하신 책으로 핵심 요지는 대충 이렇다.
무엇을 상상하건 실제와 다르다. 관찰하라, 관찰하라, 관찰하라 그리고 상상하라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작가분들의 글에 찾아가 밑도 끝도 없이 무작정 인터뷰를 부탁하는 댓글들을 남겼다. 상업성 글은 아니지만 주제와 무관한 댓글은 실례가 될수 있으므로 취준생의 절박함이 조금이라도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최대한 정중히 댓글을 남겼다. 그렇게 약 150명이 넘는 작가분들에게 요청을 드렸고 무려 53명이나 되는 작가분들이 흔쾌히 제안을 수락해주셨다. 특별한 리워드가 없음에도 이렇게나 많은 분들이 참여해주신 것을 보며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한 줌 따스함을 느꼈다.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된 가장 큰 2가지.
무엇이 실제와 달랐을까?
가설 1. 출간을 목표로 글을 쓸 것이다.
브런치가 제공하는 최대의 베네핏은 역시 출간이다. 많은 작가들이 브런치를 통해 출간 기회를 얻었고 유명세를 탈 수 있었다. 때문에 당연히 다른 작가들도 출간을 목표로 설정하고 구태여 브런치에 글을 쓴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가설이었다. 작가 대부분이 출간에 대해 생각해본 건 사실이지만, 그게 구체적인 목표라기보다는 부수적인 것에 가까웠다. 실제로는 글쓰기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혹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브런치를 사용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이 사실은 꽤나 충격으로 다가와 내 머리속을 뒤흔들었는데 왜냐하면 베네핏에 대한 접근법이 완전히 달라져야 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출간을 목적으로 하는 유저들이 모인 곳과 글쓰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은 대충 상상만 해봐도 느낌이 다르다. 나는 전자의 느낌으로 작가들을 상상하고 문제를 풀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가설 1. 출간을 목표로 글을 쓸 것이다.
실제 = 브런치를 사용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글쓰기 자체에 있다.
가설 2. 수익을 창출할 수 없어 대부분 불만을 갖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창작물이 곧 수익으로 이어지는 시대다. 유튜브 구독자수는 곧 돈으로 환산되며 지위를 나타내는 또 다른 수단이 되었다. 때문에 수익을 창출할 기회가 없는 브런치 작가분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으레 짐작했다. 물론 예상대로 아쉬운 의견을 주신 소수의 분들도 계셨지만 놀랍게도 다수의 분들이 브런치의 정책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주셨다. 이것은 1번과 연관되는 내용인데 애초에 브런치의 정책에 동의하고 글을 쓰려고 플랫폼에 진입했기 때문에 딱히 수익에 대한 고려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브런치의 순수함이 글이라는 콘텐츠를 빛내주고 글을 정말 사랑하는 유저들이 모일 수 있게 하는 공간이라 이것을 유지했으면 좋겠다는 의외의 답변들을 받았다.
가설 2. 수익을 창출할 수 없어 대부분 불만을 갖고 있을 것이다.
실제 = 플랫폼 진입 시 수익은 애초에 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관찰보다는 상상으로 세운 가설들이기 때문에 작가들의 대답은 실제와 매우 달랐다. 작가들의 내면을 엿볼수있는 답변들로인해 준비하던 기획의 방향도 완전히 달라져야 했다. 가설로 이루어진 내 과제물은 이제 나 자신조차도 설득이 안 되는 형편없는 기획서로 전락했다.
적중했지만, 직접 물어보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던 것
가설 3. 작가에게 가장 큰 힘은 독자다.
창작자들은 보는 이의 '관심'을 먹고 자라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이 독자들에게서 큰 힘을 얻는다고 대답해주셨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작가와 독자 사이에 있었던 특별한 경험담이다. 몇 분의 작가들은 자신의 글에 감명받은 독자로부터 진심이 담긴 글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이 경험은 작가에게 꽤나 강렬해서 심지어 어떤 분은 사무치는 감동에 눈물을 흘린 기억도 있었다. 나의 창작물이 누군가의 마음속 깊은 내면을 움직이고 덕분에 내 마음도 움직인 경험. 카타르시스의 공유. 나는 감히 상상도 못 해볼 감정이었다. 감정적 보상과 물질적 보상을 저울 재긴 무리겠지만 어쩌면 출간보다 더 특별하고 강력한 최고의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이 지점부터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갔다.
가설 3. 작가에게 가장 큰 힘은 독자다.
실제 = 독자들은 예상보다 더 엄청난 파급력을 줄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실마리 찾아가기 - 작가들은 어떻게 독자와 소통하고 있을까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듯 브런치는 댓글 사용률이 현저히 낮다. 작가와 주변 지인들을 통해 분석한 원인은 브런치라는 플랫폼이 가진 진중함과 댓글이라는 다소 가벼운 느낌의 소통방식이 서로 상충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댓글은 기본적으로 공개성을 띄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의 작품에 전시되는 것만 같은 부담스러움을 느낀다는 의견도 종종 받았다. 그래서 개인적인 소통을 원하는 독자들은 주로 SNS나 개인 메일을 활용하였고 심지어는 제안하기 기능을 사용해서 작가에게 고마움을 표시할 만큼 적극적인 독자들도 존재했다. 나는 독자들이 가진 소통의 욕구를 포착했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것이 작가들에게 곧 최고의 베네핏이 될수있다고 가정했다.
'브런치 다움'을 담은 베네핏
내가 구체적으로 어떤 베네핏을 제안했는지는 차마 자신이 없어 공개할 수 없지만 큰 핵심은 보다 원활한 소통기능이었다. 이를 통해 작가에게는 최고의 동기부여를, 독자에게는 소통의 창구를 마련해주고 싶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던 새로운 기능이라거나 통통 튀는 아이디어는 아니었지만 브런치만이 할수있고 브런치에서만 느낄수있는 기능이라고 생각을 담아 서비스를 네이밍하고 디자인했다. 이 기능을 통해 작가와 독자들이 브런치 다운 좋은 경험들을 축적하고 이것이 선순환되는 환경을 조성하길 바랬다. 이게 정답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나의 논리와 감성이 읽는 분에게 온전히 전달되길 바랄 뿐이다.(제발)
글을 마치며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과제에 몰입했다. 역시 많은 이론보다는 실전 경험이 중요하다고 다시금 느낀 순간이었다. 송길영 님의 책을 읽고 강연을 찾아갈 만큼 많은 감명을 받았었는데 정작 실무에 적용할 때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나의 두뇌에 다시 한번 놀랐다.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통해 절실히 느낀 점은 브런치라는 곳이 매우 따듯한 유저들이 모인 플랫폼이라는 사실이다. 다들 격려의 말과 응원을 담아 정성스레 답변을 작성해주셨고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제안해주시기까지 하셨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따듯함에 죄송한 마음까지 들었다. 부디 좋은 결과로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인사를 드릴수 있는 기회가 오면 좋겠다.(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