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Francis Lee Apr 27. 2024

예수의 형제자매를 왜 찾아야 하나?

교회가 만든 전설이 결국 기독교의 멸망을 가져온다.

예수의 형제들은 여러 성경 구절에서 언급된다. 마태복음 12장 46절, 누가복음 8장 19절, 마가복음 3장 31절에서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를 보러 왔다는 말이 나온다. 그 형제의 이름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다. 여기에 더해 예수에게는 자매들이 있다는 말도 나온다. 다만 가부장적인 유대교의 전통에서 여자의 존재는 미미하기에 그들의 이름조차 성경에도 안 나온다. 그런데 이 형제자매들과 예수의 관계가 친밀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요한복음 7장을 보면 예수의 형제들이 예수를 남겨두고 자기들끼리만 명절 축제에 간다. 그리고 성경 어디에 보아도 예수가 마리아보고 어머니라고 부른 적이 없다. 예수의 가족 관계는 냉랭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성경을 보면 그렇다. 그런데 예수의 가족에 관한 문서가 성경 말고는 전혀 남은 것이 없으니 우리는 여전히 성경만 보고 예수의 가족을 파악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예수가 가족을 등한시한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제자에서 어머니 마리아를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예수가 부활하고 승천한 다음에 수립된 이른바 다락방 공동체에는 분명히 예수의 형제와 어머니가 제자들과 함께 모여서 기도한 것으로 나와 있다. 예수 제자들이 예수의 식구를 거두었다는 말이다. 갈라디아서 1장 19절에서도 야고보가 예수의 형제로 나와 있다. 이러한 성경 내용을 근거로 보아 가장 자연스러운 결론은 예수님께 실제 피로 맺어진 형제자매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신의 외아들이고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했다는 교리가 확립된 이후, 그리고 특히 가톨릭에서, 마리아가 예수를 낳기 전후 늘 처녀성을 보존했다는 도그마를 ex cathedra, 곧 영원히 오류가 전혀 없는 교리로 선포한 다음에, 마리아가 예수를 낳고 나서, 다시 남편과 성관계를 해서 아이들을 줄줄이 낳았다는 것은 신성모독처럼 들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에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의 ‘형제들’이 실제로는 사촌들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거짓말이다. 성경에서 예수의 ‘형제’를 지칭할 때 쓴 단어는 사촌과 같은 친척들을 지칭할 수도 있지만 그 당시 사용한 그리스어 '형제'의 일반적인 의미와 문자적인 의미는 육체적 형제다. 더구나 사촌을 의미하는 그리스어가 따로 있음에도 성경에서는 그 단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들이 예수의 사촌이라면 왜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으로 자주 묘사된다는 말인가? 예수의 부계에 속하는 사촌이라면 요셉의 형제가 낳은 자식들이 되는 데 작은아버지의 자식들을 왜 큰 엄마가 데리고 예수를 찾아 나선다는 말인가? 논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말이 안 된다. 상식적으로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남편도 없고 장남인 예수도 가출해서 먹고살기 힘든 상황에서 나머지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를 찾아온다고 보는 것이 논리에  맞지 않나? 그런 상황에서 남편 집안의 조카들까지 챙길 여력이 과연 있었을까?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신앙은 과학이 아니다.  그러나 몰상식이 신앙으로 위장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 문제로 골치를 썩이던 가톨릭교회에서는 두 번째 가설을 제시했다. 곧 예수의 아버지인 요셉이 이전 결혼에서 얻은 자식들이 많았다는 주장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나온 상상으로 요셉이 마리아보다 훨씬 늙었으며, 이전에 이미 결혼한 적이 있었고, 여러 자녀를 낳았고, 그 후 홀아비가 되었다가 다시 마리아와 결혼했다는 ‘소설’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요셉이 늙었다는 말이 안 나오고 재혼 이야기는 더더욱 안 나온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단 한 구절을 보고는 요셉이 너무 늙어 성관계할 수 없었고 그래서 마리아가 혼전 임신을 했어도 관대하게 용서했다는 논리에서 나온 순전한 상상인 것이다. 만일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할 때 이미 여러 자녀가 있었다면,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으로 갈 때, 이집트로 도망갈 때,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오는 여정에서 그 자식들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가 전혀 없다.     


이런 예수의 형제자매에 관한 ‘소설’이 그럴듯하게 나오게 된 결정적 이유는 마리아가 처녀로 성령의 힘으로 예수를 잉태했고 예수를 낳고 나서도 처녀로 머물렀다는 대단히 비과학적인 교리를 합리화하기 위한 무리수를 둔 탓이다. 게다가 바티칸은 마리아가 예수를 성령으로 잉태하여 출산했다는 교리도 모자라 아예 마리아 자신도 그 부모가 성관계하지 않고 낳은 딸이라는 교리까지 만들어 엄숙하게 선포해 버린다. 바로 1854년 12월 8일 비오 9세 교황이 선포한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Ineffabilis Deus)을 통해서 말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저 유다 지방의 한 유대인 여자가 아니라 테오토코스(Θεοτόκος), 곧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어 버렸다.  신을 낳은 여자가 된 것이다.

   

이러다 보니 마리아가 예수에 버금가는 신적 존재로 숭배되는 부작용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래서 개신교가 가톨릭을 공격하는 결정적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가톨릭은 예수와 더불어 마리아를 숭배하는 종교라는 비난을 받게 만든 것이다. 이런 미신적 마리아 숭배 광풍이 불자, 참다못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마리아 숭배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한번 붙은 광신적 믿음은 쉽사리 사라지기 힘들다. 그래서 지금도 가톨릭교회에서는 마리아를 주제로 한 기도를 계속 드리고 교회는 이를 묵인하고 있다. 특히 교회 신자의 주축을 이루는 대다수의 할머니와 아줌마들이 마리아에게 간청하는 기도를 드리겠다는데 어찌 말릴 수 있겠나? 그들이 교회를 떠나면 돈만이 아니라 신자 석이 텅 비게 되니 말이다.  실제로 한국의 가톨릭 교회에서 레지오 마리애의 조직력과 헌신은 막강하다. 그들이 없다면 교회가 무너질 것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사실 한때 레지오 마리애라는 조직이 마리아 숭배의 중심 집단이었다. 이 조직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17년 아일랜드의 프랭크 더프(Francis Michael Duff, 1889~1980)가 설립하였다. 로마의 군대조직을 본떠서 레지오 마리애(Legio Mariae), 곧 마리아 군단이라는 명칭도 만들었다. 가톨릭교회의 특성상 성직자가 아닌 평신도가 만든 조직은 매우 꺼린다. 가톨릭은 민주주의를 가장 혐오한다. 성직자의 독재를 최고로 여기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모든 결정은 성직자가 내리고 신자는 복종만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개신교도 별 차이가 없다. 예수는 평등을 말했지만 그를 교주로 삼은 기독교는 지극히 불평등한 조직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신자들의 인기가 높았고 그 당시 이미 구석으로 몰리던 가톨릭교회의 세력 확장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이 조직을 교회 아래 두고 적극 활용하였다, 이런 사례를 평신도인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de Loyola, 1491~1556) 만든 예수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찾아볼 수 있다. 처음에는 ‘건방지게’ 평신도가 만든 조직이라서 껄끄러웠지만 종교개혁과 개신교의 선교 활동에 위기를 느낀 바티칸이 교회에 충성을 맹세하도록 하고 그 당시 매우 부족했던 가톨릭 선교 도구로 적극 활용했다.     


현재 세계적으로 레지오 마리애 회원은 천만 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들어서서 마리아 숭배를 억제하는 교회 정책의 영향으로 그 위세가 급속히 감소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주로 한국, 필리핀, 브라질, 아르헨티나에서만 그 조직의 활동이 비교적 활발한 편이다. 원래 시작한 아일랜드는 물론 유럽 전역에서 이 조직의 활동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본토인 유럽에서는 사라진 것이 아시아와 남미와 같은 기독교 선교지에서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렇게 마리아를 숭배하려다 보니 예수 형제자매의 존재를 부인할 수밖에 없었던 기독교의 사정이 딱하기는 하지만 이제 마리아 숭배가 금지된 시대에 예수의 형제자매에 대한 논의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수준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마땅하다. 마리아의 무염시태, 곧 예수의 외할머니가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마리아를 잉태했다는 교리를 무류적인, 곧 인류 역사에서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신성한 도그마로 선언한 가톨릭교회의 ‘무리수’가 낳은 모순을 가톨릭교회 자체가 정리해야 하지만 교회의 가부장적이고 독선적인 특성에서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복종하라는 말에만 가스라이팅된 신자가 나서는 것도 마뜩지 않다.   


사실 과거에 마리아의 엄마가 마리아를 성령으로 잉태하고 출산했다는 교리가 있었지만, 이것을 무류적인 것으로 선언한 것은 마리아가 사망한 지 수천 년이 지난 19세기에 들어서이다. 적지 않은 신학자들은 이런 ‘무리수’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만 솔직한 생각을 잘 드러내지 못한다. 그런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절대 권위를 지닌 바티칸에 대항하는 것이고 이는 신성모독으로 파문의 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평생 성당 안에서 말만 해온 신부가 파문을 받으면 사회에서 먹고 살길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독일의 용감한 신부이자 신학자인 드레버만(Eugen Drewermann, 1940~)은 마리아의 처녀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가 파문당해서 신부직과 교수직을 박탈당했지만, 그의 마리아의 처녀성을 의심하는 주장은 많은 상식적인 사람들의 동감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지금도 독일만이 아니라 세계 기독교권에서 존경받는 학자로 살아가고 있다.     


성직자들이 교리에 대해 대들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는 결국 밥그릇 때문이다.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여 파문당하면 먹고살 길이 막막하니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조직에 충성을 요구하는 기독교의 특성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렇게 자가당착에 빠져 있는 사이에 기독교 교회는 붕괴하고 있다. 상식 있고 지성이 있는 이들은 해마다 기독교 교회를 빠져나와 다른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당장 신성로마제국 초대 황제로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칼 대제와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의 나라인 독일만 보아도 해마다 100만 명 가까운 신자들이 기독교 교회를 떠나고 있다. 기독교의 새로운 로마제국이었던 미국마저 기독교의 영향이 감소하는 추세다. 특히 미국의 경우 극단적 보수성을 지닌 근본주의 기독교 우파만이 설치고 있을 뿐이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온건 기독교가 설 자리가 전 세계적으로 사라지는 중이다. 그런 기독교를 비기독교인들이 바라볼 때 부정적 인상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일찌감치 기독교가 ‘개독교’화 되고, 전광훈 같은 자가 설쳐도 이른바 정통 교단인 장로교나 감리교, 침례교 교단이 막지 못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 기독교의 모순을 보고 일부 기독교 성직자나 학자들은, 과거 초대교회는 건전했는데 20세기에 들어와서 세속에 물들어 ‘타락’했다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어불성설이다. 기독교 교회는 그 시작 때부터 타락해 왔고 많은 미신적 요소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아무 부끄럼 없이 교리화했다. 과거 글도 모르는 무지몽매한 민중을 속이는 것은 가능했기에 이런 무리수가 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가 정치권력의 비호를 받았기에 민중을 억압하는 일이 쉬웠다. 그러나 종교가 더 이상 의무가 아니라 마트에서 상품을 고르듯이 구매하고 소비할 수 있는 하나의 '상품'이 된 시대에 기독교의 종말을 예측하기는 너무 쉬워 보인다.      


그런 기독교의 종말을 막으려면 기독교 교리의 모순을 스스로 깨닫고 고치는 용기를 내어야 한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대로 굳어진 교리를 비판하는 것은 밥그릇을 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과연 기독교 성직자나 신자 가운데 그런 용기가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소돔과 고모라가 무너질 때 아브라함은 신에게 의인 10명만 있으면 그 두 도시를 살려야 한다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 도시에는 의인이 10명도 없었다. 오늘날 기독교 교회를 들여다보면 소돔과 고모라가 생각날 정도다. 기독교 교회에 만연한 부동산 투기, 감투싸움, 파벌 경쟁, 헌금과 기부금 강요로 날밤을 새우는 모습을 보면서 소돔과 고모라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 교회가 이 모양이니 신의 진노가 이 세상이 아니라 기독교 교회에 먼저 내리는 것은 이제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독일 가톨릭교회가 결국 바티칸과 갈라지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