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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May 09. 2024

왜 베드로 교회는 실패하고 바울 교회는 성공했을까?

기독교 교회는 처음부터 짝퉁으로 시작했다.

초대 교회는 처음부터 유대인 대상 교회와 이방인  대상 교회로 나뉜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일등 제자인 베드로와 예수의 형제인 야고보는 '본점'인 예루살렘의 기독교 교회를 관리하고 기독교를 박해하다가 갑자기 개종하고 스스로 사도라고 부른 바울은 '지점' 격인 소아시아 지방의 기독교 교회를 관리하기로 타협을 본 것이다.  사실 바울의 지점 교회는 불법으로 예수 이름을 도용하여 시작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 공동체의 분노를 유발했었다. 예수의 제자도 아닌데 예수 이름을 팔고 다녔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바울이 베드로를 찾아가 담판을 벌였고 극적인 타협을 보았다.

  

이런 타협을 볼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 예수가 죽고 나서 그를 믿는 이들이 모여서 이룬 이른바 다락방 공동체는 예루살렘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선교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세상은 곧 종말을 맞이할 것이고 예수가 그 종말에 다시 올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는 수시로 종말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부활한 다음 다시 하늘에 오르면서 ‘곧’ 다시 올 것을 약속했다. 그 말을 제자들은 다 믿은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대책 없이 살다 보니 가난했다. 그 가난한 사정에 도움을 준 것이 바로 바울이다. 지역 교회에서 돈을 모아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 준 것이다. 그런 식으로 공존이 시작되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 교회는 계속 종말을 기다렸다. 대부분 사도들이 죽기 전에 그 종말이 올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예수가 오기도 전에 예루살렘이 초토화되었다.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교 성전도 파괴되고 예루살렘 공동체도 따라서 파괴되었다. 지금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예루살렘 어디에 베드로와 야고보 공동체가 있었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반면에 처음부터 바울이 세우고 관리하던 기독교 지점 교회는 로마 제국의 공격에서 벗어나 무사할 수 있었다. 본점이 파괴되어 더 이상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바울이 세운 교회가 생존하여 오늘날의 기독교 교회의 원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예수의 직제자가 모여 만든 교회는 철저히 파괴되고 예수를 단 한 번도 본적도 그의 가르침을 들은 적도 배운 적도 없는 바울이 만든 교회는 번창한 것에 대해 기독교 신자는 별로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다 신의 뜻이기 때문이다. 인샬라! 그러나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신이 존재한다면 분명히 자기의 외아들인 예수의 직제자들이 만든 교회를 더 사랑할 것 같은데, 그 교회가 초토화되어도 아무런 반응을 안 하고 오히려 기독교를 박해하던 바울이 세운 이방인의 교회만이 살아남는 일을 허용하다니? 그저 신앙의 신비라고만 받아들이기에는 개운치 않은 맛이 있다.   

  

그런데 큰 문제는 바울이 예수를 만난 적도 없고 그의 가르침을 직접 들은 적도 없기에 예수의 가르침을 들은풍월에 따라서 자기 맘대로 해석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공관복음서에 나온 예수의 가르침과 바울의 ‘주장’ 사이에 다른 내용이 성경에 많이 나온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이 바울의 여성 비하다. 바울은 정통적인 유대교 신자였기에 그 전통에 따라 가부장제 사고방식에 철저히 물든 자였다. 여기에 더해 여자를 죄인으로 간주하는 생각을 서슴지 않고 드러내곤 하였다. 로마서 5장 12절에 보면 한 사람 때문에 세상에 죄가 들어왔다는 구절이 나온다. 통상적으로 이 한 사람은 여자인 이브로 해석된다.      


코린트 교회의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아예 노골적으로 여자를 비하하는 내용이 나온다.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잠자코 있어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율법에서도 말하듯이 여자들은 순종해야 합니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서 남편에게 물어보십시오.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코린트 14,34~35)     


한 마디로 교회에서 여자는 입을 닥치고 있으라는 말이다. 이런 남녀 차별적인 신학이 21세기에 통할 리가 없다. 그래서 신학자 가운데 일부는 이 구절이 바울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 바울의 입을 빌려 삽입한 것이라는 주장까지 한다. 웃기는 말이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에 위조가 있다는 말이 되는 데 이러면 성경 자체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 교회에서 여자를 무시한 것은 바울만이 아니다. 사대복음서나 사도행전에 보면 여자는 다 무시된다. 심지어 예수의 어머니라고 한 마리아에 대한 언급은 거의 안 나온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에 관한 언급도 거의 없다. 사실 예수의 어머니와 부활한 예수를 가장 먼저 본 여자는 예수 공동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도 그들을 존중하거나 그들의 활동에 대해 자세히 언급한 구절이 단 한 줄도 없는 것이 바로 신약성경이다. 그런 정도로 기독교는 처음부터 철저히 여성 비하의 공동체였다.  

    

그런 여성 비하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별 차이가 없다. 수녀들은 거의 무료 봉사 활동이나 하는 종의 역할만 강조된다. 기독교의 최고 정신이 ‘순명’이라는 명분으로 말이다. 가톨릭에서 여자가 신부가 되는 것은 신성모독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개신교에서도 여자가 목사가 되는 경우는 교파에 따라 있지만 아직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토록 지독한 남녀 차별적인 종교가 된 것에 결정적인 요인이 된 것이 바로 바울의 주장이다.     


사실 예수는 단 한 번도 여자를 비하한 적이 없다, 예수는 분명히 말했다.     


“예수님께서 아직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 46~50)     


이런데도 바울은 여자가 죄인이기에 머리를 너울로 뒤집어쓰고 남자에게 성욕을 유발하지 말아야 한다는 성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오늘날 같으면 바울은 바로 경찰에 체포되어 성추행죄로 형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편견에 사로잡힌 바울이 저지른 더 큰 잘못은 바로 예수를 존경받는 스승의 자리에서 하늘에 있는 신적 존재로 숭배의 대상으로 만든 것이다. 예수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숭배하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 자기의 언행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자기와 같은 존재가 되라고 하였을 뿐이다. 그래야 그를 따르는 이들이 모두 신의 자녀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가 그렇게 강조했음에도 바울은 예수를 신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그 신을 독자적으로 해석할 권한을 지닌 사도가 된 것이다. 원래 사도는 성경에 나온 대로 예수가 직접 12명을 선발하여 구성한 제자 공동체다. 그런데 예수를 만난 적도 없는 바울이 스스로 자기 머리에 사도의 관을 썼다. 말도 안 되는 신성모독을 저지른 것이다. 그래 놓고는 자신을 예수의 본질을 해석할 유일한 권한을 지닌 존재로 내세웠다. 그 권한이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를 놓고 예루살렘 공동체의 좌장인 베드로와 담판을 벌이기까지 하였다.


그 결과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삼고 바울이 세운 교회는 이방인을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타협을 받아낸 것이다. 말이 타협이지 사실 강요였다. 아무런 라이선스도 없던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본점의 주인인 베드로에게 돈을 주고 흥정을 벌인 끝에 라이선스를 사간 것이다. 이 이후 바울은 떳떳하게 예수를 내세우며 당당히 ‘예수 장사’를 시작했다. 그 결과가 오늘날의 기독교 교회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예수의 직제자가 모인 예루살렘 공동체의 교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누구도 저작권을 내세울 수 없는 상황이니 바울이 마음대로 해도 제재를 가할 방법이 없었으니 말이다.     


과연 이런 기독교의 기묘한 역사가 신의 뜻이었을까? 만약에 예루살렘이 망하지 않고 베드로와 야고보의 교회가 살아남고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면 지금 우리가 보는 기독교와는 다른 종교 집단이 나왔을까?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기독교가 유럽을 제패하고 유일한 국교가 되고 그 피비린내 나는 탐욕과 권력의 역사는 적어도 없지 않았을까? 물론 그것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지금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국민을 살육하는 모습을 보면 근본이 유대교 신자였던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의 평화 메시지를 제대로 실천할 수 있었을지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이 망하지 않았어도 비폭력 무저항의 평화주의적 기독교 교회는 사라졌을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도대체 기독교 교회가 오늘날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데도 예수가 재림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그 답은 예수가 복음서에서 했다.     


“예수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마태 13,24~30)     


흔히 기독교 신자는 여기서 자기들이 밀이고 예수 안 믿는 자들이 가라지라고 오해한다. 실제로 가라지는 입으로만 ‘예수 예수’ 외치면서 세속적인 쾌락과 욕망과 권력, 곧 돈과 출세와 섹스에 중독된 사이비 기독교인들이다. 그런데 그런 사이비 기독교인 가운데 어쩌다가 한두 명씩 밀과 같은 참된 예수 제자들이 섞여 있다. 그들은 극소수다. 그런 이들이 다칠까 봐 예수가 사이비 기독교인들을 벌하지 않는다는 신학적 해석이 가능한 구절이다. 그러나 과연 이 시대에 밀과 같은 기독교인이 남아 있기나 할까? 교회와 성당에 가서 오늘도 자식이 SKY대학에 갈 것을 빌고, 삼성에 취직할 것을 빌고, 판검사와 변호사와 의사가 되기를 빌고, 남편이 떼돈을 벌어서 잘 먹고 잘살기를 비는 사이비 기독교 신자가 넘치는 세상에서 말이다. 그런 신자가 넘치니 예수의 말을 실천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고 빌딩과 같은 초호화 교회를 짓고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고 교회 헌금으로 자식을 유학 보내는 목사들이 목에 힘주고 빨갱이 타령이나 하고 있는 나라가 된 것 아닌가?  

    

그런데 바울이 변형하여 시작한 비예수적인 기독교 교회가 유럽에서 번창한 이유는 무엇인가? 당연히 유럽의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고 세속적인 권력의 입맛에 맞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예수를 숭배하도록 강요하고 신자들에게 복종과 순명과 희생을 요구하는 기독교의 교리가 권력자의 요구에 정확히 일치한 것이다. 그렇게 1,700년 가까이 권력의 통치 도구가 되어 왔던 기독교가 마침내 20세기 민주주의 시대에 들어서 멸망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변형된 바울의 기독교 교회가 멸종해야 비로소 예수의 메시지를 제대로 전하는 바른 기독교 교회가 세워질 수 있으니 말이다. 예수의 말대로 가라지는 거두어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예수의 곳간으로 모아들이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랄 뿐이다. 으리으리한 대형 건물을 외상으로 짓고는 그곳에 모여 예수를 빙자하여 장사나 하는 것들이 가라지가 아니고 뭘까? 그런 사치스러운 건물 안에서 사교 모임에 몰두하는 가라지가 사라져야 비로소 예수의 말씀을 실천하는 데 몰두하는 밀과 같은 참된 기독교 신자가 기를 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날이 과연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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