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를 배신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서 예수는 신의 외아들일 뿐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이다. 그리고 신이 예수가 되어 세상에 온 것은 직접 인간의 구원을 위해 자기희생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2천 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보면 신이 예수의 모습으로 세상에 와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예수가 비난했던 성직자의 타락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아니 그 당시보다 더 심하다. 적어도 예수 시절 유대교 성직자는 신성모독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신을 모독한 예수를 처형하지 못해 안달이 났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성직자는 신성모독이 있어도 예수 시절의 성직자만큼 저항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가 성직자 스스로가 신성모독을 저지르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한 마디로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신을 두려워한다면 감히 그런 '타락한' 그리고 신자를 '능멸하는' 삶을 그리 뻔뻔하게 살 리가 없지 않은가?
도대체 기독교 교회의 주인처럼 행세하는 것도 모자라 예수를 대신하는 것처럼 떠벌리는 이른바 성직자가 이렇게 예수의 말을 지독히 안 들으면서도 겁을 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성경에 나와 있다.
창세기에 보면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나서 그들이 에덴동산에 살도록 한다. 그러면서 인간에서 에덴동산만이 아니라 세상의 통치를 위임하면서도 오직 선과 악을 구분하는 지혜를 주는 나무에 달린 열매는 먹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 열매를 먹으면 죽게 된다는 경고와 함께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전지전능한 신의 이 명령을 어기고 열매를 먹는다. 그래서 선과 악을 구분하는 지혜를 얻게 되었다. 그러자 신은 인간을 죽이지 않고 신들의 회의를 통해 인간이 신과 마찬가지의 지혜를 얻었으니 영생을 보장하는 생명나무에 달린 열매를 먹지 못하게 할 것을 결의한다. 그러한 결의에 따라 신은 인간을 에덴동산의 동쪽으로 쫓아낸다. 처음 경고한 대로 죽이지 않고 말이다. 신의 지엄한 명령을 어겨도 인간은 죽지 않았다. 다만 남자는 힘든 노동을 해야 하고 여자는 아이를 낳는 고통을 당해야 했다. 그런데 그런 고통도 벌이라기보다는 신의 최초의 명령, 곧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수행하는 일, 곧 자손을 낳고 기르는 일을 하면서 반드시 해야 할 의무와 같은 일일 뿐이었다. 남자가 노동을 안 하고 여자가 아이를 안 낳는다면 인류의 생존은 불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도대체 신은 왜 이른바 '선악과'를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인간에게 거짓말을 한 것일까? 그리고 어찌 보면 선악과보다 훨씬 중요한 생명나무의 열매에 대해서는 인간에게 아무 말도 안 해주었던 것일까? 물론 이는 구약에 나온 유대교의 신화이니 그 민족의 정서와 전통에서만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질문이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의 타당성에 대한 논쟁은 필요 없다. 그 답은 신학자와 교파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형태로 나올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신학에서는 신이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고 선악과를 먹은 인간을 죽이지 않은 것에서 인간에 대한 신의 지독한 사랑을 해석해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해석일 뿐이다. 신의 뜻을 누가 감히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신의 뜻을 두고 벌이는 논쟁에는 정답이 없다. 그저 학자와 교파에 따라 각자의 주장만이 가능할 뿐이니 말이다. 기독교에서 신의 독생자, 곧 신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예수조차도 죽는 순간까지 신의 답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다음 성경 구절과 같은 탄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후 세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마태 27,46)
이런 탄식에도 신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예수는 외롭게 죽었다. 예수에 대해서 이 정도인데 다른 인간에게 신이 어떤 반응을 했을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구약에서 곧 유대교에서 신은 인간과 긴밀한 상호작용을 하는 존재였다. 심지어 야곱은 신과 밤새 싸워 뼈가 부러졌지만 결국 이스라엘, 곧 신과 싸워 이겼다는 뜻을 지닌 이름을 얻어낼 정도였다. 인간이 신을 졸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다고 믿은 것이 유대인이고 유대교의 신앙이었다. 야곱 외에도 아담과 이브, 카인, 아브라함과 사라, 모세, 다윗, 욥, 엘리야, 요나, 이사야, 예레미야도 신과 직접 대화했다. 그러나 신약을 기록한 기독교에서는 그 누구도 단 한 번도 신의 목소리를 들은 경우가 없다. 물론 마태복음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태 3,16~17)
그러나 이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고백일 뿐이다. 예수가 신과 대화한 내용은 아닌 것이다. 하느님의 영은 성령을 말하는데 이는 기독교가 종교로 수립된 이후 교리로 확립된 삼위일체론을 바탕으로 해석된 내용인 것이다. 신이 이렇게 한 말을 누가 언제 들었는지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은 성경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른바 성인들 가운데 상당 수가 신과 직접 대화를 나누었다는 주장을 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신과 직접 대화를 나누었다고 주장하고 그런 내용을 주제로 간증을 하고 책도 냈지만 다 근거 없는 개인적 주장일 뿐이다. 신은 예레미야 이후 그 누구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구약에서는 수시로 인간과 상호작용을 하던 신이 왜 그리 된 것일까? 더 이상 인간과 대화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인가? 특히 예수가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바쳐진 희생제물이 된 이후 신이 인간에게 간섭할 필요를 더 이상 느끼지 않게 되었나? 물론 기독교 신자에게는 그럴듯한 변명이지만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전혀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기독교의 '변명'의 정점은 성령이다.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 이후 신은 오로지 성령을 통해 인간과 소통을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말 그대로 이는 믿음일 뿐이다. 성령에 대한 믿음은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바탕으로 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15~17.26)
성령을 예수가 직접 구체적으로 말한 것은 이 구절이 유일하다. 잘 알려진 대로 요한복음은 기독교가 어느 정도 체제를 갖춘 종교로 확립된 이후에 제작된 문서이기에 예수가 이 말을 직접 했다고 보기가 매우 힘들다. 예수의 입을 빌려 요한 공동체가 자기 신앙을 고백한 내용으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더구나 요한복음은 여러 사람이 작성하고 내용을 추가하고 나중에 편집한 문서이기에 더욱 그런 추론이 가능하다. 위에 인용한 구절에서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라는 구절을 보면 그런 추론이 더욱 가능하다. 당초 원래 문서에서는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라는 내용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많은 신학자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15절에 나오는 진리의 영을 보호자라고 설명하면서 그 명칭을 성령으로 규정한 이후에 추가된 내용인 것이다. 그리고 이 성령을 세상은 모르는데 너희 곧 기독교인만은 안다고 주장하면서 기독교의 배타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 박해받는 시기에 작성된 문서가 요한복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초기의 배타성은 이후에도 기독교의 가장 고유한 특성이 되어 수천 년 동안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른 민족을 박해하는 종교가 되어 기독교 밖의 세상을 모조리 적으로 여기고 악마화하는데 앞장섰다. 그 결과 기독교가 지배하는 유럽 국가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잔인한 살육과 박해를 실천하면서도 조금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악행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기독교보다 더 잔인한 종교 전쟁을 벌인 종교는 없다.
예수는 분명히 자기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자가 자신의 제자라고 했다. 다음 구절을 보자.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예수의 계명은 무엇인가?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여기서 너희는 분명히 예수의 제자다. 그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의 계명이다. 요한복음만 보면 이 사랑은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공관복음서에서 보면 예수가 말하는 사랑의 대상에는 원수까지 포함된다. 요한복음이 기독교 신자끼리만 배타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강조한 이유는 쉽게 알 수 있다. 배척당하는 상황에서 공동체의 단결을 강조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대교와 똑같은 신을 섬기는 종교로서 기존의 유대교 신자를 빼앗아 오다 보니 유대교 신자에 대한 증오심도 당연히 생길만하다. 그러나 공관복음에 보면 예수의 사랑은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서만 실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오히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요한복음에는 이런 말이 전혀 안 나온다. 그 유명한 산상수훈인데 말이다. 요한복음은 원수, 곧 유대교인을 사랑하는 것은 고사하고 증오하고 미워하라고 부추기는 내용으로 넘쳐난다. 그것이 인류 역사가 증명한 기독교의 본모습이기도 하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근본적인 이기주의의 본모습이기도 하다. 천하의 예수도 인간의 이기주의는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기독교 신자야 말고 인간의 이기주의, 특히 집단이기주의 말하자면 패거리주의의 대표적인 집단이 되어 버렸다. 자기들만 잘났고 자기들만 구원받고 자기들만 천국 간다고 믿는 그래서 예수가 말한 것과는 전혀 반대되는 삶을 살면서도 예수를 믿고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한다고 착각하는 자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쩌다 이리되었을까? 역시 예수가 말한 대로 기독교 신자들은 병든 죄인이기 때문이 아닐까?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이유를 다름 아닌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은가? 창조된 후에 자기를 만들어준 주님인 신을 배신한 것이 인간 아닌가? 그리고 구약에서 야훼신은 유대인들의 끊임없는 배신에 실망하고, 신약에서 신의 외아들을 다름 아닌 예수의 열두제자조차 그것도 일등 제자라는 베드로도 배신할 것을 예수가 미리 알고 있을 정도 아니었나? 야훼신도 예수도 못 막는 인간의 이기주의를 과연 누가 치유할 수 있을까? 아마도 아무도 못 막을 것이다. 인간의 이기주의는 근본적인 생존본능에서 나오는 것이니 말이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대로 이 본능은 맹목적이다. 이른바 der blinde Wille zum Leben, 곧 맹목적으로 살고자 하는 그 본능이다. 그러니 이 본능을 누가 막겠는가? 나만 살자고 예수를 배신한 열두제자의 생존본능을 예수도 못 막았으니 말이다. 지금도 기독교 신자는 예수처럼 심지어 원수를 위해 나의 목숨을 바치기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예수에게 기도만 하고 있을 뿐이다. 출세와 부의 축적, 그리고 명문대 진학을 빌고 있다. 그러면서 예수의 말씀을 실천한다고 설치고 다닌다. 말이 되는가? 이런 인간을 누가 제대로 예수가 말한 말씀을 실천하는 참다운 제자로 만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