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가 어디든, 해야 할 말이 있으면 큰 목소리로 열변을 토해 민망한 시선을 산다. 운전대를 잡으면 점마는 뭐하노, 아니 우로 꺾어야지, 자는 클났다, 여기저기 참견한다. 백화점 할인에 혹하는 엄마를 보며 세상 물정 모른다고 핀잔 주다가 돌아서면 당근마켓 알림을 꼬박꼬박 챙겨 본다. 내가 면허를 딴다고 애쓰는 걸 보면서 클러치는 어떠니 저쩌니 이미 학원에서 다 들은 것들을 일일이 알려준다. 재무재표를 볼 줄 모르는데 아는 사람이 일러주는 주식을 사 놓고 오르락 내리락하는 주가에 덩달아 가끔 기분이 좋거나 자주 기분이 안 좋다. 달에 한 번은 꼭 낚싯배를 타고, 매일 아침 나보다 먼저 일어나 공들여 가꾼 수족관을 구부정하게 앉아서 보고 있다. 며칠 전엔 포항의 테트라포드 위에서 내가 바다를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아들도 바다가 좋냐고 물어보면서 내심 좋아했다. 머리칼을 자세히 살펴 보면 새치가 히끔히끔 자라 있고, 마스크 끼는 걸 자주 깜빡한다. 요즘 무릎이 아픈데 병원에서도 별 이상이 없다고 하더랜다.
우리 아빠는 형편없는 대화 상대다. 누군가의 생각이 있고, 아빠의 생각이 있고, 그 간극을 가늠하며 침묵과 호응을 적절히 섞어야 하는 법인데 아빠와의 대화에 다른 사람의 생각은 보통 자리할 데가 없다. 상대방이 하고자 하는 말의 의중을 파악하기보다는 아빠의 생각이 공유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그래서 같은 말을 질리도록 반복한다. 그런 아빠가 형편없는 사람인가? 남이 그랬다면 눈살을 찌푸렸겠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아빠의 30년 근속 축하패를 바라본다. 아빠는 내가 살아온 인생보다 더 긴 시간동안, 공장의 같은 자리에서, 하루에 수백번 수천번 반복되는 지겨운 작업을, 로봇처럼 계속했다. 그게 아빠의 삶이다. 역동성 없는 아빠의 일처럼, 아빠의 삶도 생각도 천천히 천천히 응고되어 왔다. 그건 차게 식은 돼지기름보다, 혹은 굳어버린 촛농보다 더 단단하다. 아빠는 20살이 되자마자 거제의 정유공장에서 하루 열두시간을 일했다는데. 그보다 더 어린 아빠의 삶과 생각은 뚝뚝 떨어지는 돼지기름보다 뜨거웠을까?
굳을 대로 굳어버린 아빠의 관성은 발빠른 세상의 뉴스와 엄마의 습한 갱년기에 적절히 반응할 수 없다. 가끔 아빠와 다투면 그 관성에 나도 머리가 아득해지지만, 먼저 전화를 걸어 사과 같지도 않은 사과를 건네는 아빠의 목소리를 듣고 나면 그렇게 소진되고 이젠 굳어버린 아빠의 삶이 가엾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