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국내 팬덤은 「상실의 시대」가 막 출간됐을 즈음부터 열렬해졌다. 하루키를 빠는 건 세계 청년들 누구에게나 힙한 일이었다. 다자이 오사무처럼 자폐적이기는 커녕 매일 아침 러닝을 하는, 소설가보다는 정력적인 샐러리맨에 가까운, 그러나 정작 일본 내에선 아쿠타가와상도 받지 못한 작가가, 자기 책을 전 세계에 팔아버렸으니. 하루키와 하루키의 문학과 하루키의 라이프스타일은 어쩌면 반항의 상징이었다. 옹고한 주류가 인정해주지 않아 더욱 빛나는.
이 책이 민음사의 전집 시리즈 「노르웨이의 숲」으로 재출간됐을 때 즈음에 하루키를 빠는 건 오히려 힙하지 못한 일이 되었다. 문학사상사의 「상실의 시대」부터 민음사의 「노르웨이의 숲」까지. 약 이십년의 시간동안 많은 한국인은 「해변의 카프카」, 「댄스 댄스 댄스」를 읽었을 거다. 누군가는 드물게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혹은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를 읽었을 수도 있다.
"하루키를 빠는 건 이제 힙하지 못한 일이야."
이런 말이 나온 데엔 다 이유가 있다. 반복되는 하루키 문학의 컬트적 서사, 캐릭터성. 어디서 본듯한 배경. 이유는 모르겠으나 계속 언급되는 미국 문화의 상징들. 그러나 하루키를 말할 때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주로 섹스였다. 그의 소설엔 섹스가 너무나도 많다고. 여전히, 하루키의 소설을 두어개쯤 읽고선 그를 자신의 문학으로 성 판타지를 실현하는 변태 아저씨 정도로 치부해버리고 마는 사람이 많다.
왜 누군가는 하루키의 문학이 섹스 없이 진행되기를 바랄까? 소모적이거나 자기파괴적인 사랑의 묘사에서 섹스는 분명 좋은 메타포가 될 수 있고, 사실 대부분의 사랑은 소모적이거나 자기파괴적인 면이 있다. 하루키는 단지 사랑의 그런 면모를 포착하고 확대한 거라고 본다. 하루키 문학에서 섹스와 사랑의 관계는 바타유의 「에로티즘」에서 그러했듯 인간의 유약함에 대한 사유로 이어질 수 있다.
혹은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일본 중산층 가정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땐 공부보단 소설과 수영이었고, 와세다 문학부 시절에도 역시 학교 수업보단 레코드 가게를 들락거리거나 째즈 찻집 알바를 하며 째즈를 들었고, 학부를 마치기 전 결혼하였으며, 아내 요코와 째즈바를 운영하다가 대학을 어영부영 졸업했고, 동네 야구팀 경기를 보다가 갑자기 소설을 써야겠다고 결심해 그날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전업작가가 되고 나서는 하루에 한 시간씩 달리고 째즈와 음주를 즐기는, 어린 나이에 결혼해 아이 하나 없이 아내와 단둘이 지내 온 하루키라는 사람의 사적인 영역의 사랑.
「언더그라운드」 이전 그의 작품들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 그의 작품엔 작가 본인이 투영된 부분이 너무나도 많다. 수영을 즐긴다거나, 책과 음악을 탐구하는, 맥주를 좋아하는, 거리감 있는 인간 관계를 즐기며 세상을 관찰하는, 소년 혹은 청년의 캐릭터. 그는 소설을 쓸 때 정교한 설계를 거치기보단 본인이 창작한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대로 펜을 맡기는 스타일이라고 직접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러면 본인의 무의식과 자아가 글에 담기기 쉽다. 그래서 하루키 문학은 하루키적인, 하루키라는 사람을 엿볼 수 있는 면이 있다. 적어도 그가 겪어온 인생에서 사랑과 섹스가 뗄 수 없는 관계라면, 우리가 그의 소설을 외설적이라고 평가하는 건 그의 인생을 손쉽게 평가해버리는 게 돼 버리진 않을까. 한 사람의 삶을 가볍게 재단하는 게 좋은 문학적 해체는 아니지 않나.
하루키는 예전부터 '소년카프카' 같은 문답 사이트를 열고 독자와 소통하는 것을 즐겼는데, 한 일본 독자가 그의 작품과 섹스의 관계에 대해 질문한 답변이 문학사상사 단행본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부록에 실려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섹스란 인간과 인간이 깊이 서로 이해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수단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섹스라는 문제를 각자 다루고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것을 빼놓고는 크고 중요한 이야기를 작품화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는 성을 정신적인 것으로만 파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성은 육체와 정신을 결부시키는 통로라고 파악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