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X 라이터의 언어 과대망상
사실 이 글은 'Choose'가 '입력'이 된 역사를 파헤치는 글이 아닙니다. 개인 공부 목적으로 이것저것 찾아보고 정리한 글이에요.
이 글의 아이디어는 하나의 화면에서 시작되었다.
구글 크롬 확장앱 Momentum의 계정 생성 화면이다. 모국어로 한국어를 사용하며, 주로 한국어 서비스만 이용하(고 문구를 검수하)는 나는 이 화면이 직감적으로 어색했다.
Please choose a password.
비밀번호를 골라 주세요.
비밀번호를 골라 달라니? 나에게 비밀번호 장바구니라도 있나? (생각해 보니 있다. 머릿속에.)
내가 느낀 어색함의 원인을 추적했더니, 내가 검수하는 서비스의 회원가입 화면에서는 '새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세요'로 주로 가이드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러니까 문장 그 자체가 아니라, 서술어로 '입력'을 선택했던 수많은 경험 말이다. 꼭 신규 비밀번호가 아니더라도 이제는 화면 패턴이 너무나 익숙해 사용자에게 따로 가이드할 말이 없는 텍스트 필드의 안내 문구에는 '입력'을 사용해 온 나에게 Momentum이 요구한다. 비밀번호를 '골라' 달라고.
영어 서비스에서는 Choose를, 한국어 서비스에서는 '입력'을 만나는 이 상황에 호기심이 생겨 나름의 분석을 시도했다.
나는 앞서 'Choose'를 '고르다'로 해석했다. '1단어-1의미'로 영단어를 외운 나의 배경지식을 의심하며 ... Choose의 의미를 검색했다. 이럴 땐 영영사전이 좋다.
Choose에는 자동사의 의미도 있지만, 'Please choose a password'에선 타동사로 쓰였기에 타동사 의미만 발췌했다. 4개 의미 중 Momentum 예문에선 1a 또는 2b의 의미로 쓰였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러니까 내가 마주한 'Please choose a password.'는
'비밀번호를 골라 주세요.'보다는
'비밀번호를 선택해 주세요.' 또는
'어떤 비밀번호를 사용할지 결정해 주세요.'에 가까운 것이다.
나는 이 'Choose'라는 서술어와 '입력'이라는 서술어가 갖는 맥락의 차이(글 뒷부분에 설명)가 무척 흥미로워, 내친김에 다른 서비스의 비밀번호 생성 혹은 변경 문구를 찾아보았다.
한국어, 영어 서비스 몇 개에서 비밀번호 생성 또는 변경을 시도해 아래와 같은 비교군을 수집했다.
- 한국어 서비스는 모두 '입력'
Choose의 사전 정의를 조사하는 과정 도중, 나는 '입력'으로만 가이드했던 내 문구 검수 경험이 잘못되었던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 '너무 습관적으로 검수했나?', '더 고민할 지점이 없었나?'
일단은 안심해도 되겠다. 여러 한국어 서비스에서 같은 상황에 사용자에게 비밀번호를 '입력'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 영어 서비스는 대개 'Create'
Momentum의 사례가 스탠다드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내가 조사한 Momentum 이외의 모든 서비스에서는 'Create'를 사용하고 있다.
Create의 사전 정의는 따로 찾아보지 않았다. 우리가 'Creative'라는 단어에서 떠올리는 imaginavtive한 연상만 배제하면 된다. 이때의 Create는 'make new one' 정도로 받아들이는 게 적절해 보인다.
위 비교군을 기반으로 포착할 수 있는 '입력'의 형성 과정은 아래와 같다. (논리의 비약)
Create(혹은 Choose)는 한국에 들어올 때 모종의 이유로 인해 '입력'으로 번역되었다.
이 글의 결론으로 '모종의 이유'를 찾아보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비 UX 라이터가 보기에 큰 차이가 없어 보일 수 있는 세 서술어 'Create, Choose, 입력'이 나의 눈에는 어떻게 달라 보이며 그 차이가 왜 흥미로운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 세 서술어는 - 각 서술어가 암시하는 해당 행위의 맥락이 얼마만큼 넓게 묘사되는지가 다르다. 그러나 그 차이가 사용자의 서비스 이용과 관련한 유의미한 차이를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서비스 보이스의 차이에 가깝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 먼저 비밀번호를 생성하는 사용자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자. 아래 순서도는 (그 어떤 리서치 자료...나 유의미한 데이터...를 참고하지 않고) 온전히 나의 추측과 상상에 기반했다.
1. 사용자는 시스템으로부터 새 비밀번호를 생성할 것을 요청받는다.
2. 사용자는 본인이 으레 사용하는 비밀번호들의 목록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각자의 이유로 다른 패턴을 적용한 새 비밀번호를 떠올리기도 한다.
3. 이번에 새로 생성할 비밀번호의 후보가 추려진다. 그 후보는 대개 3개 이하일 것이다. 이 목록은 이후 과정의 어느 시점에서든 수정될 수 있다.
4. 사용자는 이번에 생성할 비밀번호를 최종 결정한다.
5. 결정한 비밀번호를 텍스트 필드에 입력한다. 최종 결정된 비밀번호는 그것이 제출되기 전까지 언제든 수정될 수 있다.
6. 제출된 비밀번호가 사용자 비밀번호로 설정 완료된다.
이 순서도를 하나의 전체 과정으로 가정했을 때, '입력'이 포함하는 맥락은 아래와 같다.
입력. 당신이 어떤 방식으로 새로 사용할 비밀번호를 떠올렸으며 무엇으로 정했든, 그냥 그것을 입력만 하면 된다.
'Choose'가 포함하는 맥락은 이보다 조금 더 넓다.
선택.
여러분 모두 번호 최종안을 기호 1번부터 3번까지 출마시켰을 텐데, 누굴 당선시킬 겁니까? 괜찮은 후보로 한 놈 골라 보시죠.
'입력'에 비해 사용자가 비밀번호를 만드는 행위가 조금 더 잘 상상된다.
'Create'가 함의하는 맥락은 이 중 가장 넓다.
사실상 모든 과정을 일컫는다.
비밀번호 장바구니를 머릿속에 만들고,
그 후보 중 서비스가 내건 조건을 모두 충족하며(비밀번호에는 육해공 삼위일체를 모두 포함해 주십시오),
나의 마음에도 들고 기억도 잘 날 거 같은 비밀번호를 고르고 골라,
입력했다가 지웠다가,
마침내 제출해 비밀번호를 '생성'하는 모든 과정.
Apple은 비밀번호를 포함한 모든 새 계정 정보 입력에 관해 단 한 문장의 가이드를 사용자에게 제공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Apple의 보이스를 감안하면, 이때 'Create'는 순서도 바깥의 행위까지 끌어당긴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Apple은 Sign in을 눌러 화면에 진입한 사용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우리 서비스 처음이구나?
우리 서비스 짱 멋진데~ 여기서 쓸 계정 하나 만들어야 해.
커피 마시면서 만들든, 화장실에서 만들든, 회사에서 상사 몰래 만들든
15초 만에 만들든, 닉네임 때문에 3일 밤낮을 고민하든 어쨌든 하나 만들어야 해.
기대되잖아, 계정 새로 만들어서 우리 서비스 시작하는 거.
그러니까 너만의 Apple ID 하나 만들어 봐.
(New ID, Your ID라고 적지 않고 Apple ID라고 적은 것도, 문구 전체를 Capitalize 해놓은 것도 도발적이다)
Apple의 예시는 극단적이지만, 어쨌든 세 서술어가 포함하는 맥락의 길이 차이는 보이스의 미묘한 차이를 만든다. 아니다.
차이를 만든다기보다는, 차라리 이쪽에 더 가깝다. 사용자가 서비스 온보딩 도중 만나는 중요 문구의 서술어는 ─ 고작 한 단어지만 서비스 보이스를 빌드업하는 하나의 구성 요소가 된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나에게는 '입력'이라는 서술어보다 'Create'나 'Choose'에서 더 강한 정도의 '행위자 능동성'이 느껴진다.
회원가입 도중 새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하는 상황에서,
'입력해 주세요'라는 요청은 사용자를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자'로 규정한다.
'Create a password'라는 요청은 사용자를 '비밀번호를 고안해 내는 자'로 규정한다.
'Choose a password'라는 요청은 사용자를 '비밀번호를 고르기 위해 심사숙고하는 자'로 규정한다.
사용자 행위의 정의가 곧 사용자 정의와 직결되기에 ─ 언어 민감도가 변태 수준으로 높은 나에게는 그 차이가 느껴지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서비스가 운영 중인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세요'라는 문구를 '새 비밀번호를 만들어 주세요', '사용할 비밀번호를 선택해 주세요'라고 바꾸자는 결론에 이르기는 어렵다. 그 정도의 판단을 내리려면 한국어 서비스에서 너도나도 '입력'이라는 서술어를 채택하게 된 맥락을 파악해야 하고, 한국어와 영어의 언어 차이로 인해 서술어 변경 시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를 꼼꼼히 따져야 한다.
위 케이스 스터디에 기반해 비밀번호 입력 요청 문구의 다른 한국어 버전을 뽑아 본다면
새 비밀번호를 만들어 주세요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문구를 이렇게 갈이 하면 보이스가 확 바뀔까? 사용성이 개선될까? 아니다. 이보다 치명적인 문제가 제품 도처에 널려 있다. 이 문구 변경 건에 투입될 리소스만 따져 보아도, 이 서술어의 차이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단어의 뉘앙스 차이로 글을 여기까지 끌고 온 내가 조금 바보 같기까지 하다.
공부의 결론은 이렇다. 서비스 보이스 조정을 연구 중인 UX 라이터라면, 온보딩에 노출되는 주요 문구의 서술어도 주요 변인으로 살펴볼 수 있겠다.
계정 생성이 아닌 비밀번호 변경 화면까지 뒤졌다.
쓴다. 비밀번호 변경 화면에선 Confirm, Enter, Re-enter, Change라는 서술어가 주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