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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장윤석 Mar 12. 2024

죽음과 살림의 학문, 생태경제(학)

정채인 선생님 1주기 추모포럼 발표문, 동향과 전망 2024 봄호 게재

* 이 글은 2023년 10월 20일 정태인 선생님 1주기 추모포럼의 발표문을 갈음하였습니다. 정태인 선생님은 불모지 같은 한국에서 생태-사회적 경제 사상의 선구자로 기억될 것 같고, 언젠가 남기신 글과 저서는 하나의 고전으로 자리 잡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먼발치에서 받은 은혜에 감사함을 표하고자 정태인 선생님이 남긴 말과 글에 대해 감상과 각주를 아래에 남깁니다. 작고하신 정태인 선생님께 깊은 애도와 감사를 다시 전합니다.      


1. 다른 경제 없이 전환이 될 리가      


“이 위기에서 빠져나가려면 경제학, 나아가서 사회과학 전체를 다시 써야 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런 단순한 학문으로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어느 누구의 배를 빌리지 않고 솟아난 사람이 어디에 있나요.” 독립 연구자라고 하여 스승도 계보도 없이 외딴섬처럼 떨어져 독립해 있는 건 아니다. 지금 여기 살고 있는 사회와 그 역사 속에서, 넓게는 마시는 물과 숨 쉬는 공기가 있는 지구의 기후와 생태 속까지, 우리는 묻어 들어가(Embedded) 있는 존재다. 


언뜻 자명한 이 사실을 무시한 학문이 있다. 경제학, 정확하게는 주류 경제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신고전파(Neo-classical) 경제학이다. 이 경제학은 인간 종의 불확실성과 비합리성, 개인과 개인의 합 이상의 사회의 고유성과 특수성, 모든 토대를 아우르는 공간과 환경이 위치한 생태계에서 제멋대로 독립하고는 독점적 지위를 누려왔다. 생태경제학자 케이트 레이워스(Kate Raworth)는 이를 두고 “모든 공공 정책의 모국어일 뿐 아니라, 공공 생활의 언어이며, 사회를 형성하는 세계관과 사고방식을 좌우”해왔다고 비판한다. 이 경제학은 '여타 조건은 불변한다면(Ceteris paribus)’이라는 전제 아래 기후위기를 알지도 인정하지도 않아 왔다. 그 결과 이 경제학의 섣부른 가정과 오류들은 만병의 근원이 되어 다중 위기로 점철된 지금을 만들었다.


이 경제학에 독점된 한국의 역사는 경제에 생태와 사회가 잡아먹힌 꼴로,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성장 신화로 자평 되지만 그 이면에는 자살률로 상징되는 해체 직전의 사회와, 최소한의 회복탄력성조차 비가역적으로 잃어버린 자연이 있다. 멀리 갈 것 없이, 외부화된 환경과 토목 사업의 편익을 잘못 저울질한 비용-편익 분석의 4대강 사업이나, 저평가된 미래 세대와 가치의 할인율로 인해 좌초자산의 리스크 평가에 실패한 삼척 등의 마지막 석탄발전소, 항공 산업의 성장 궤도에만 주목한 전국의 신공항 사업 남발 등이 그 예이다. 한국의 현재를 좌우하는 정책은 미래를 팔아 현재를 사는 근시안적 정책이거나, 자연 혹은 생태를 팔아 (회색)경제를 살리는 이분법적 정책이거나, 그마저도 노동과 생명을 팔아 체제를 지탱하는 정책이다. 미래, 자연, 생명을 팔아치운 사회와 경제가 지속 가능할 리가 없다. 다른 경제학 없이 전환이 될 리가 없다. 


그 경제학에서 생략되고, 누락되고, 삭제되고, 괄호 쳐진 여러 가지를 복원하고, 되살리고, 만들기 위해서 여러 경제학자들이 계속 분투하고 있다. 생태경제학(Ecological Economics) 또한 이 경제학의 독재에 반하는 맥락에서 페미니즘 경제학, 돌봄 경제학, 행동 경제학, 복잡계 경제학, 협동조합 경제학(사회적 경제) 등 다원주의 경제학들과 함께 태동하여 흘러가고 있다. 이제야 세계적으로 빛을 보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이제 막 알려진 정도다. 한국에서의 생태경제학의 첫 시작은 2000년대 초 일군의 학자들이 생태경제연구회를 만들어 세계적으로 1970~90년대 활발해진 논의들을 소개하며 시작되었다. 하지만 공백기가 생긴 채 명맥이 끊어졌고 중단된 논의를 2010년대 중순 정태인 선생님과 칼폴라니연구소협동조합을 비롯한 여러 독립 연구자들이 끌어올렸다. 2013년『협동의 경제학』의 마지막 장에 생태경제학이 제시된 것을 시작으로, 다원주의 경제학의 여러 면을 조명하는 책들이 번역되었다. 생태경제 이론이 주목받는 것은 시간문제이겠지만, 세 번째 시기는 아직 남겨두고 있다.  


최근 생태경제학자인 요르고스 칼리스(Giorgos Kallis)와 제이슨 힉켈(Jason Hickel)을 필두로 2020년 최초로 바르셀로나 자치대학에 탈성장 대학 프로그램이 설치되었다. 커리큘럼은 생태경제학과 정치생태학, 남반구의 관점과 탈식민주의에 기반한 페미니즘과 돌봄 경제 인류학이 그 축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아직 한국에는 생태경제학을 배우거나 전공할 수 있는 체계와 공간이 없다. 이 교육 과정은 3년 차를 맞은 지금 사전 모집이 마감될 정도로 성화를 받고 있다. 우리에게도 전환을 위한 다른 교육이 절실하며, 더불어 늘어나고 있는 독립 연구자들을 엮어낼 공간들이 필요하다. 지식 생태계가 일종의 커먼즈(Commons)라면 그 커먼즈를 관리하고 돌보는 이들과 노력이 필요하다. 다른 경제학을 펼치고 청년에게 자리를 주고자 한 정태인 선생님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선결과제는, 다원주의 학문과 다른 경제학이 설 수 있고, 독립연구자들이 살 수 있는 지식생태계를 가꿔가는 일이겠다.   

       

2. 정태인 생태경제 이론과 정책     


“인류의 생존을 위한 생태 전환은 역사상의 어떤 ‘거대한 전환(자본주의의 탄생이건,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로의 전환이건)’보다도 더 커다란 구조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정태인 선생님은 어떤 사상이나 어느 학문 분과로 분류할 수 없을 만큼, 경제학이라면 두루 살펴 연결적이고 통합적인 경제 사상을 형성해 왔다. 그중 10주년을 맞은 『협동의 경제학』의 마지막 장 “경제도 결국 자연 속에 존재한다”에 남긴 실마리와 유언 “환경을 위한 연대”를 바탕으로, 정태인 생태경제 이론과 정책 제안을 정리해 본다. 


정태인 생태경제 이론은 세 가지 특성을 지닌다. 먼저 총체성이다. 정태인 경제사상은 4박자 경제학(시장경제, 공공경제, 사회적경제, 생태경제)으로, 이것은 경제가 어느 하나의 배타적 원리로 독점되는 것이 아닌, 이기성(시장경제), 공공성(공공경제), 상호성(사회적경제), 지속가능성(생태경제)의 조화를 통해 구성되어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는 엘리너 오스트롬의 표현으로 다중심 접근, 칼 폴라니의 표현으로 다원주의 접근과 맥을 같이하고, 정태인 경제사상의 통합적·총체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통합적 시야는 생태경제학이 내재하고 있는 학문적 가능성이기도 하다. 생태경제학은 환경경제학과는 달리 외부에 위치한 고정되거나 주어진 환경만을 그 대상으로 하지 않고, 모든 경제 영역을 대상으로 자연의 원리에 맞는 방법론과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하기에 시스템 이론적 접근, 초 학제적 접근, 방법론적 다원주의 등을 연구 방법으로 삼고 있다. 정태인 선생님이 복잡계 이론과 연구에서 우리가 만들어 갈 대안의 원리를 찾아야 한다고 제안한 바 있다. 이처럼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학문과 방법론은, ‘이것 또는 저것’의 이분법적 논리와 분절적·배타적 학문이 아닌, ‘이것 그리고 저것’의 연결적 논리와 통합적·시스템적 학문이어야 한다.  


다음으로 사회성으로, 정태인 생태경제 이론은 현실가능성을 단단하게 지닌다. 생태경제학은 기존의 경제학이 망각한 지구 단위의 사고를 펼쳐내는 강점을 가지고 있지만, 내부에서는 자칫 생물리학적 접근에 쏠려 지구 단위의 물리적 사유나 분석에 논의가 치우쳐, 공허해진다는 비판이 있다. 생태경제학자 클라이브 스패시(Clive Spash)와 비비아나 아사라(Viviana Asara)의 지적처럼 생태경제학이 “생물 물리학적 현실과 근본적인 연관성을 핵심으로 삼아왔지만 경제가 담겨있는 사회와의 연결성은 적절히 다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태인 선생님의 이론과 이야기는 늘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렇기에 “환경을 보호하자”, “생태계를 되살리는 데 투자하자”와 같은 사회와 독립된 환경·녹색 담론이 아니라, 아래에서 살펴볼 것처럼 한국 사회가 걸어온 경로와 그 특질에 바탕을 둔 구체적인 제안으로 이어지게 된다. 생태경제 이론에 기반한 정책과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에 단단히 뿌리내린 제안이어야 하고, 이 착근성이 그 성패를 가른다고 본다.

세 번째는 정치성으로, 이 지점은 녹색 담론들과 행위자들이 자주 부딪히고 마는 벽이자 고민과도 닮아있다. 기후과학자들의 경고가 수십 년째 경고로만 그치고 현실에서 작동하는 힘이 없었던 것처럼. 기후가 위기라는 말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고, 경제가 생태계 속에 묻어들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다. 탈성장 담론 또한 사회 변화 전략의 부재와 그 실현력의 미약함에 대한 고민이 크고 최근에는 비엔나 그룹의 ‘탈성장의 전략’과 정책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생태경제 이론은 전환의 주체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공허해지기 십상이고, 그 실현을 위해서는 구체적인 전략과 정책, 그리고 정치를 요청한다. 정태인 선생님이 실천적 지식인으로 정당에서 이 문제의식과 제안을 정책화해 온 동시에 한미FTA 반대운동 등 광장에서 활동가로 살아오시며, 이 전환의 전략과 정치를 얼마나 강조해왔는지는 더 부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어떤 학문이든 사상으로서 울림과 파동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 시대적 긴요함과 실천성이 있어야 한다. 한국의 생태경제 사상의 한 줄기가 학문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치열한 현안 속 정치 현장에서 형성되어가고 있다는 점은, 앞으로 이 사상의 생명력을 담보하리라는 기대를 잇게 된다.      


다음으로, 정태인 선생님이 이러한 생태경제 이론에 근거해서 남긴 방향과 정책 제안을 살펴보려 한다. 수많은 정책들을 코로나·기후위기에서의 국가의 역할, 탄소세를 통한 시장의 통제와 녹색산업, 협력을 통한 경제 원리 재조직과 시민참여로 정리해 볼 수 있다. 


먼저 녹색전환에 있어 국가의 역할과 방향을 살펴보자. 정태인 선생님이 2020년 정의당에서 제안한 「생태전환의 정치경제학 – 탄소세와 한중일 공통 탄소가격을 중심으로」에는  우리가 코로나 팬데믹을 배우며 겪은 교훈을 바탕으로 전환에 있어 국가의 역할과 방향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주되게 서술한다. 코로나와 기후위기의 상관성은 이미 입증되었고, 생태문제는 “시장의 근원적 한계”이기에, 기존의 안정적인 경제가 깨어진 비상상황에서 시장의 자율조정장치에 의해 작동하리라는 믿음에는 근거가 없다. 정태인 선생님은 “‘방역이 곧 경제’인 것처럼 ‘생태가 곧 경제’인 시기가 곧 온다. (중략) 극복의 방향도 유사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국가가 경제에 적극 개입하여 기후위기와 불평등을 동시에 해결할 전환을 주도해야 함을 제안한다. 이 제안에는 포스트케인지언 경제학의 ‘투자의 사회화’ 개념에 기반한 코로나-19 위기에 대한 정부 정책에서 강조되는 재정지출의 확대, 인플레이션 없는 통화 증발, 국채발행 등이 포함되어 있다. 더하여 네오슘페터리안의 국가혁신체제론과 클러스터정책, 특히 마리아나 마추카토의 국가가 방향을 잡는 기술혁신과 인내 자본에 대한 강조가 포함되어 있다. 위기에 있어서 유용한 경제학들을 토대로 한 국가의 전환 정책은 다음과 같이 그린뉴딜 정책으로 제안된다. “우선 산업, 건물, 교통의 에너지원을 전기로 바꾸고 최대한 재생가능에너지로 발전해야 한다. 그래도 나오는 쓰레기는 순환경제로 처리한다. 국가는 생태기술의 혁신을 주도해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야 한다. 이렇게 화석 기반 인프라 자체를 바꾸고 시장을 창출하는 대규모 투자는 당분간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고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낼 것이다. 약 10여년의 전환기에 부여되는 ‘생태 배당(ecological dividend)’인 셈이다. 최근 미국 정치권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그린뉴딜 정책이 바로 이런 전략이다.”


다음으로, 탄소세를 통한 시장의 통제와 국제적 협력의 가능성이다. 정태인 선생님은 “잘 설계된 탄소 가격은 효율적인 방식으로 배출을 줄이는 전략에서 필요불가결하다”는 조지프 스티클리츠의 이론에 발맞추어 탄소세 정책을 설계했다. 배출권 거래제도는 그 시장 가격이 정부 목표에 어울리는 수준으로 결정될 수 있을지 불확실하기에, 넷제로를 달성할 때까지 조정에 의해 계속 높아지는 탄소세를 제안한다. 이 탄소세는 재생에너지로의 에너지 전환 속도를 가속할 것이고, 이는 화석연료에 의한 보조금의 전액 삭감을 전제로 하며, 강한 탄소세는 시장에서의 전환을 촉발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게 제안되는 탄소 가격은 니콜라스 스턴과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견해에 바탕을 두고, 톤당 50달러에서 시작해서 2030년 75달러, 2050년까지 톤당 125달러이다. 역설적이게도 IMF의 분석에 의해서 비용편익을 고려하는 경우에도 탄소가격은 75달러에서 후생이 극대화된다. “기후위기를 막기 위한 공통의 탄소가격과 한국의 효율적 탄소가격이 일치한 건 분명히 우연이다. 하지만 이 분석들을 믿을 수 있다면 그것은 행운이기도 하다. 지구 전체를 위한 의무 이행이 곧 국가의 효율성도 최고로 높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시장주의적 경제학이 만들어낸 폐해로 인해 시장에서의 전환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유의미한 현실적 경제 전환을 만들 수 없다는 지적이 인상에 남는다. 지구 전체의 의무 이행과 국가와 시장의 방향을 조율하는 것이 전환 정책의 주요한 과제라는 것이다. 나아가 한중일 동북아 공동의 탄소가격을 설정하자는 제안이 이어진다. “한·중·일 공통의 탄소가격은 생태전환을 돕는 유력한 제도”라며, “이들 세 나라의 공통 탄소가격은 그 자체로 탄소 배출 감소에 큰 영향을 미치고 EU 등의 ‘생태클럽’과 경쟁하게 되면 효과가 더욱 커질 것이다”는 분석이 이어진다.      


“세 나라의 거대한 외환보유고(약 4조 5천억 달러)와 탄소세수 중 일부를 탄소배출량에 비례해서 생태기금으로 적립할 수 있다. 이 기금은 미세먼지, 황사 대책, 팬데믹 대처 등 공동 정책, 공동의 생태기술 혁신(예컨대 신소재 배터리 기술), 역내 지역의 구조조정 보조, 탄소클럽에 들어오려는 발전도상국에 대한 보조에 사용될 것이다. (중략) 동북아 그리드는 북한 경제의 에너지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으므로 1차 핵협상 당시의 경수로 건설과 비교해 보면 슈퍼그리드에 의한 에너지 문제 해결이 얼마나 획기적이고 얼마나 강력한 “비핵화” 유인이 될 수 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북핵 문제 해결에 강력한 인센티브가 될 수 있다. 장차 동아시아의 생산연쇄를 이루는 주요국들을 모두 포함한다면 이 탄소클럽의 성과는 곧 기후위기의 대처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한·중·일 탄소가격 정책은 동아시아의 녹색평화전환을 위한 경제협력의 가능성으로 확장해서 살펴볼 수 있다. 유럽연합이 공동의 자원 관리와 생태계 관리, 경제적 역할과 권역을 공유하던 것처럼,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경제 정책을 검토해 볼 필요 또한 제시된다. 


마지막으로, 협력을 통한 경제 원리 재조직과 시민참여이다. 정태인 선생님의 그린뉴딜 안에는 사회적경제에 대한 고민이 녹아들어 있었다. 정부가 제 역할을 하고, 시장이 길이 들면, 남은 전부는 ‘세 번째 기둥’이자 ‘천 개의 꽃’인 사회적 경제와 시민들에게 달려있다. “그린뉴딜은 특히 중소기업 위주의 혁신 클러스터를 지원한다. 농업과 수공업 제품 위주의 “산업지구”에서 출발해서 이제는 첨단산업 산업지구(클러스터)로 발전한 에밀리아 로마냐 모델은 우리의 생태전환에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비단 먼 나라의 사례만 우리에게 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정태인 선생님의 글을 읽다가 한국의 1세대 진보 경제학자 박현채 선생님의 민족경제론을 알게 되었다. 대기업이 아닌 민중과 작은 기업, 농업 등을 기반으로 한국 사회가 수출 주도의 추출적 경제 형태로 들어서기 이전에 가능했던 하나의 전환 경로였을 것이다. 협력을 통한 경제 원리의 재조직은 우리에게도 이어져왔고, 우리에게도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을 읽었던 것 같다. 그린뉴딜을 단순한 토목 인프라 정책이 아닌“새로운 “좋은 삶”의 유형을 형성하는 과정(Ecological way of Life)”으로 보았던 견해가 귀하다. “새로 탄생한 시민은 더 이상 성장에 목을 매고 인류 공유의 커먼즈를 침해하여 우리 모두의 삶을 파괴하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녹색의 가능성을 과거를 넘어 미래에서 찾고자 한 게 아닐까. 이와 같이 생태시티즌쉽(Ecological Citizenship)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시민상과 좋은 삶의 유형을 형성하는 과정이 정태인 선생님이 그리던 전환의 주된 토대였음을 상기한다.           


3. 생태경제학의 논의와 과제들     


이어서는 정태인 선생님이 남기신 글들을 읽으며 일어났던, 생태경제학을 바탕으로 한 논의와 과제들을 네 가지로 정리해서 풀어보려 한다.      


(1) 세계관: 탈성장과 전환지표     


생태경제학의 세계관은 경제계가 사회와 자연(생태계와 기후 그리고 지구 행성과 태양계)에 묻어들어가 있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생태경제학 세계관의 뿌리를 찾아볼 때 먼저 1971년 『엔트로피 법칙과 경제 가정(Entropy Law and Economic Process)』를 꼽을 수 있다. 열역학 2법칙을 바탕으로 경제계가 물질 흐름과 그 유용성의 감소 원리를 따르고, 인간의 경제활동 역시 자연법칙을 거스를 수 없고 경제활동의 가장 기본적인 제약은 자연법칙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다음으로, 1972년 『성장의 한계(Limit of Growth)』에서는 유한한 지구에서 물리적 규모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여, 현재 인간의 경제 규모(경제성장 규모와 속도)를 지속가능성을 보장하는 추이로 제한하고 그 관성에서 벗어날 것을 제안한다. 이렇게 생태경제학은 탈성장 담론 및 운동과 같은 문제의식과 상황에 서 있다. 탈성장 철학에서는 구 세계관의 파괴와 재형성을 중요시하는데 이는 프랑스 철학자 세르주 라투슈(Serge Latouche)와 그리스 철학자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Cornelius Castoriadis) ‘상상계의 탈식민화’ 개념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가 벗어나야 할 것은 기존의 경제 시스템 뿐 아니라, 그 속에서 자리 잡은 빈곤하고 식민화된 상상력이라는 것으로, 우리가 자초한 문제는 이를 야기한 사고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당연한 이야기다. 여기에는 경제성장이 모든 경제 문제를 해결할 만능열쇠라는 신화를 포함하여, 시스템적이지 않은 직선적 사고관과, 우상향을 진보로 파악해 온 관성을 포함한다. 


이와 같이 생태경제학의 세계관은 기존의 구 경제학이 –철학적 중립성 및 객관성을 견지하고 있다고 가정한 채 독점한- 화석연료 기반의 경제성장 세계관을 갈아치울 것을 담고 있고, 그에 따라서 모든 존재론, 논리학, 방법론, 정책의 전환을 요구한다. ‘세계관’에 대한 이론을 정립한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Karl Mannheim)의 말처럼 “모든 관점에는 이를 탄생시킨 독특한 상황이 있”고, 기후위기라는 독특한 상황은 이전과는 다른 관점을 정책에 탄생시킨다. 이는 정책의 시간관을 미래 사회의 효용과 위기를 반영할 수 있도록 다르게 구성하고, 정책의 시야와 공간을 확장해 지구-사회-경제를 단일한 복합 사회-생태로 이해하며, 기존 정책이 체제 유지적으로 기성 사회 질서를 보존하지 않도록 기후정의의 원리와 현재 위기의 수준을 반영한 급진적 정책관의 필요를 제시한다.


이러한 정책의 전환은 지표를 바꾸는 것에서 시작된다. 정책에서 세계관을 담당하는 것은 지표의 영역이고, 지표는 평가의 기준 및 잣대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틀(Frame)을 제작하는 까닭이다. 이미 GDP라는 잘못된 예시를 통해 지표가 정책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한 바 있다. 지표가 사회의 상상계를 설정하는 힘을 간과하지 않고, 전환을 위해서 다른 지표의 설정과 적용을 준비해야 한다. 일찍이 이와 같은 맥락으로 생태발자국(Ecological Footprint),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행복지표(Happinees Index) 등이 논의되었고, 기후·생물다양성 위기의 심화와 관련하여 지구위험한계지표(Planetary Boundary), IPCC 기후영향지표(Climatic Impact Drivers, CIDs)가 제시되었으며, 오늘날 암스테르담, 코펜하겐 등에 적용된 도넛(Doughnut) 지표 등이 실질적인 기능을 해가고 있기도 하다.


정태인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우리는 생태 문제를 집약해서 보여주는 지표를 아직 찾지 못했다. (중략) 개인, 지역공동체, 국가, 그리고 글로벌 사회가 구체적인 실천을 하려면 이런 생태지표의 개발에도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기후·생태 복합위기를 풀어나가기 위해(왜), 생태와 사회 경제의 전환을 목적하고(무엇을), 전환에 필요한 모든 영역과 지표를 배열하고 합산하여 형태화(어떻게), 민주적으로 행정 및 경제 단위를 포함해 살아가는 시민 모두(누가), 온실가스 배출제로의 미래 시점을 고려(언제), 국가 및 지방 행정 단위를 포함한 모든 공간에서(어디서) 전환지표의 제작과 적용이 필요하다. 


(2) 가치와 방법: 화폐에서 엔트로피로, 생태학살 법과 학문 윤리의 재설정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 경제 시스템은 중요한 두 가지 흐름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생산과 소비를 통해 가격이 재생산되는 화폐의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경제활동 자체의 기반으로 생태계에서 경제계로 투입되어 물질이 재생산되는 엔트로피의 흐름이다. 즉, 경제시스템은 우주라는 닫힌계 안에 존재하는 열린계다.”  

   

현대 경제에서 재화 혹은 서비스의 가치는 화폐로 측정되지만 – 그 화폐도 다양성이 자리 잡지 않고 달러의 패권에 독점된 – 화폐는 국가 및 사회의 신뢰(신용)이 없다면 휴지 조각이고, ‘가치’는 그 재화와 서비스 혹은 에너지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 생태경제학은 화폐의 흐름보다 물질의 흐름이 더 근본적이라 보고, 따라서 화폐의 가치보다 그 물리적 유용성의 정도에 따른 엔트로피에 가치를 두고 있다. 경제의 단위를 화폐에서 물리적 가치와 (나아가) 사회적 가치로 바꾸는 과정은 앞서 살핀 GDP에서 다양한 전환지표로 향하는 과정과 궤를 같이한다. 이 가치론은 생태경제학의 방법론에 적용되었을 때 물질흐름분석(MFA, Material Flow Analysis)과 같이 화폐로 측정되기 이전에 물질의 총량과 흐름에 대해서 측정할 수 있게 한다. 이 가치론과 방법론은 많은 것을 다르게 사유할 수 있게 한다. 예컨대 4대강 사업을 들어보자. 정태인 선생님은 “자연에서 흔히 관찰되는 복잡계 현상을 비용편익 분석이라는 원시적 수단으로 측정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에 속하는 일인지 모른다.”고 말했는데, 환경영향평가와 비용편익분석으로 강의 화폐적 효용을 (평가절하해서) 계산한 것이 아닌, 강과 인근 생태계 순환이 가진 가치를 살필 수 있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물을 수 있겠다. 


이는 생태경제학의 윤리학에 대해서도 시사점을 남긴다. 화폐적 관점으로만 협소하게 결정되었던 수많은 ‘사업’들이 기후위기 시대에도 유효할까. 더 이상 많은 경제적 ‘사업’들이 이전과 같은 법적 테두리와 규제하에서 존속할 수 없다. 예컨대 한국 정부가 마지막 석탄발전소로 수출해 지금까지 지어지고 있는 베트남 붕앙-2 석탄발전소의 경우를 들어보자. 이 사업은 재정 위기에 처한 두산중공업(현 두산에너지빌리티)를 살리고, 한국전력의 재무 위기를 해결할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석탄발전소가 완공될 2030년에도 이 석탄발전소가 한국과 베트남에 돈을 벌어줄 사업으로 불릴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국제적 화석연료 제한 조치에 따른 석탄 가격 하락과 같은 좌초자산 리스크도 있겠지만, 이 사업 자체가 녹색범죄일 수도 있다. 국제형사재판소(ICC)에서 논의되고 있는 생태학살의 정의는 “생태학살은 불법적(unlawful)이거나 악의적(wanton)인 행위이며, 이러한 행위로 인해 환경(environment)에 심각한(severe) 동시에 광범위하거나 장기적인 손상(either widespread or long-term damage)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고 행해지는 행위를 의미”하고 해당 석탄발전소는 이러한 정의에 부합한다.


만약 화폐적 사고방식에서 결정한 사업이 사람을 포함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생태학살 범죄라면 이는 큰 윤리적 질문을 제기한다. 생태경제학은 그간 화폐적 사고의 폐단에서 평가 절하되거나 제외된 수많은 요소들을 재사유할 문제의식을 갖추고 있으며, 다가오는 사회의 법과 문화 속에 경제가 생태를 잡아먹는 꼴이 반복되지 않도록 학문 윤리를 재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3) 전환상: 사회적경제와 세 번째 기둥


생태경제학이 유용한 학문 정도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전환의 풍경을 만들어가려면 이러한 공생의 원리로 작동하는 지역과 마을이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무수히 많은 사례들을 발굴하여 연결하고 해석하는 작업들이 과제로 남아 있다. 그리고 다행히도 세계 각지에는 생태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가 조화를 이룬 공간들이 여럿 있다. 미국 클리블랜턴과 영국 프레스턴처럼 ‘모두를 위한 경제(Democratic Economy)’모델이나, 이전부터 이어져 오던 생태적 가치를 지금도 이어가고 있는 스페인 몬드라곤, 캐나다 퀘벡, 이탈리아 에밀리아 로마냐 등 사회연대경제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지역들을 살필 수 있다. 여기에서 생태경제와 사회적경제의 연결 지점을 찾을 수 있다. 


국제노동기구(ILO)에선 사회적 경제를 생태적·사회적·공동체적 목표가 하나로 수렴되는, 지속가능한 사회발전모델로서의 가능성에 주목한 바 있다. 생태경제 모델의 많은 경우는 사회연대경제의 모습 안에 포함될 수 있는데, 사회 안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공유지의 비극을 막고 공동 관리가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구조를 띠고 있다. 60+기후행동 경제학자 정건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태문명을 위한 경제 체제는 지구의 수용 능력 안에서 운용되는 생태적 경제가 되어야 한다. 무한대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주의 대신 경제생활의 목적과 가치가 반영된 경제활동을 하는 개인과 경제 조직, 그리고 새로운 경제 주체를 만들어내고 경제 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한 제도와 유무형 인프라의 구축이 필요하다. 그것은 재생에너지와 농업, 교통과 휴먼 서비스를 중심으로 분권화된 지역들에 기반한 사회적경제 생태계의 구축이 될 것이다.”


생태 경제와 사회적 경제의 연관성 혹은 유사성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먼저 지역성을 들 수 있다. 어떤 지역에 뿌리내리고 움직이는 사회적경제 조직은, 초국적 규모로 수탈적 형태를 띠는 기업과는 다른 원리를 가지고 있다. 사회적경제 방식의 경제조직은 짧은 이동거리와 에너지 사용량 등 저감 면에서 여러 유리함을 가지고 있고, 적응 면에서도 가뭄이 들면 물을 분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지역에 생물적 조건과 한계를 감안하고 재난 대응과 이후의 회복을 이뤄가는 데 유리하다. 생태와 사회에는 공간, 어떤 구체적인 지역이 필요한데 (자본주의적) 시장에는 공간이 없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기후위기 대응의 모든 행동은 지역적으로 실천할 수밖에 없다. 더하여 지역에서 무너졌던 신뢰를 회복하여 사회적 응집력을 모아내는 방식으로의 사회연대 전환 경로는, 지역의 기후위기 대응 역량을 증진하는 힘도 있겠다.      


(4) 유념: 평화     


전쟁이 더 이상 낯선 소식이 아니게 된, 슬픈 표정의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일반 경제 이론은 평화를 전제로 한다. 생사가 달린 전시 상황에서 어떤 경제 이론도 순탄히 작동할 수 없다. 확전은 공멸이다. 이것은 기후위기 대응에서도 같은 모습을 보이는데, 2022년 3월 빚어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파리협정 이후 구축한 전 지구적 탄소감축 거버넌스가 크게 흔들린 것이 가까웠다. 기후위기가 각 지역의 물과 식량 등 경제의 토대에 리스크를 발생시키고, 이것이 경제 공급망과 회랑으로 연결된 지역들에 지정학적 리스크로 전파되거나 위기를 중첩하는 식의 위험은 잘 밝혀져 있다. 따라서 생태경제학의 모든 정책 수단이 효과적으로 전환 정책의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증가하는 안보 위험을 관리하고 국가 및 지역 간 갈등을 전환하는 것이 선결 과제이다. 일찍이 생태경제학자 허먼 데일리(Herman Daly)도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냉전 시대와 같이 군비경쟁에 한정된 자원과 힘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인 군축을 통해 예산을 확보하고 전환의 안정성을 높이는 정책안을 제안한 바 있다. 


근래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가 어려운 난국에 놓이고, 한국전쟁 이후에 가장 전운이 감도는 얼어붙은 시기를 직면하고 있을 때, 기후위기 대응과 녹색전환을 위한 전제가 이 지역 동북아의 평화임을 유념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가 않다. 특히 한국은 군사비용이 세계 10위 권 안에 달하는데, 50조 이상에 달하는 이 예산이 기후 대응 예산의 수배에 이르느 것을 상기할 때, 전환 예산의 가장 주된 출처는 군축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 정부는 점차 수출 항목과 양에서 무기의 비중을 늘려가고 있고, 이제는 친환경 탄약과 같이 군사 분야의 그린워싱도 눈에 띄는 있다. 지금과 같이 전쟁 위험을 통한 통치와 그 과정에서의 이익으로 운영되는 경제는 필경 모두를 자멸로 이끌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면 그 비극이 멈추기 전까지 전환은 없을 것이고, 그때는 골든타임의 논의가 아니라 죽어버린 것들에 대한 소생과 회복 말고는 어떤 것도 살필 수 없을 것이. 

평화 구축을 위한 경제적 협력에는 여러 가지 안이 있다. 한·중·일의 공동 탄소가격과 녹색 협력도 그 예일 터이고, DMZ의 생태적 공동 관리 및 이를 바탕으로 한 그린 데탕트 등 실로 우리에게 남은 과제가 많다. 티모시 모튼(Timothy Morton)에 의하면 “생태적 사상은 상호연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라고, 평화는 복합적 관계망을 이해하고 실현할 때 살아난다 한다. 생태를 생각하는 것이 평화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겠다. 평화는 불신과 적대적 위기를 키워가는 이들에게는 오지 않고, 예비하고 바라는 이들에게 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대량 살상이야말로 극도의 외부성입니다. 다 죽으면 나 혼자 돈이 많거나 능력이 많아도 같이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중략) 이렇게 강력한 외부성은 언제나 가변적인 국가가 아니라 숙고하는 민주주의 공동체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4. 죽음과 살림의 학문     


경제가 생태를 잡아먹은 꼴의 지나온 역사를 넘어, 생태와 경제의 관계 회복이 우리 앞에 과제로 놓여있다. 경제(Economy)와 생태(Ecology)는 공동의 집과 관리를 뜻하는 라틴어 오이코노모스(οiκονόμος)에 언어적 기원을 두고 있다. 우리말로 ‘인간의 살림살이’냐, 생태계의 살림살이냐의 차이로, 무언가 먹고사는 순환의 과정으로서의 ‘살림살이’라는 점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즉, 생태와 경제를 동의어로 살펴볼 수 있고, Ecological Economics를 우리말로 풀 때 생태경제학이라는 직역 말고도 (인간과 자연의) 살림학과 같이 순화하여 의역할 수도 있겠다. 경제학은 일반적인 교과서에서 “사회가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연구하는 학문”으로 정의되지만, 한자 경제(經濟)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약자로 세상을 다스리고 국민을 편안하게 만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금의 협소한 정의를 벗어나 공동의 집을 관리하는 살림살이의 학문으로 재설정 될 때 기후위기를 초래한 학문에서 살리는 학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생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톺아보는 일도 중요하다. 한살림을 만들었던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있다’는 말처럼 작고 큰 것이 따로 없이 연결되어 있는 관계를 생태라 일렀다. 이에 바탕을 둘 때 상시 변하는 것들의 관계를 다루는 생태학(Ecology)은 연결의 학문이자, 동시에 생태주의(Ecology)로서 생태계의 질서이자 이 질서를 회복하는 운동성을 뜻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생태라는 말이 담고 있는 맥락이다. 실제 사회는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사회(Society, 社會)라는 개념은 나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폴라니는 공기처럼 인지되지 못한 채 함께 있던 사회가 악마의 맷돌이 굴러가는 근대 자본주의 질서의 폭력적 제도화로 해체되고 나서야 비로소 발견되었다고 보았다. 사회가 단순한 객체가 아니라는 사실은 생명으로서의 사회를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생태 또한 마찬가지다. 근대의 거대한 전환이 이뤄지기 이전의 많은 토착적 사회에서는 수십 개의 바람과 별을 지칭하는 말은 있었지만, 환경과 생태 자체를 독립하여 설정하고 설명하는 말은 없었다고 한다. 파괴되고 나서야 발견된 것들의 역설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생태경제학, 살림학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공기처럼 존재하던 생태와 경제의 붕괴가 전환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기후위기의 심화는 녹색전환 담론을 요청하고, 생태학살과 같은 비극적 사태는 급격한 전환의 바탕이 된다. 한국 내에서도 성장의 정점을 찍고, 잔치가 끝나버린 채, 찾아오는 후폭풍과 내리막길을 마주할 지금에 와서 생태경제학이 논해지는 것이 지니는 시사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들이 가져다주는 시사점은, 죽어가고 죽어버린 것이 우리에게 가져다줄 것이다. 죽어가는 지구 속에서 태동한 학문이 지니는 살리는 힘, 그 지향성을 주목해야 한다.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고, 미증유의 사태가 미증유의 전환이 될 수 있도록 하는 힘과 역설적 상상력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이렇게 관계와 살림은 생명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태어나 죽는 생명의 본질에 기반을 두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던 것을 다시 돌아보고자 한다. 정태인 선생님이 언급하신 것처럼.     


“녹색은 생명입니다.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생명과 관련된 모든 제도를 생명의 만개에 맞춰서 재설계해야 합니다. 모든 제도의 목표는 생명입니다. 자연과 그 부속물인 인간의 생명을 살리고 한껏 피어나게 하는 것, 그것이 녹색혁명당 최고의 가치입니다.”



* 이 글은 정태인 선생님 1주기 추모포럼 발표문을 『동향과 전망』2024년 봄호(120호)에 게재한 것입니다. 발표문 원안에 추모의 마음이 담긴 더 많은 맥락이 담겨있어서 첨부합니다. (첨부된 파일에서 각주를 살필 수 있습니다.)

** 1주기 기사와 자료집은 아래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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