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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장윤석 Jun 23. 2024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2024.6.12 여섯 번째

“지금이 아닌 어딘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자우림 6집 <Ashes To Ashes>에 실린 곡 ‘샤이닝’을 여는 가사 한 구절을 옮긴다. 우리의 추모축제 ‘지금, 여기, 가까이’를 준비하면서 수심 깊은 고민이 생겼다. 이 자리는 남은 사람들을 위한 자리인가. 돌아간 이를 위한 자리인가, 다른말로 이 자리는 ‘지금, 여기, 가까이’ 있는 이들을 위한 자리인가,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있는 이들을 위한 자리인가.


답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전자이겠지만, 나는 왜인지 돌아간 이와 더불어 ‘지금, 여기, 가까이’에 있지 않은 언젠가 어딘가 있을 이들을 생각하게 된다. 뜻은 마음으로 이어지는가. 제도, 의례, 전수로 이어지는가. 이 대립항은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의 대립이다. 마음 같아서는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마음만 남은 무형의 것이 형태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여럿 보아왔다. 기억하지 않으면 잊혀지고, 새기지 않으면 사라진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다. 바람에 날려 꽃이 지는 것을, 고사한 나무가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람은 잊어야 내일을 살 수 있기에, 우리는 살기 위해 어제를 잊는다. 그것을 애써 확고하고 단단하게 조각하고 새기어 영구 보존하려고 드는 것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인위다. 그리고 아마 신승철 선생님이었다면 당신이 위인전에 올라 오래토록 기억되지를 원치는 않았을 것이다.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왜 존경해 마지않는 학자가 시간의 흐름에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이 이렇게 안타까운지 모르겠다. 그리고 왜 죽은 학자의 일기장을 공개하는 제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말없이 돌아간 이를 대변하여 그의 공적을 기리고, 저평가를 정정해야는 게 아닐까, 이 뜻을 이어서 대와 맥이 끊기지 않도록 삼대째 이어지는 간장독처럼 지키고 살려가야 하는 게 아닐까.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빛을 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닦아가면서.


* 신 샘이 꿈에 나와 나를 혼낸 적이 있었다. 일기장 출판하지 말라고 혼낸 거였을까. 스스로의 애도에 무능한 탓에 사회적이자 공적인 애도에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 돌아보게 된다. 우리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다.  

** 사진은 생태전환대학 6강 제타안의 뜨개질 교실에서 만든 무언가. 뜯어진 바지를 꿰매는 패치워크를 상상했으나, 또봄이에게 사랑받는 장난감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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