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6.21 아홉 번째
사람의 생을 돌아보기에 그의 장례식만 한 곳이 있을까. 한평생 이 사회의 가장 뜨겁고 절실한 곳 옆으로 밥묵차를 끌고 가 밥을 차려왔다는 유희 님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영정 사진에 절을 올리고, 빈소를 지키는 분들께 인사를 드린다. “어떻게 오셨는지...” “아, 언젠가 밥을 한 상 얻어먹은 감사한 기억이 있어서요.” “고맙습니다. 오늘도 드시고 가셔요.” 한 번 주고받은 대화에 실로 많은 것들이 깃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많이 슬퍼했고, 많이 웃었다. 돌아가신 분을 모두가 자랑스러워하고 있다는 정동을 느꼈던 것 같다.
꼭 1년 만이다. 신승철 선생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던 그날, 아마 단톡방에 있던 100여 명의 조합원 모두는 이 비보를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설마요, 정말인가요, 그럴 리가 따위의 말들을 썼다가 지웠다. 늦은 밤에 허둥지둥 옷을 입고 버스를 탔다. 장례식장에 도착해서 마주친 이들의 눈동자를 보고 나서야 이 사실을 믿을 수 있었다. 그러게, 잊히지 않는 눈동자들이 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지만 모든 것을 털어놓는 그 눈동자와의 만남에 내 안의 무언가가 달라짐을 느꼈다. 나중에서야 내가 볼 수 없는 나의 눈동자에서 무언가를 읽고 공명했다는 말을 들었다. 무언가를 보는 신체 기관으로서의 눈이 보이지 않는 스스로를 보는 방법은 (거울을 포함한) 타인의 눈동자를 통해서 분이라는 아이러니가, 묘하다.
어떤 죽음은 어떤 삶을 그전으로 돌아올 수 없게 한다. 좋고 나쁨을 떠나서 그저 그럴 뿐이다. 그 장례식에 다녀온 후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분노와 열정이 사라지고 우수와 멍 때림, 돌아봄이 늘었다. 대운이 바뀌었다. 그뿐이다. 바뀐 대는 바뀔 만한 이유가 다 있을 뿐이다. 곧이어 떠나 걸은 순례길에서 어느 날은 꿈에서 깨어 눈물이 나고, 어느 날은 괜스레 편지를 적어 그 눈동자들에 부쳤다.
처음에는 슬펐는데 나중에는 좀 웃기다. 장례식장에서 가만 보면 눈물바람과 웃음바다가 함께 있다. 생각하니 신 샘의 발인 날 돌아온 문래동에서 참 많이도 울고 웃었다. 그 정동의 조화가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게 아닐까. 우리 사회가 삼 년 상이 삼일 상이 되어버리는 가운데 애도의 무능과 상실에 젖어든 것 같아 안타까움을 느낄 때가 있다. 그래서 더욱 리추얼, 다채로운 장례의 정동과 계보를 잇고 싶다. 신 샘이 언젠가 나의 장례식을 이야기하며 좋아요 눌렀다는 글을 함께 옮기며 생각해 본다. 나의 장례식은 어떨까. 우리의 추모(축)제에는 다 맥락이 있다.
난 내 장례식이 페스티벌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해요. 날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내 치부나 내 흑역사 들추면서 나 놀리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웃고 떠들다 갔으면 좋겠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스럽게 나를 한번 더 기억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냥 그래야 나도 기분좋게 갈 수 있지 않을까? 너무 슬퍼하면 가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이보람 웹툰 <어쨌거나 청춘> 2막 #244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