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6 경기도 화성시 용소리
1929년 박정순은 서해안 바닷가 근처 평택 포승면에서 태어났다. 아직 일제강점기의 한복판이었다. 누이와 여동생이 여럿이었다. 1940년 십 대 후반의 나이에 경기 화성의 용소리라는 마을에 시집을 왔다. 남편이었던 장지훈은 기와집 장손이었고, 훤칠한 외모에 마음이 여렸다. 혼례를 올린 지 몇 년 만에 나라는 해방이 되었지만, 또 몇 년 만에 전쟁이 났다. 박정순 부부는 피난을 갔다. 다행히 마을은 무사했고 집은 수리가 필요할 뿐 건재했다. 장지훈은 직접 대들보를 이고 집을 고쳤다. 집에 붉은 기와를 올렸다. 뒷마당에는 감나무를 앞산에는 밤나무를 심었다. 살다 보니 자식이 생겼다. ‘현’을 돌림자로 이름을 지어 3남 2녀를 두었다. 장현화, 장현숙, 장현명, 장현자, 장현일. 큰 딸은 어린 나이에 돌아갔고, 막내 장현일은 박정숙이 마흔에 낳은 늦둥이 었다. 산과 전답이 있었던 종갓집의 살림은 부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지훈에게는 부양할 입이 너무나 많았다. 자식도 자식이거니와, 혼기가 찬 동생들을 독립시키고 장가를 보내야 했다. 그리고 장지훈은 간암으로 쉰다섯에 갑자기 돌아갔다. 그의 아버지처럼 일찍 죽었다. 그 이후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당시 큰아들 장현화는 독립을 했고, 작은딸 장현자는 신양식과 혼례를 올렸고, 둘째 아들 장현명은 군대에 있었고, 막내 장현일은 이제 초등학생이었다. 박정순은 슬픔에 잠겨있을 겨를이 없었다. 박정순은 송아지를 한 마리 사 왔다고 한다. 막내 장현일은 매일 등교 후에 풀을 베어왔고, 박정순은 쇠죽을 쑤었다. 벼농사를 짓고 콩을 따고 고추를 기르고 깨를 털고 호박을 기르고 파를 심고 고구마를 캤다. 그렇게 둘째 아들과 막내를 대학에 보냈다. 가세가 기울기를 멈추고 좀 나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 무렵 집안의 대들보인 큰아들 장현화가 죽었다. 초등학생이던 어린 아들 장우석, 장범석과 부인 양현주가 있었다. 억장이 무너졌지만 그래도 살아갔다. 그 뒤로 박정순은 자식들이 말릴 때까지 농사를 지었고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농사를 놓았다. 온 가족이 한평생 쌀과 김치를 돈주고 사는 일이 드물었다. 그사이 장현명은 송윤호와 가정을 꾸렸고, 장현일은 김경애와 가정을 꾸렸다. 그렇게 한 세기가 지나가며 박정순은 여덟 명의 손주들을 두었다. 태어난 순서대로 장우석, 장범석, 신동훈, 신동화, 장규석, 장윤석, 장준환, 장민석이다. 손주들은 할머니를 모두 다정한 우리 할머니로 기억했다. 일부 츤데레였다는 평도 있었다. 박정순은 예순 이후에는 홀로 용소리 시골집을 지켰다. 나이 여든에, 63 빌딩에서 팔순잔치를 했다. 나이 아흔 에는 화성에서 구순잔치를 했다. 박정순이 용소리를 떠난 것은 몸을 잘 못 가누다가 홀로 쓰러진 날 부터였다. 몇 시간 뒤에 발견되어 자식들은 모두 놀랐다. 거리가 있는 곳에 살고 있어서 자식들은 박정순을 요양원에 모셨다. 가뜩이나 시대가 괴팍해 코로나 팬데믹으로 이동과 면회가 어려웠다. 박정순은 집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자식들의 말도 들었다. 요양원에서 벗을 사귀었지만 금세 세상을 떠나, 그 뒤로는 정을 붙이지 못했다. 나이가 들며 몸이 잔뜩 쇠약했고 조금의 치매가 있었고 말귀를 알아듣기 어려워 대화가 어려워졌다. 잔병이 크게 번져 장에 천공이 생겼고, 한 주간 시름시름 앓다가 93세를 일기로 2023년 7월 6일 세상을 떠났다. 하루 내 이어진 장례식에는 사람들과 부조가 끊이지 않았다. 가족 모두가 박정순을 떠나보내며 울었다.
2024.7.6
정성과 평화를 담아,
박정순의 손자 장윤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