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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장윤석 Dec 05. 2024

좋고 나쁨 없이 더할 나위 없음

2024.12.5. 마지막 상담일지

마지막 상담 날이다. 열다섯 번에 걸친 상담이 이렇게 저문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기도 어려웠고 발걸음도 내키지 않았다. 그러다가 조금 늦어버렸고. 


저번 상담에서 이제 상담을 마무리해도 되겠다고,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이야기했었는데, 오늘은 사실 더할 나위 없이 나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겨울이 되면서 조금씩 침잠하기 시작했는데, 그제 있었던 일로 완전히 나락을 찍어 버렸다. 그 일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지만, 그 일을 빼놓고서는 어떤 이야기를 할 수도 없다. 그래, 내가 사는 땅에서 사십몇 년에 광주를 마지막으로 없었어야 할 계엄이 선포됐다. 다행히(?) 나는 1980년이 아니라 2024년에 살고 있어서 무사했다. 하지만 2024년이라고 해서 1980년과는 동떨어진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언제든 비극의 순간으로 굴러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나쁘게 굴러 떨어질 수 있는 것처럼. 언제든 말이다. 


계엄이 선포되기 전에 나는 친구가 감독한 다큐멘터리를 동료들과 함께 보고 있었다. 공장식 수산에서 고통받는 물살이(*물고기 대체어로 표기)에 대한 다큐였는데, 보다 보니 죽임이라는 비극의 곁에 서고자 한 사람들의 심정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다. 죽어가는 물살이 몇 명도 구조할 수 없는 데 이들은 왜 비질을 하러 현장에 발걸음을 옮길까. 어떤 목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가서 곁을 잠시나마 조금이나마 지키는 과정 자체가 목적이었던 것 같다. 


다큐가 끝나고 나오는 길 무력한 걸음을 옮기던 가운데에 계엄이 터졌다. 터졌다는 동사를 붙이는 게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모두에게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일이었을 테니. 내가 정신을 놓고 있는 동안 동료들은 곁을 지키러 국회로 향했다. 장갑차와 헬기와 총과 군인이 그 공간에 있었다. 나는 광역버스를 타고 광화문에서 파주 집으로 가고 있었다. 중간에 내릴 수도 있었겠지만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뉴스를 찾아보면서 조금씩 실감을 차리고 두려움과 만났다. 공표된 계엄령 1호가 가관이었다. ‘처단한다’는 단어를 믿을 수 없었다. 집에 와서 티브이 생중계로 깨진 유리창과 총구를 바라보며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단 한 명이라도 피를 흘린다면, 오늘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는 초조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다행스럽지 않지 않도록, 국회에서 계엄 해제 결의안이 통과되고 군이 ‘퇴각’하고 나서야 누웠다. 그리고 어김없이 아침이 밝았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겪었을 상황이자 감정일 테다. 내게 몇 가지 생각과 마음이 남았다.


어제의 그 순간은 광주의 도청에 계엄군이 밀려오는 것 같은 순간인가. 그리고 나는 도청으로 향하지 못하는 무력한 그날의 한 시민인가. 작으나마 죽을 수 있다는 감각과 만났다. 친구들이 이 소식을 듣자마자 국회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보면서, 버스에서 내리지 못한, 택시라도 잡아타고 향하지 못한 나를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어떤 앎이 찾아왔다. 내가 그동안 해왔던 많은 활동 내지 정치는 이 땅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 사회와 역사를 믿는 마음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 마음이 송두리째 뒤흔들린 것이 분명했다. 어떤 말도 얹을 수 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지금 내가 기억하는 어느 때보다 무기력하다. 치부하자면 형언할 수 없이 상식과 동떨어진 한 인간과 그 곁의 세력이 그 무게를 깨닫지 못한 채 벌인 계엄령이고, 지금의 상식에서 소동극으로 마쳤지만 그 과정에서 보게 된 수많은 장면이 지금도 믿기지가 않는다. 설령 계엄이 선포되더라도 군대가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은 못했다. 하지만 군대가 투입됐다. 총에는 실탄이 지급됐다. 저격수가 있었다. 국회 안으로 진입하려고 했다. 시민에게 총구를 겨눈 이가 있었다. 이 전 과정에서 쓰였던 언어는 그 자체로 비극이었다. 계엄군 역을 맡은 군인이 방아쇠를 누르지 않았던 것에는 어떤 망설임이 있었을 것이라 한다. 이 방아쇠를 당기면 되돌이킬 수 없고, 지금은 방아쇠를 당겨서는 아니 된다는 애매한 망설임. 유리창을 깨부수는 것에는 없었을 망설임이, 사람을 향한 총구에서는 있었다. 그 망설임을 만들기 위해 흘렸을 역사의 핏줄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그리고 그날밤은 우리 사회가 변해간다는 믿음이 망가진 순간이기도 하나, 우리 사회가 어떤 역사와 상흔에 기반해 있는지를 보여준 날이기도 하다.  


소동극이 막을 내린 몇 시간 사이에 수많은 성명서가 나왔고, 분노하고 경악한 시민과 활동가들은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연일 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나는 머리로는 가야지 했는데 마음과 발이 따라가려 하지 않았다. 8년 전의 이 즈음이 생각난다. 정확하게 2016년 12월 8일이었다. 광화문 광장에 100만 명이 넘게 모였다는 그날. 학교 수업이 마치고 기차를 타고 친구들과 동료들과 서울로 올라와 촛불을 들고 거리에서 온갖 한 맺힌 말들을 꺼내고 돌렸다. “이게 나라냐” 나라가 망해간다는 감각과 현실이 왜 나의 몸과 마음을 잔뜩 동하게 했을까. 그리고 왜 나의 몸과 마음은 거의 전적으로 달라져 있는 걸까. 누군가 이미 엔딩을 잘 아는 싫어하는 영화를 다시 봐야 하는 느낌이라고 했다. 당연히 끌어내려야겠지만, 탄핵 같은 것으로 오늘의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겪어버렸으니까. 그리고 우리에게 대안의 선택지도, 경로도, 힘도 0에 수렴할 정도로 너무 미약하고 부족하다는 것을 얕게나마 알고 있으니까. 정말 낡은 것은 끝났는데(끝나야만 하는데) 새로운 것은 오지 않은(올 기미가 너무나 보이지 않는) 것만 같다. 


민주주의는 사회가 진보한다는 믿음 없이 성립할 수 없다. 하지만 진보라는 것이 어떤 착시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래서 우리가 나아간다는 믿음 하에 비극들은 되풀이한다면, 혹은 우리의 존립근거를 좀먹고 파멸로 이끌고 있다면. 적어도 기후, 생태 관련 소식들은 이 인정하기 어려운 서사를 증명하고 있다. 존재하는 생물 종의 절반이 이미 멸종했다던가. 기후위기 대응의 임계점이 이미 넘었을 수도 있는 지경에 있다던가. 이 문명의 끝을 진단할 수 있을 정도로 비극적인 소식이 너무 넘쳐서 눈을 가리고 귀를 막지 않고서는 달리 일상을 살아갈 방도가 없다. 국제정치에 파시즘에 근접한 극우파와 트럼프 같은 정치인이 ‘다시’ 복귀하고, 곳곳에서 양차 세계전쟁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비극의 장면들이 ‘다시’ 재현하고 있는데 진보 뭐시기라는 말은 너무 민망하거나 부끄럽지 않은가. 


섣부른 회의적인 말들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어떤 소중함을 무너뜨리고 싶지는 않다. 혼란스러워하는 내게 미얀마에서 난민으로 떠나온 오마는 쿠데타가 벌어진 날들을 이야기해 준다. 망설임보다 큰 무언가가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던 미얀마에서의 비극을 이야기하며, 한국의 민주주의 기반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귀한 것인지 값진 것인지 부러움을 비친다. 나는 그 말에 대해서 아무것도 답할 수 없다. 헬조선이라는 말을 반복하며 내가 사는 세상과 사회를 일도양단할 수는 없다. 그 점에서 최악도 최선도 없다. 비록 며칠간의 이 기분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에 가깝더라도 말이다. 이 마음들이 복잡하게도 얽히고설키어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게 하지만 말이다. 인간이라는 종은 희망 없이는 살 수 없는 생명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희망의 근거를 발굴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희망을 발굴해야 살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태어나서 죽어가는, 어찌 보면 생명의 삶은 무상해 보이지만, 살아가는 자체에 귀함이 있다. 그냥 좋고 나쁨에 휘둘리지 말고 더할 나위 없는 삶의 순간을 이어가자는 말이다. 옆에 있는 ‘우리’와 함께 가능한 한 정성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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