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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 장윤석 Dec 11. 2024

희망의 생태학

2024.12.11

一 희망의 시간관: 희망의 유무에 얽매이지 않고 


희망이라는 단어에 붙는 동사를 관찰해보자. 희망에 가장 자주 붙는 동사는 ‘있다/없다’인 것 같다. 사람들은 희망의 유무에 그 여부에 줄곧 좌우된다. 그리고 희망은 대개 없는 쪽이 많다. 그래서 희망을 ‘찾다/만들다’와 같이, 없는 희망을 찾아오거나 발명해내려고 애쓰는지도 모른다. 비슷하거나 조금 다르거나, 나는 ‘발굴하다/일구다’는 동사의 맛이 좋아서 즐겨 쓴다. 희망은 있기는 있는데 가리거나 덮여있어 발굴해야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발굴한 희망을 살리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일구어 나가야만 한다는 감각이 인다. 그렇지만 영 희망이 없어 보이는 요즘과 같은 때에는 이 동사들도 영 석연치가 않다. 

사람들은 희망을 갈구한다. 희망-없음에 절망하고 희망-찾기에 애를 쓴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생명 종 자체가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하기 없이 오늘을 살아가기 어려워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희망의 있고 없음에 너무 목을 매는 게 아닐까. 비록 그것이 어떠한 본질이더라도, 희망의 유무에 상관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는걸까. 

희망에 대해 말하기 위해 먼저 시간에 대하여 나누어보자. 희망은 시간과 밀접한 언어다. 미래에 대한 묘사하는 낱말이라 생각되기에 그렇다. 어쩌면 미래의 속성이다. 주로 밝은 쪽을 담당하는 어떤 속성 말이다. 그래서 희망이 작동하고 사고되는 바탕에는 시간에 대한 가정이 있다. 의심하지 않는 시간관이 그 아래 있다. 어제, 오늘, 내일로 이어지는 시간관은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시간의 연속상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직선적 시간관에 기초해있다. 시계가 째깍째깍 흘러가며 초, 분, 시, 일, 주, 월, 년이 흐른다. 당연하게 여겨질 이야기다. 시간의 흐름에 의심을 가져오기란 다소 낯선 일이니까. 다만 시계의 발명과 보편화 이전에 봄-여름-가을-겨울로 이어지는 생태적/순환적 시간관이 우리의 역사에 더 길었다는 것을 지적해두고 싶다. 

문제는 직선적(선형적), 기계적, 정량적 시간관이 ‘내일은 오늘보다 나으리’라는 진보적/성장적 세계관으로 이어진다는 데 있다. 생태의 시간은 순환하는 데 인간의 시간은 진보(혹은 퇴보)한다. 정확하게는 진보하거나 퇴보하는 것으로 구별짓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 그리고 대개는 진보하는 것으로 가정 및 합리화하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 앞서 말했듯이 인간은 희망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으니까. 단순하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내일을 기대할 이가 있는가. 그렇게 사회운동은 점차 나아지고 나아간다는 이 선형적 시간관을 전제한 희망의 논리학을 형성한다. 이것은 경제적 성장주의(발전주의)가 우리의 상상계에 스며드는 방식이기도 하다. ‘어제보다 오늘 더, 오늘보다 내일 더 성장하리라’는 성장주의의 논리학 말이다. 성장주의의 관성과 맞물리면 가장 밑바탕에 자리하고 있는 희망의 논리학은 무한궤도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나는 그 진보의 시간관이 낳은/교란한 마음의 생태에 대해서 말들을 얹어보고 싶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뭔가 나아가고 있다는 착각이 우리의 눈을 가리는 것이 아닐까. 

이 질문의 배경은 당연하게도 험난한 시국이다. 희망의 유무에 집착하는 마음이 쉽사리 손쉬운 비관과 손쉬운 낙관(혹은 손쉬운 의존, 천착, 질타, 적대 등)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광장에서의 일들을 보면서 어떤 희망관(혹은 세계관, 혹은 시간관)과 불화한다/하고 있다. 오래전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왜 8년 전의 촛불이 기대었던 희망의 논리(학)에 오늘이 마주친 비극의 씨앗이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걸까. 뭔가 나아지라는 믿음, 그리고 그 나아가리라는 기대, 손쉬운 희망에 열광하여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안심했던 안일함에 오늘의 기원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을 변주하면 이렇다. 누가 무엇이 괴물을 만들었는가 이기도 하고, 우리는 왜 괴물과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이기도 하며, (큰 하나로) 우리는 왜 괴물이 되어왔는가 이기도 하다. (그냥 우리의 희망관이 생태적이지 않고 근대적 경향에 얽매여 있다 싶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라는 이름의 아스팔트로 뒤덮여 있다’는 문장을 들은 적이 있다. 오랫동안 마음에 남은 말이다. ‘나아가고 있는 역사’라는 시간관과 그에 기초한 희망관이 우리를 지옥으로 인도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있다. 



二 기대 말고 희망하기 


세계가 거대한 가속에 휘말린 20세기의 중반 이반 일리치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는 근대성에 내재한 파멸적 속성의 모순성이 우리 모두를 공존 가능하게 했던 생태와 문화로부터 ‘뿌리뽑하게’ 벗어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 지적은 오늘에 와 점점 적확해지고 있다. 사회과학자로서의 이반 일리치는 멸종과 파국을 예언한 예언자에 가깝다. 그가 근대를 추적한 이야기를 읽다보면 답답함이 마음을 감싼다. 최선이 타락해서 최악이 되고, 선의로 깔린 아스팔트를 따라가다 보면 지옥이 나온다. 예측된 파멸의 시대에 사는 입장에서 무언가를 희망하기는 어렵기만 하다. 

일리치의 이야기 중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 있었다. “미래는 삶을 잡아먹는 우상입니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오직 희망만이 있을 뿐입니다.” 비극을 증명한 사람이 희망에 대해 말하는 태도가 왜 이렇게 낯설었는지. 미래는 없고, 그리고 희망밖에 없다니. 희망은 근거가 있어서 희망하는 게 아니라는(혹은 근거를 찾는 시도가 무의미할) 이 문장을 보면서 내가 언젠가 이 말을 이해할 날이 올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이제야 실마리를 잡은지도 모른다. 

“일리치는 ‘기대’와 ‘희망’을 구분해서 사용했는데, 제도에 의해 계획되고 통제된 결과를 따르는 것을 ‘기대’라고 불렀고, 우리의 힘과 능력을 신뢰하는 것을 ‘희망’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그에게 희망은 인과론의 계단과는 다른 것이다. 인과론의 논리는 마치 좌표평면에 있는 것처럼 동작하는 논리다. 계단을 한 걸음 두 걸음 옮기듯이 말이다. 인과론적 언어는 숫자적 치환 가능성을 가지고 직조된다. 이것은 우리에게 보편성의 언어로 작동할 수 있는 기저를 마련했다. 그러나, 희망에 관한 언어는 그 질적 속성을 다르게 가지고 있다. 희망에 대한 언어는 계단이 아니라 엘리베이터 같은 것이다, 혹은 계절 같은 것이다. 그 자체가 과학적 물리법칙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그 법칙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계단으로 치면 열 계단, 백 계단을 한꺼번에 뛰어넘는 것이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 수많은 층들을 가로지르는(이 경우 세로지르는) 것이다. 희망이 그렇게 세로지를 수 있을 때, 그 세로지르는 힘 자체가 신체 변용과 사회적 열망을 직조하는 어떤 잠재성이자 가능성으로 작동한다. 여기에 기대를 뛰어넘는 희망이 있다. 그리하여 일리치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근대적으로 희망하기가 아닌, 근대가 작동하기 이전에 주로 있어왔던 – 그리고 우리가 잃어버린 가장 귀한 것인 – 생태적으로 희망하기다. 전쟁이 터져도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희망과 같이. 그렇게 희망의 작동이 근대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복원되거나 형성될 수 있을 때, 우리는 머리로 생각했을 때 도무지 희망 한 점 찾을 수 없는 이 세계를 뛰어넘고 넘어가고 포월할 수 잇는 힘과 가능성을 얻게 된다. 

즉, 이분법에 잠식된 논리학의 재배치가 희망의 영역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른바 희망의 생태학이다. ‘희망이 있는가 없는가’하는 양자택일 일도양단의 질문을 넘어가야 한다. 넘어가는 과정의 하나로 희망을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가, 희망은 어떻게 일구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변주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희망의 과정에 주목하자는 말이다. 희망하는 마음, 절망하는 마음, 절망에서 희망으로 진폭하는 마음, 희망을 발굴하려는 마음, 희망에 회의하는 마음 등 희망과 관련한 수많은 마음들의 복합적 생태계를 응시하고 관조하고 관찰하고 내재화하면 희망이 더 다채로워지지 않을까. 희망의 생태학을 세 가지 생태의 배치에 따라 살펴본다면, 희망을 만들기 위한 변혁적 실천론으로서의 희망 일구기, 희망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희망 길찾기, 희망을 감각하고 마음을 돌보며 가능성을 스스로 생산하는 희망 품기로 말해 볼 수도 있겠다. 희망의 생태학이 근대적 이분법 감옥의 틀을 벗어나 최소 세 개 이상의 논리로 작동할 때, 수많은 촛불의 집합으로서 횃불이 아니라, 수많은 응원봉의 다양성의 다발 연대로서의 희망들로서 기능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희망의 동시 배치 및 연대 등 희망의 더불어 숲이 작동하는 연결-가능성을 찾는 것이 우리에게 당면한 과제라는 감이 있다. 희망은 목적 보다 과정, 근거 보다 서사, 수단 보다 ‘(있는 그대로의)그 자체’이다. 


“마음에는 넓이의 마음, 깊이의 마음, 높이의 마음이 있다. 넓이의 마음은 앞서 얘기한 사물, 생명, 자연, 기계에서 유래된 마음이다. 우리는 마음에 대해서 타자보다 더 타자와 같이 접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음의 심연의 깊이에 놀랄 때도 있다. 기후위기는 자신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높이의 마음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세계사적이고 지구적인 영역으로 더욱 끌어올려야 한다. 작은 행동에서도 그것의 의미와 가치를 크게 보는 동시에 겸손해져야 한다. 우리는 탈성장, 더불어 가난의 시대를 맞아 돈의 가치가 아닌 인생과 실존의 가치를 높여야 한다. 그랬을 때 우리는 자신을 비하하거나 궁색하게 느끼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높이의 마음은 자존감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우리는 자존의 힘을 찾기 위해서 더욱 비물질적인 윤리와 미학에 호소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주의 먼지처럼 보이지 않은 사랑을 전달하기 위한 고귀하고 영성적인 가치로 나아가야 한다. 탈성장 전환사회는 우리의 가난한 마음, 연대의 마음, 연결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웃과 친구와 가족과 더불어 가난해질 때, 우리는 온갖 가식과 허위를 벗고 마음의 깊이와 높이, 넓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이 기후위기 상황에 입체적이고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그 속에서 희망의 이야기를 다시 나누어 볼 수 있는 여지도 생겨날 것이다. 희망은 모든 것이 산산이 흩어져 버린 판도라의 상자 속에서 작은 목소리지만 여전히 울림이 되는 마음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三 희망 찾아 삼만리 


슬픈 이야기를 잔뜩 한 채 희망이 무엇일까 어색한 공기가 감도는 어느 회의장을 생각해보자. 정적이 감도는 그 회의장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하면 좋을까 막막해하다가 저마다의 집으로 조용히 떠나간다. 그렇게 비관에 익숙해져간다. 익숙한 장면이다. 우리에게는 다른 장면이 필요하다. 희망에 있어서 상상의 빈곤을 넘어갈 방안을 창발하고 싶다. 

최근에 들었던 이야기 중에 가장 희망적이었던 이야기는 어느 농부들의 이야기였다. “어떻게 첫 걸음을 내딛을까라니, 어려운 주제입니다, 걍 우리 손을 잡고 같이 내 딛읍시다” 첫 걸음을 어떻게 내딛어야 하지 하는 상황에 그냥 손을 잡고 내딛자는 말이 어찌나 자연스럽게 어울리는지 모르겠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이는 희망 찾아 삼매경인 내게 문장을 하나 남겼다. “미래는 단순하고, 우리는 하늘 아래에서 계속 살아야 하며, 삶은 축하해야 하는 것”

나에게 이 장면은 이렇게 다가온다. “희망이 있을 거라고 희망하는 것도 희망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한강)”, 처음에 시작했던 희망에 붙는 동사로 돌아가보자. 희망을 탐구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희망의 근거가 된다. 이것은 내 안에 문제를 풀 실마리가 있다는 말이다. 파국 앞에 직면한 그 과정에서 내 안에 있는 힘을 복원할 수 있다는 믿음에 있다. 왜냐하면 희망이라는 정태적 명사가 실은 동태적 동사이기도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희망을 나와 동떨어진 먼 곳에서 찾는 시도의 무상함을 동시에 이른다.   

8년 전 촛불시위에 철학자 김상봉은 “이게 나라냐”는 물음에 “네가 나라다”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절망적인 물음이 희망으로 이어진다. 이 문답에서 국가와 나라를 희망으로 바꾸어 읽어보려고 한다. “희망은 기성품으로 주어지는 물건이 아니다. 그것은 3인칭의 대상이 아니라 1인칭의 주체이다. 그러므로 이것도 저것도 희망이 아니고, 바로 네가 희망이다. 네 속에 희망이 있다. 그러니 이제 희망이 무엇이냐고 묻지 말고, 내가 누구인지, 우리가 누구인지 물어라! 오직 그렇게 대상으로서의 희망에서 주체로서의 희망(자기)에게 물음의 방향을 돌릴 때, 비로소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통하는 길이 열릴 것이다.”


보다 자세하게는 ‘지금, 여기, 가까이’의 방법론이 나에게 와닿는다. 먼 곳에 기대를 보내지 않고, 과거에 근거해 희망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숨어있거나 깃들어 있는 희망의 모습을 찾는 것이다. 아무 팍팍하고 막막해도 할 수 있는 것은 옆을 피고 돌보고 살아가는 길밖에 없다. 희망은 먼 곳에 있지 않다. 그리고 내 옆에 있다. 항상 언제나. 이것은 비과학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행위자의 주체성에서 희망을 찾지 않으면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과거는 미래를 담보하지 않는다. 방향을 가리킬 뿐. 미래의 기댓값을 산출할 수는 있어도 그것은 인과성을 증명하는 방식과는 궤를 달리한다. 

기후위기를 설명하는 모든 데이터는 암울한 미래를 가리킨다. 멸종을 확약받는 이 숫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걸어온 길이 얼마나 추한지 – 부정의한지 – 살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해진 경로는 아니다. 높은 가능성이 정해진 경로를 말해주는 것도 같지만,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이 하는 말은 단순하게도, 희마잉 동떨어져 잇는 것이 아니라, 나와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 말해주는 것에 기댈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인터스텔라에서 새로운 세상의 햐답은 머피에게 있다. 사랑의 힘으로 중력을 통해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가능성을 영화는 말해준다. 사랑은 늘 사람을 현재로 데리고 온다. 그리고 그 데려오는 길에 우리가 무언가를 걸어볼 여지가 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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