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을 보고 나서 (과장 조금 보태) 수십 시간이 넘게 고민했지만, 여전히 <달달 콘서트>를 표현할 적절한 주제는커녕 문장 하나조차 찾지 못했다. 물론 프리뷰처럼 얕은 지식과 허울뿐인 문장들로 어찌어찌 글을 쓸 수는 있겠지만, 어쩐지 필자의 오만한 자존심은 그런 식으로 글을 마무리 짓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감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별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정말 솔직하게 이 공연의 주제를 찾을 수 없었다는 부끄럽고 한심한 말로 글의 포문을 열어보려 한다.
나의 지나친 솔직함이 공연을 볼 기회를 준 아트인사이트는 물론이거니와 멋진 공연을 보여준 뮤르에게도 예의가 아니라는 것은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어차피 진심이 아닌 글은 결국 들통이 나기 마련이고, 거짓말을 잘하지 못할 거라면 그냥 솔직한 게 낫다고 판단했다. 이제 구구절절한 변명은 제쳐두고 본론으로 돌아와서, 내가 <달달콘서트>의 주제를 선정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정말로 이 공연엔 주제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나의 부족한 안목과 통찰력 부족, 글솜씨로부터 기인하는 한심한 변명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지나친 기우일지도 모르겠지만, 글의 서두부터 '할 말이 없다'는 몰상식한 얘기를 꺼내는 것이 이 공연의 수준을 비난하거나 문제점을 꼬집기 위함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둔다. 사실은 공연을 보기 전부터 <달달콘서트>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 것인가로 고민이 많았다. 이미 프리뷰에서 재즈와 국악에 관한 한 줌의 지식이 밑천을 드러냈고,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는 환상적이다, 놀랍다, 멋지다 등의 형용사를 남발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 문제인 것은, 공연을 보고 나서는 완전히 갈피를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달달콘서트>가 국악과 재즈라는 확실한 주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자못 분명해 보인다. 첫 곡부터 화려하게 쏘아 올리는 생황의 음색은 분명 재즈의 탈을 쓰고 있지만, 색소폰과는 확연히 다른 매력이 있고, 대피리의 탁하고 거친 소리는 어딘가 국악의 내음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 곡은 모로 보나 국악기로 연주한 '재즈'다. 솔직히 음악에 둔감한 사람(예를 들면 나 같은 사람)이 들으면 악기의 차이마저도 크게 눈치채지 못할 것 같다. 여기에 카혼과 피아노까지 곁들이니, 갑자기 레드 와인 한 잔에 치즈가 간절해진다.
이렇게 편하게 재즈 음악을 즐기면 되는 건가 싶은 순간, 분위기는 극적으로 반전된다. 공연장에는 흡사 UFO가 떠오르는 악기가 등장하는데 관객들은 난생처음 보는 악기에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난생처음 보는 악기에선, 당연하게도 난생처음 듣는 소리가 난다. 악기는 거의 솥뚜껑만 한 검고 둥근 반원을 세 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는 모양으로, 알록달록한 실로폰을 몽땅 녹여서 하나의 악기로 만든 것 같다. 런치패드처럼 이곳저곳을 누르면 역시 어딘가 맛이 간 실로폰 같은 소리가 나는데 그 모습이 '수리수리 마수리' 동작을 연마하는 마법사와 비슷하다. 누군가 맑고 깨끗한 실로폰에 흑마법을 걸어 놓은 것만 같다.
알고 보니 이 기묘한 악기의 이름은 핸드팬(Handpan)으로 스위스 악기, 행(Hang)에서 파생된 악기들을 총칭하는 단어다. 핸드팬이라는 이름은 2007년 한 스틸팬(Steelpan) 제작소에서 처음 사용된 이래로 지금까지 널리 통용되고 있지만, 명칭에 대한 논란은 현재 진행형인데, 핸드팬의 모체인 행의 제작자가 핸드팬이라는 이름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의 제작자와는 별개로 핸드팬이라는 이름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모든 좋은 악기들이 그렇듯, 핸드팬은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지 않는다(생산하지 '않는' 것인지 생산'할 수 없는' 것인지는 여전히 필자의 물음으로 남아있다). 달리 말해, 세계 각지의 핸드팬 제작소에서 저마다의 재료와 제작 방식으로 모양 및 소리가 상이한 핸드팬을 제작하고 있다는 뜻이다. 당연히, 이 모든 핸드팬들을 '핸드팬'이라는 하나의 범주에 묶을 수 있냐는 문제를 놓고 핸드팬 포럼에서는 여전히 활발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달달콘서트>에서 연주한 핸드팬이 정확히 어디서 제작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듣지 못했지만, 뮤르의 핸드팬 공연은 확실히, 국악과 재즈를 벗어난 경험이었다.
관객들이 이 비싸고 독특하고 흔히 볼 수 없는 악기의 매력에 완전히 빠졌을 무렵, 공연장에는 이제 거대한 대북이 들어선다. 키보다 훨씬 큰 대북을 마주 선 송니은 연주자의 치마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은 왜일까. 흡사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 떠오르는 결연한 자세는 기대감을 고조시킨다. 한 번도 타악기를 연주해 본 적은 없지만, 타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보기보다 '아주' 어렵다는 얘기는 종종 들어왔다. 타고난 박자 감각이 필요해서기도 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선율 없이 둔탁한 음 2-3개 만을 가지고 공연장을 가득 메워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한다.
물론, 아주 당연하게도 송니은 연주자의 대북 연주는 공연장을 넘어 관객의 마음마저 메운다. 빠른 속도로 신들린 듯 울리는 북의 쿵쿵거림은 선율이 주는 음악의 매력과는 또 다른 황홀함이다. 타악기에 음계는 없지만, 대북 가장자리의 엷은 떨림과 한가운데의 매서운 기상은 확실히 다르다. 대북의 그 어떤 곳도 똑같은 소리를 내는 법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북채와 대북이 만나 내는 소리를 화음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정말로 눈을 떼기 어려운 3분간의 두드림은 종국에는 폭발하듯이 막을 내린다.
다시 평범한 재즈 연주로 돌아가나 싶던 <달달콘서트>는 허새롬 단장의 구수한 목소리로 또다시 극적 전환을 맞는다. 생황으로 시작해 핸드팬과 대북으로 이어지는 공연에 만족할 법도 한데, 뮤르의 욕심은 끝이 없다. 트로트와 재즈, 민요까지. 양다리도 아니고 삼다리(?)를 걸친 뮤르의 신고산 타령은 산업 디자이너 레이먼드 로이가 제창한 MAYA(Most Advanced Yet Acceptable) 법칙의 전형이다. 어딘가 들어본 듯 익숙하지만 <달달콘서트>를 제외한 다른 그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노래. 신고산 타령은 '뮤르'라는 글자를 관객들에게 가장 멋지고 프로페셔널한 방식으로 각인시킨다.
재즈, 핸드팬, 트로트, 민요, 국악까지.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진 <달달콘서트>를 재즈와 국악이라는 우물 안에 가두기엔 그 지평선이 너무 넓다. 그러니 <달달콘서트>를 표현할 마땅한 주제를 찾을 수 없었다는 필자의 부족함을 용서해주길. 이미 BTS가 전 세계의 새로운 아이콘이 된 지금, 국악은 이미 사전의 의미를 넘어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 국악의 대척점에서 뮤르는 지금도, 열심히 국악의 의미를 확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