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도의 변
기술은 발전해야 할까?
인간은 암을 이겨내고 100세라는 수명 장벽을 뚫어야 할까? 그럴수있는지를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더 빨라지고 더 효율적으로 자산을 불리기 위해 뇌에 칩을 심어서라도
그래서 인간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영역까지 우리가 가야하는걸까?
인문학도로서 인문학이 뭔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이고, 간단히 말하자면 ‘그래서 인간이 다른 동물과 무엇이 다른가’에 대한 학문이다. 학자에 따라서 인간에 애정과 긍정적 비전을 제시할수도 있고 냉소적이고 종말론적인 시각을 견지할 수도 있겠으나 이들의 공통점은 ‘인간에 대한 집요한 관심’이다.
아날로그적 인간인 나는 기술이 불편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떤 기술 자체에 선하고 악한 특성이 없다는 것은 알지만 현실에 적용했을때, 어떤 기술이 전쟁에 사용되느냐 아니냐는 활용자인 인간이 정하는 것이고 기술 발명자를 포함해서 누구도 이를 제지할 수 없다. 자율주행, 모든 전자제품의 무선충전, 심하게는 전자렌지의 원리까지 전쟁에서 상대편을 공격하는데 활용될 수 있다. 사회에서 법적 책임의 문제와 윤리적 이슈로 인해 자율주행은 기술은 완성단계이나 도입이 요원하다.
장 보드리야르는 말했다. ‘주체는 결핍이요, 욕망은 환유다’
인간은 언제나 결핍에 더 눈길을 주고 그것을 채우고 싶어하는 존재다.
더 나아가 내가 필요한지도 몰랐던 것이 이제부터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욕망하게 되는 존재다. 자본주의는 이에 철저히 복속한다.
아이폰으로 대표되는 스마트폰이 그렇다.
우리는 스마트폰없이 살수있었다. 약속시간과 장소를 정확히 정하고 어떻게든 제시간에 도착해서 상대를 찾았다. 만약 무슨일이 생기면 공중전화로 가거나 하염없이 기다렸다. 당시에는 바람맞는일, 1시간을 기다리는 일이 그렇게 천지개벽할 일은 아니었다.
스마트폰은 우리의 족쇄가 됐다.
우리의 삶은 편해진만큼, 1분 1초 약속시간으로 가는 모든 경로를 보고하고 과정을 업데이트해서 공유하고 예고없이 늦는것은 상식이 아닌 세상이 됐다.
스마트폰이 우리를 불행하게 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현재 우리가 가진 기술들이 충분하고 그나마도 제대로 선하게 활용하고 있지 않게 때문에, 가지고 있는 것들을 어떻게 활용할지 논의하는 것이 새 기술 개발보다 선행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머리에 칩을 심어서 생각만으로 작성한 트윗이 얼마전 처음 게시됐다.
나의 뇌 속 정보를 모두 빼서 어떤 장치나 소프트웨어에 클라우딩한다면
나는 불멸의 존재가 되는것일까? 그것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