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가족사(史)에 숨어 있는 한가지 황당한 이야기가 있다. 언 듯 들으면 누구라도 믿지 못할 말이다. 그러나 사실이다. 아버지의 가족사를 보면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
아버지는 네명의 고모할머니 중에 첫째, 둘째, 넷째 고모할머니는 얼굴을 알고 있으며, 그분들과 여러 가지 인연의 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세째 고모할머니의 얼굴은 전혀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 아니 본적도 없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최근에 알았다. 뜻하지 않게도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계기는 나와의 인터뷰 자리였다.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어머니였다. 아버지는 당신의 고모(나에게는 고모 할머니들) 세분의 이야기를 나에게 알려주셨다. 이 때 가만히 듣고 있던 어머니가 말을 했다.
”당신, 고모 한분이 더 있었는데, 그걸 몰라요.“
아버지가 순간 어머니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셋째 고모가 있었어요.“
아버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때 어머니는 ”몰랐어요.“하며, 그 사실을 확인을 하듯 재차 물었다. 이 순간 아버지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소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어머니에게 물었다.
”그게 말이되?”
그러자 어머니는 차분하게 대답을 했다.
“어머니(나의 할머니)하고, 둘째 고모(나에게는 둘째 고모할머니)의 딸(아버지의 고종사촌 누나), 누구더라? … 두 분이 이야기를 할 때, 이 사실을 들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중국인가? 만주인가?로 갔다고 하던데…”
어머니는 셋째 고모할머니에 대해 그 이상 알고 있는 것은 없었다. 당시 한반도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중국, 특히 만주로 많이 이주했던 것을 감안하면, 셋째 고모할머니가 중국 혹은 만주로 떠났다는 것은 새삼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황당한 것은 아버지가 80살이 될 때까지 셋째 고모가 있었고, 그분이 중국 또는 만주로 이주를 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뒤에 이야기 하겠지만, 아버지의 나이 11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또 14살이 되었을 때 가족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게다가 아버지와 할머니 사이에도 서로 친밀함을 나눌 시간도, 정서적 공감대도 부족했다. 이런 이유로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윗대인 한만복 할아버지와 김숙 할머니가 어떤 사람들이었고,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있는 것이 사실상 없다.
셋째 고모할머니는 아버지가 태어나기 전에 가족들 곁을 떠난 듯하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버지를 낳은 것은 할아버지의 나이 46살 때이다. 이 때라면 셋째 고모할머니는 이미 시집을 갔을 것이고, 나아가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먼 중국 혹은 만주땅으로 이주를 했을 것이다.
가족 곁을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이야 우리나라에서 중국이나 만주로 가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일제시대 때만 해도 전라도에서 중국 혹은 만주로 간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당시 전라도 임실 사람 중에 서울에 가본 사람도 몇 명 안 되었을 것이다. 이런 때에 같은 나라도 아닌 다른 나라로 간다고 결정을 했으니, 셋째 고모할머니가 자신의 뜻을 이야기 했을 때, 가족과 주위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여기서 살지, 꼭 중국(만주)로 가야하니?” 이렇게 이야기하는 분도 있었을 테고, 반대로 “그래 거기 가서 꼭 잘살아야 한다.”라고 이야기 하는 분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 때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반대를 하셨을까? 찬성을 하셨을까?
자발적으로 결정했을까? 그 반대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주체적인 생각과 타의에 의한 것 사이 어느 지점에 있었을까?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셋째 고모할머니는 자신만의 어떤 용기와 결단,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결정을 했든 그 결정 과정은 쉽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아버지의 나이가 80살임을 고려할 때, 중국 또는 만주로 간 고모님은 사실상 돌아가셨을 것이다. 제2차 대전의 종전과 동시에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끝나고, 1945년 해방이 된 후,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할머니들은 모두 가리점, 필봉 등 임실에 살았다. 큰 고모할머니는 그곳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살았고, 몇몇 손자, 손녀들은 아직도 임실에 살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중국 혹은 만주로 간 고모님의 소식이 없는 것은 그 고모님이 1945년 해방 후에 우리나라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알다시피 우리나라와 중국은 1945년 8.15 해방 후부터 1992년 8월 24일 수교를 체결할 때까지 47년간 전혀 교류가 없었다. 만주로 간 고모님의 태어난 연도를 고려해 볼 때, 그분이 1992년 우리나라와 중국이 수교를 체결했을 때까지 살아계셨을 가능성은 제로 까지는 아니라도 매우 낮았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생각해보니, 슬프다. 중국 혹은 만주로 간 셋째 고모할머니는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언니와 동생들 곁을 떠나 먼 타향으로 간 후, 몇 십 년 동안 가족들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일제시대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대부분 가난하게 살았다. 이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삶에서 중요했던 것은 하루 세끼를 해결하고, 살아남는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모든 힘을 쏟다보니, 가족과의 교류, 친밀함 유지라는 최소한의 가치까지도 잊어버리고 살았을 것이다. 바꿔 말해 가족 중에 누군가와 헤어지게 되었을 때,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시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뒤편에서 이야기 하겠지만 아버지의 삶도 그렇고, 셋째 고모할머니는 물론 할아버지와 할머니, 다른 고모할머니들의 삶도 그랬던 것 같다. 이 이야기를 한 어머니는 “참 힘든 세월을 살았던 거지!”하며, 슬픔, 연민을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표정은 담담했다. 잠깐 상상해 본다. 내가 “아버지 담담하시네요.”라고 물었다면,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을 했을 것 같다.
“뭔 말을 하겠냐!”
아버지의 표정은 왜 담담했을까? 3가지 생각이 든다. 우선은 셋째 고모할머니의 이야기를 갑자기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슬픈 이야기라도 갑자기 들었을 때, 순간 감정이입은 누구나 쉽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짐작이 되는 것은 아버지가 어린 시절 셋째 고모할머니와 교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도 서로 나눈 정이 없으면, 애정도 반감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지나온 삶이 반영되지 않았을까? 후술 하겠지만 아버지의 삶을 살펴보면 가족과의 물질적인 교류는 물론 정서적인 교류가 사실상 많지 않았다. 아니 매우 빈약하거나 일반적인 사람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런 점들로 아버지는 셋째 고모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담담한 표정을 짖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