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도 어머니도 나도 눈물을 흘리다
전기를 쓰기 위한 인터뷰를 하면서 아버지는 몇 번이나 눈물을 흘리려 했고, 실제로 몇 번 눈물을 흘렸다. 때론 눈물을 참느라 몇 번이나 말을 잊지 못했다. 평소 무뚝뚝하고, 자신의 감정을 살갑게 표현하지 못하고, 짧은 말로 거칠게 표현하시던 아버지가 눈물을 흘린 것이다. 이 순간 나도 눈물이 나왔다. 그러나 나는 눈물을 밖으로 쏟아내지는 않았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싫어서 애써 눈을 찡그리거나 고개를 살짝 돌렸다. 또 휴지로 땀을 닦는 척하면서 살짝,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기도 했다.
할아버지(아버지의 아버지)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는 상황은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돌림병으로 돌아가셨다.
나도 몇 번 아버지처럼 눈물을 흘렸다. 아니 쏟아냈다. 나는 나와 아버지 사이에서 있었던 일, 나와 어머니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한번은 내가 눈물을 흘리자 어머니도 눈물을 흠치며, 이렇게 말했다.
“뭘 이런 것을 하자고 해서…”
인터뷰 내내 함께 했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정확한 대답을 하지 못하거나, 온전한 기억을 하지 못할 때, 대신 대답을 하거나 확인해 주었다. 당연히 아버지와 어머니는 많은 곳에서 과거의 기억을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올해로 54년, 아버지와 어머니는 흔한 말로 반백년 이상을 함께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든 사실에 대해서 바라보는 시각이 100% 동일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자신의 아버지(아버지의 장인이며, 나의 외할아버지)를 비롯해 아버지와 핏줄적으로 관계가 있는 아니면 어머니 자신과 핏줄적으로 관계가 있는 남성들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어머니가 여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 입장에 대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말하지 않아도 아버지는 80살까지 살면서 억울한 일, 황당한 일, 기쁜 일, 슬픈 일 등 크고 작은 일을 겪었을 것이다. 어떤 일은 시대의 흐름을 바꾸는 거대한 장강의 물결 때문에 생겨난 일이고, 또 어떤 일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생겨난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시대의 흐름의 바꾸는 거대한 장강의 물결과 개인적인 이유가 중복이 되어 생겨난 일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일을 겪을 때마다 아버지는 어떤 식으로든 대응을 하고, 또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을 것이다. 어떤 것은 삭히고, 어떤 것은 현명함과 지혜로, 또 어떤 것은 뚝심과 용기, 그리고 인내심으로 버텨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는 누가보아도 멋진 무용담을 만들어 내기도 했고, 반대로 말하고 싶지 않은, 아니 말 못할 창피함도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을 쓰면서 2가지 생각을 했다. 첫째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다. 내가 이 책을 쓰기로 한 1차적인 이유이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무학력이 부끄러웠다. 한 때는 아버지의 학력 조사 난에 중졸이라 적기도 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초등학교(초등학교) 5학년 어느날, 수업 시간 중에 부모임에 대한 학력조사가 있었다. 담임 선생님이 전체 학생들에게 물었다.
“아버님이 무학력 이신 분?”
나는 손을 들었다. 나 외에 또 한명이 손을 들었다. 그 때였다. 동급생 중에 누군가가 말했다.
“요즘에도 무학력이 있어.”
그 순간 반 전체가 웃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반의 친구, 거의 모두가 “깔깔깔”거리며, 웃었다. 웃음거리가 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순간 한 마리 상처받은 사슴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아버지의 무학력은 나의 콤플렉스가 되고 말았다. 이날의 창피함은 한동안 아버지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하고, 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왜곡시키는 출발점이 되고 말았다.
“요즘에도 무학력이 있어.”라고 말했던 친구는 어린 나이라, 일부러 나쁜 마음으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추측컨데 그의 부모님 혹은 그 친구와 관계를 맺고 있던 어떤 어른이 했던 말을 학교에서 똑같이 말했을 것이다.
또 어느 때인가 친구들 앞에 나타난 아버지가 부끄러웠다. 아버지와 걷는 것이 창피해서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냥 고개 숙이고 뛰따라 걷기만 했다. 누구냐고 물어보는 친구에게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실 창피할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말이다. 아버지는 성실한 사람이었고, 주위 사람들하고도 잘 지내는 분이었다. 또 인내심이 강하고, 때론 결단력으로 힘든 상황을 돌파하는 사람이었다.
난생 처음, 아버지를 업어 드리다
참 멀리 돌아왔다. 20대 중반이 되면서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고, 20대 후반이 되면서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많이 배운 사람들 가운데, 황당하거나 웃기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은 더 생겨났다. 나는 대학시절과 사회 초년생 시절,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 부당하거나, 인격적으로 수준이 낮거나, 괜한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을 보면, 가끔 혼자 말로, 아니면 주위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많이 배우신 분이 하는 짓 하고는”
이렇게 말하면서 못배웠지만 성실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가 있었던 아버지를 생각했다. 40대가 되면서 아버지를 이해하는 폭이 더 넓어졌다. 어린 시절,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또 20대 시절, 아버지와 나 사이에 있었던 부정적인 일들 보다, 즐거웠던 일들이 더 많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버지에 대해 완벽하게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자서전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자서전은 존경하는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헌사이다. 몇 년 전 나는 난생 처음 아버지를 업어 드렸다. 그 순간 나는 쑥스럽고, 아버지는 어색해했다. 또 나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려 했다. 인터뷰 할 때 그랬던 것처럼 눈물을 참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짧은 순간 눈을 찡그리고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기분이 좋았고, 아버지도 얼굴에 미소를 띄운 채 즐거워 하셨다. 옆에 있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 좋겠수, 아들이 당신을 존경한다니!!!”
두 번째는 아버지를 떠나 한 사람에 대한 기록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데, 큰 공헌을 한 사람의 기록도 필요하지만, 역사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과정에서 때론 짓밟히기도 하고, 때론 윤활유가 되기도 하고, 또 때론 아우성을 쳤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기록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런 거창한 이유를 떠나서 나는 앞에서 말했다시피 아버지를 존경한다. 존경은 사랑이기도 하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버지는 내가 사랑하는, 그리고 존경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싶어졌다.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쓰면서 일단 사실에 충실해지려고 노력했다. 흔히 자서전류의 글을 쓰다보면, 많은 경우 그 글은 부정보다는 긍정, 찌질함과 허접함 보다는 무용담 등을 중심으로 쓰여지곤 한다. 그러다보면 대상 인물의 총체적인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아버지의 개인사적인 사실은 물론 아버지의 심리 등을 기록해 한 인간으로서 나의 아버지, 한일순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묘사하고, 서술하고자 노력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인터뷰를 하는 시간은 나에게 적지 않은 의미가 있었다. 아마 아버지와 내가 지난 50여 년간 했던 이야기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부자간에 주고받았는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버지의 속마음 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나는 아버지와 더 친밀하게 되었다.
또 나는 아버지와 아버지가 살던 시대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아픔 가운데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구나!”
“아버지가 살았던 시대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가 담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꽤나 많구나!”
예를 들어 아버지가 24살 무렵 까지 호적도 없이 살았다는 사실을 이번에 아버지의 전기를 쓰면서 알게 되었다. 또 아버지가 어떻게 먹고사는 일을 해결 했는지, 결단의 순간 어떤 고민을 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인터뷰를 하는 시간은 아버지에게도 큰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스스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시지 않았을까?
<다음번 차례>
1장 아버지의 집안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