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후식일담, 크루아상
페이스트리의 일종. 굽기에 따라서 황금색 혹은 진한 갈색을 띤다. 초승달 모양이며 돌돌 말린 형태. 겉껍질은 바삭하고 잘 부서지며 속은 촉촉하다. 안에 초콜릿이나 크림 등을 넣은 변형태도 있지만 원래의 크루아상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베어물면 바사삭, 하는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버터 풍미가 올라온다. 적당히 진한 아메리카노와 함께하면 훌륭한 조합.
그러나 나는 원래 크루아상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눅눅하고 느끼하고, 게다가 달지도 않고. 또 껍질이 자꾸 부서져 먹고 나면 가루가 장난 아니다. 이 밋밋하고 성가신 빵을 왜 먹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차라리 식빵이면 뭐라도 발라먹을 수 있지, 크루아상은 그 자체가 버터를 듬뿍 머금은 무거운 빵이라 뭔가를 발라먹기도 애매하다. 그래서 꽤 오랜 시간동안 내게 크루아상은 빵집의 들러리에 불과했다. 빵집에 없으면 좀 허전하고, 갖다 놓으면 빵집 분위기 내는데 한 몫 하긴 하는데, 정작 사고 싶지는 않은 그런 빵.
그리고 최근에 와서야, 그 이유는 크루아상이 맛없어서가 아니라 여태까지 맛없는 크루아상만 먹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맛있는 크루아상은 때깔부터 다르다. 일단 겉면이 단단하고 바삭해야 한다. 흐물흐물하거나 만졌을 때 푹신하게 눌러지는 겉면이라면 그건 크루아상의 탈을 쓴 반죽 덩이일 뿐이다. 또한 측면에서 봤을 때 페이스트리 특유의 ‘겹’이 살아있어야 한다. 한 겹 한 겹이 뚜렷하게 구분되어 보이면 합격, 그렇지 않고 겹이 뭉개져 잘 보이지 않는다면 탈락이다. 물론 부드러운 식감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내게는 껍질이 단단할수록 그리고 겹이 바삭하게 살아있을수록 맛있는 크루아상이다. 그런 크루아상은 눅눅하지도 느끼하지도 않아서, 가루가 쉴 새 없이 떨어지는 것쯤은 기꺼이 감수하고 먹게 되는 것이다.
이런 크루아상을 만나볼 수 있는 곳으로는 빵집 곤트란쉐리에(Gontran Cherrier)가 있다. 내게 크루아상의 참모습을 일깨워 준 곳이기도 하다. 이름이 생소해 처음에는 이 집 간판을 자꾸 ‘곤트란 체리에’라고 읽었다는 후일담도 있다만, 여하튼 지금은 맛있는 크루아상뿐만 아니라 맛있는 빵을 먹고 싶을 때 찾는 곳 중 하나가 되었다. 서울 시내 여기저기에 지점이 많아서 찾아가기 좋고, 대치동같이 사람 많은 곳은 매장도 대단히 크다. 프랑스 파티시에의 이름을 땄다는 이 집의 베스트셀러 1위는 단연 크루아상이다.
이곳의 크루아상은 부피감이 남다르다. 대부분의 ‘그냥’ 크루아상이 다소 납작하고 옆으로 긴 편이라면, 곤트란 쉐리에의 크루아상은 윗부분이 둥글고 높이 솟아있다. 겹이 살아있는 외관도 훌륭하지만, 또 하나 주목할 점은 크루아상의 속살이다. 보통 크루아상의 속살은 껍질에 비해 버터에 전 맛이 많이 난다. 먹다보면 느끼해져 속살은 안 먹고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곳의 크루아상은 속살마저 겹겹이 포슬포슬하다. 버터 향 역시 거북하거나 부담스럽지 않고, 적당히 고소하고 산뜻하며 약간의 단맛까지 느껴진다. 프랑스산 버터와 밀가루를 사용한다는데, 역시 음식의 팔 할은 재료의 몫인가 보다.
크루아상뿐만 아니라 다른 페이스트리류와 치아바타같은 담백한 빵들도 훌륭한 집이다. 단 지점마다 맛과 질이 조금씩 차이 나므로 주의해서 찾아가도록 하자.
알려져 있다시피 크루아상의 국적은 프랑스이다. 우리나라의 유명 프렌차이즈 빵집 중에도 파리와 크루아상을 합친 이름이 있지 않은가. 물론 모 백과사전에 따르면 크루아상의 기원은 프랑스가 아닌 오스트리아나 헝가리라고 한다.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치렀던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며 오스만 제국 국기의 초승달 모양을 본떠 만든 게 시초라는 약간 흥미로운 역사도 있지만, 사실 먹는 입장에서는 그런 기원이며 역사며 하는 것들은 아무래도 좋다. 어쨌든 지금은 명실상부 바게트와 함께 프랑스를 대표하는 빵이 되었으니까.
크루아상이라는 이름 역시 초승달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발음에서부터 특유의 바삭하면서도 부드러운 식감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입 안에서 croissant, 하고 혀를 굴리다 보면, 불어도 못하고 프랑스에도 안 가봤지만 어쩐지 프랑스적인 정취로 흠뻑 적셔지는 듯한 낭만이 있다.
그러나 크루아상의 낭만 뒤에는 상당히 충격적인 비밀이 있다. 크루아상을 만들 때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의 버터가 들어간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크루아상에 대해 ‘깼던’ 기억은 중학생 때, 한창 제과제빵에 심취하여 집에서 이것저것 시도해 볼 무렵이었다. 크루아상에 도전해보고자 레시피를 찾아봤는데, 세상에 커다란 버터 한 덩이를, 그것도 자르지도 않고 통으로, 반죽으로 감싸는 것이 아닌가. 그걸 다시 밀고 접고 밀고 하는 이 제법을 라미네이팅(laminating)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크루아상의 섬세하고 바삭한 ‘겹’을 만드는 비결이었다. 하기야 반죽과 반죽이 서로 붙지 않고 겹을 이루려면 그 사이에 버터와 같은 기름막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되기는 하다만, 그래도 좀 많기는 많다. 오죽하면 크루아상의 사전적 정의에도 ‘버터를 듬뿍 넣은’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그래도 잘 먹는다. 그것도 아주 맛있게 먹는다. 여기서 잠시 크루아상을 맛있게 먹는 나만의 방법을 나눠보고자 한다. 물론 평범하게 냠 하고 베어 먹어도 바삭거리는 식감이 잘 느껴지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먹어서는 느끼함에 빨리 물려버린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일단 가운데부터 뜯는다. 즉 크루아상의 제일 윗부분이자 돌돌 말린 뾰족한 끝이 위치한 가운데 부분 말이다. 이 부분을 뜯다보면 크루아상 한 바퀴를 다 돌게 되는데, 같은 방식으로(아, 그 전에 커피 한 모금 마시고) 가운데에서 좌우 양 끝으로 나가며 바삭한 껍질들을 돌돌 뜯어 먹는다. 마지막으로는(잠깐 커피 한 모금 더) 양 끝에 남아있는 바삭한 부분이다. 이 부분은 한 입 크기정도로 작아서 정말 한 입에 넣고 먹어치울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역시 좀 느끼하다. 그래서 페이스트리 한 겹만 집어 중심방향으로 찢어내며 먹는 것을 선호한다. 한 겹 한 겹 느긋하게 뜯다보면 질리는 줄도 모르고 크루아상 하나를 다 먹게 된다. 빵 겹겹에 담긴 ‘라미네이팅’의 정성을 음미하며 먹는 나의 방법이다.
후식이라고 쓰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크루아상은 프랑스의 주식이다. 우리나라의 흰쌀밥처럼 식문화의 기본이 되는 음식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비교적 다양하게 변주되는 음식이기도 하다. 크루아상에 다크 초콜릿이나 말차 초콜릿 등을 덮어 만든 달콤한 디저트는 최근 들어 부쩍 인기를 얻는 중이고, 그중에서도 특히 아몬드 페이스트로 덮이거나 채워진 크루아상 아망드는 아예 독자적인 메뉴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한편 모양은 다르지만 취지는 비슷한 뺑오쇼콜라는 크루아상의 사촌 쯤 되는 초콜렛 페이스트리고, 크루아상 안에 각종 채소와 햄 등을 넣어 만든 크루아상 샌드위치는 보통의 샌드위치에는 없는 식감과 풍미를 확보한, 크루아상의 청출어람 격이라 할 수 있겠다.
무궁무진한 변주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인 특이함으로 눈길을 끄는 크루아상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바로 한남동 빵집 아티장 베이커스에서 만날 수 있는 라우겐 크루아상이다. 모양은 크루아상인데 맛은 프레첼에 가까운 이 빵은 기존 크루아상보다 훨씬 깔끔하고 담백한 맛과 쫄깃한 식감을 자랑한다. 진한 버터 향이 빠지고 대신 짭조름한 소금과 고소한 반죽의 맛으로 채워진 라우겐 크루아상. 기존의 크루아상이 너무 느끼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권해보고 싶다. 이 집의 다른 메뉴인 사워도우와 페이스트리도 수준이 높아 수요미식회에서도 소개되었다고 하니, 빵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가볼 만하다.
크루아상은 오직 밀가루와 버터만으로 승부를 본다. 설탕, 크림, 초콜릿 등 거추장스러운 치장을 하지 않는다. 이토록 담백한 크루아상은 그러나 또한 화려하다. 한 입 물면 겹겹이 부서지는 크루아상은 입 안에서 소리와 식감과 맛의 불꽃놀이를 펼친다. 지나치게 단 디저트에 물릴 때, 혹은 지나치게 담백한 식빵이 지겨워질 때, 잘 만든 크루아상 한 덩이는 버터의 풍미만큼이나 진한 마음의 품격을 가져다 줄 것이다.
사진 출처 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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