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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랑 Aug 09. 2018

끔찍한 혼종, 혹은 신의 한 수? : 당근케이크

두 번째 후식일담, 당근케이크


“당근이 들어가나?”
“들어갑니다.”
“그리고 케이크?”
“네.”

“상상이 가질 않아.”

- 김이환, “디저트 월드” 中


지금이야 다들 익숙해졌겠지만 사실 당근케이크만큼 희한한 혼종이 없다. 뭐, 김치초콜릿보다야 심하지는 않지만 확실히 아이스크림호떡이나 딸기빙수보다는 부자연스러운 조합이다. 그 어느 채소도 디저트로 쓰이지 않고, 그 어느 디저트도 채소를 쓰지 않는다, 당근케이크만 빼고. 더군다나 당근은 채소 중에서도 채소다. 생당근에서 진하게 풍기는 흙냄새하며, 익혀도 남아있는 특유의 이상한 식감과 향 때문에 채소 싫어하는 아이들의 블랙리스트 1위는 늘 당근 아니던가. 당근이 카레나 된장찌개, 김밥에 쓰이는 건 많이 봤지만 케이크라니. 이런 혼종이 따로 없다.


그런데 그 혼종이 꽤나 긴 역사를 갖고 있다. 당근케이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중세 유럽에 닿게 되는데, 당시 유럽에는 설탕이 귀해 당근을 설탕 대용으로 썼다고 한다. 당근이 달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못하는 일부 당근혐오자들도 있겠지만, 하여튼 당근은 특유의 높은 당분 함유량으로 인해 당 보충에 요긴하게 쓰이는 재료였다고 한다. 특히 이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에서는 물자부족으로 인해 설탕 대신 당근을 배급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케이크에 넣을 설탕이 없어 대신 당근을 갈아 넣어 만든 당근케이크가 예상치 못하게 너무 맛있어버렸는지 지금은 영국의 가장 대표적인 디저트가 되었다. 그 맛이 미국에까지 알려져 아예 매년 2월 3일을 당근케이크의 날로 지정하기에 이르렀으니, 그 인기가 자못 실감이 난다.




당근케이크의 맛?


영미권 나라 사람들이라면 어릴 적 집에서 구워주시던 당근케이크 맛이 선연할지도 모르겠으나, 사실 나는 당근케이크 하면 그 맛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당근케이크만큼이나 희한한 소설 하나가 먼저 떠오르는데, 바로 김이환 작가의 “디저트 월드”이다. 판타지 소설이라고 하는데 판타지보다는 초현실주의에 가깝다. 몽블랑, 마카롱, 컵케이크 등 일곱 가지 디저트에 기괴하고 이상한 이야기를 엮었다. 처음에는 ‘도대체 뭐하자는 소설이지’ 하면서 읽었는데, 읽다보니 묘하게 매력적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디저트가 나온다는 점이, 이 책을 단숨에 읽어나가게 한다.

          


당근케이크에 대한 강한 인상을 남긴 문제의 대목 역시 괴상하다. 주인공이 무슨 일로 벌 비슷한 것을 받는데, 먹는 음식마다 모두 당근케이크 맛이 나는 벌이다. 처음에는 좀 황당하기는 해도 별 생각 없이 이 부분을 넘겼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상했다. 당근케이크 맛이 뭐지? 예컨대 초콜릿 맛, 딸기 맛, 하다못해 당근 맛이라 해도 다 알겠는데 당근케이크 맛은 정확히 떠올릴 수가 없다. 살면서 당근케이크를 많이 먹었다고 자부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못해도 한 판은 먹었을 텐데, 당근케이크가 무슨 맛이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이렇게 이 책은 나에게 ‘당근케이크의 맛’이라는 난제를 안겨주었다.


몇 번의 시식과 얼마간의 고민 끝에 내린 결론 : 당근케이크의 맛은 크림치즈의 맛이다. 당근케이크는 보통의 케이크와 달리 생크림이나 버터크림이 아닌 크림치즈를 사용하는데, 그 맛이 대체로 강렬하다. 달고 묵직한 크림치즈의 맛이 먼저 혀를 휩쓸고 지나가면 남은 자리는 정체불명의 당근 시트(케이크의 빵 부분) 맛이 채운다. 당근으로 만든 빵이지만 당근을 강판에 갈거나 잘게 채 썰어 넣기 때문에 당근 맛도 향도 거의 나지 않는다. 당근의 천연 당분만 남아 그저 달달할 뿐이다. 간혹 시나몬가루나 견과류 맛이 곁들여지기도 한다. 어쨌든 중요한 건 당근케이크에서 당근 맛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당황스러운 사실이 내가 당근케이크 맛을 떠올리지 못하게 한 원인이 되겠다. 자연당근의 향이 싫어서 당근케이크가 망설여졌던 사람에게는 오히려 희소식이려나.




맛없기도, 맛있기도 힘든 음식


그렇다고 당근케이크가 다 맛있는 건 아니다. 물론 당근케이크는 디저트를 고를 때 비교적 안전한 선택에 속하는 편인데, 특별히 맛없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유독 당근케이크만큼은 어느 집을 가나 맛이 비슷비슷해서 크게 실패할 확률이 적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당근케이크는 탁월하게 맛있기도 어렵다. 이건 당근 맛보다 크림치즈 맛의 비중이 높은 당근케이크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부분 당근케이크의 문제는 도대체 뭔 맛인지 모르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달달하기는 한데 정작 당근 맛도 그 무슨 맛도 안 난다. 크림치즈 빼고는 별다른 풍미나 독특함이 없는 케이크다. 설상가상으로 시트가 너무 거칠거나 혹은 너무 질거나, 아니면 크림치즈가 굳어있거나 너무 적게 발려있는 당근케이크를 만나면 이보다 더 슬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와중에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인생 당케’를 선사해 준 집이 있다. 그런데 이 집을 소개하기 전에 알려야 할 점이 하나가 있는데, 맛이 조금 바뀌었다. 고백하자면 나를 사로잡았던 건 바뀌기 전의 맛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당근케이크의 강자인 것은 변함없다. 카페 세시셀라(Ceci Cela)이다.





세시셀라의 당근케이크는 키가 정말 크다. 보통 케이크의 1.5배 정도 되는 부피(및 가격)이다. 시트 사이사이에 크림치즈가 두툼하게 발려 있다. 시트에는 채 썬 당근이 낱낱이 보이기 때문에 내가 정말 당근케이크를 먹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물론 당근 맛은 나지 않지만). 매장에서 먹고 갈 경우 휘핑크림을 함께 주기도 하는데, 휘핑크림이 있어도 맛있고 없어도 훌륭한 맛이다.


원래 이 집 당근케이크의 강점은 크림치즈에 있었다. 이곳의 크림치즈는 ‘탁월하게’ 진했다. 다른 집 당근케이크와 절대 헷갈릴 수 없는 농도였다. 안 그래도 크기가 큰데 한껏 달고 느끼하고 묵직한 크림치즈 때문에 한 조각을 이틀에 걸쳐 나눠먹어야만 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크림치즈의 맛이 많이 약해졌다. 대신 보다 부드럽고 가볍고 약간의 풍미가 더해진 휘핑크림의 느낌이 많이 난다. 덕분에 이제는 살짝 배고픈 상태라면 한 조각은 거뜬히 먹는다. 아무래도 이전의 강렬한 맛을 줄이고 대중적인 맛을 낸 것 같은데, 이 집만의 독특한 맛을 좋아하던 나로서는 아쉬운 일이다. 



당근 시트도 변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전보다 덜 묵직한 것 같기도 하다. 브라우니마냥 꾸덕한 당근케이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전의 맛을 선호하겠지만, 나는 적당히 쫀쫀하고 촉촉한 지금의 식감이 좋다. 크게 달지 않아서 크림치즈 없이 시트만 파운드케이크처럼 먹어도 맛있을 것 같다.


전반적으로는 부드러운 크림과 쫀쫀한 당근 시트가 균형 있게 어우러지는 맛이다. 아몬드가 곁들여진 휘핑크림과 함께하면 고소함도 더해진다. 다만 이 집만의 강렬하고 리치한(rich한 : 풍미가 깊거나 진한) 식감과 맛은 사라져서 아쉽다. 그래도 여전히 인기 많은 집이라 많은 사람들이 찾는데, 일일 생산량이 한정되어 있어 늦게 가면 못 먹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가격은 한 조각에 8,800원. 조각의 경우 늦게 오는 손님을 위해 일인당 두 조각으로 한정 판매된다.            

  

▲ 세시셀라 도산공원점




여전히 당근케이크가 무슨 맛인지 자신 있게 말하기 힘들다. 사실 당근케이크가 맛있는 음식이라고 자신할 수도 없다.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이보다 인기 있는 케이크가 없다고 하는데, 이해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가끔씩 크림치즈의 진한 맛과 당근 시트의 알 수 없는 단맛의 조합이 생각날 때가 있다. 도대체 누가 밥반찬에나 쓰이던 당근을 케이크 반죽에 갈아 넣고, 거기에 크림치즈를 조화시킬 생각을 했을까. 그 괴상한 조합이 또 나름대로 괜찮은 맛을 낸다는 사실이 대견하기까지 하다. 케이크의 신(神)이 있다면 아마 당근케이크는 신이 심심해서 친 장난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며 오늘도 당근케이크를 찾는다.



사진출처 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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