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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랑 Nov 24. 2018

내가 너에게 진정으로 닿을 수 있을까?

단막극 <그 하루의 꽃> 리뷰


내가 너에게 진정으로 닿을 수 있을까?



재미없게도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질문에 대한 연극의 답은 아니오이다. 어쩌면 당연한 결론일지도 모른다. 질문 자체가 불가능한 것을 묻고 있으니.


작품에는 세 가지 형태의 관계가 나온다.
동성애자와 그 쌍둥이의 다툼, 이혼을 예정한 부부의 마지막 만남, 비정규직 간병인과 부자 고용인의 논쟁.
이 세 개의 에피소드는 ‘꽃’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하나로 엮음으로써 인간과 인간의 소통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 단막극 '그 하루의 꽃' 시놉시스 中


꽃으로 엮이는 세 개의 에피소드는, 그러나 꽃처럼 아름답기보단 차라리 답답하고 쓸쓸했다. 가족의 연애를 진심으로 응원하지만 정작 그의 애인은 당연히 그와 이성일 것이라고 생각해버리는 사람도 있고, 이혼 직전 서로 마음을 돌리고 잘 해보려다 도리어 지난 수년간의 묵은 감정과 갈등이 폭발해버리는 커플도 있다. 한편 부유한 자식들 덕에 간병인을 두고 살지만, 정작 자길 찾아오는 자식은 없어 대신 자식 또래인 간병인에게 자식처럼 잔소리하고 또 정을 주는 노인도 있다. 그들 사이에서 홀로 따뜻한 꽃은 오히려 이질적인 존재처럼 느껴졌다.




누구나 마음속에 아무도 모르는 자기만의 마음 하나쯤은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비밀이 많은 사람도 있고 자기 이야기를 잘 털어놓는 사람도 있겠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누구에게나 오직 자기만 알고 자기만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의 공간은 존재한다. 일부러 숨겨서 숨겨진 부분도 있고, 내 얘기 좀 들어달라고 아무리 외쳐도 타인이 이해해주지 않는 혹은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부분도 있다. 철저히 본인에게만 속하는 그 마음의 공간으로 인해, 나는 너에게 온전히 이해받지 못하고 나도 너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 누구도, 그 누구에게도 진정으로 닿을 수 없다. 우리가 타인에게 닿았다고 생각되는 순간들은 그저 위태로운 모래성일 뿐이다. 타인의 마음을 안다고 여기는 모든 건 사실 전부 불안정한 추측과 상상일 뿐이다. 당연하게도 나는 당신이 아니므로, 나는 겉으로 드러난 당신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당신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모든 관계에는 어느 정도의 오해와 거짓말과 은폐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는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끝까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해묵은 상처와 앙금에 휩싸여버려 그럼에도 아직 너를 사랑한다는 마음을 고백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그래서 그는 내면 깊숙한 곳의 외로움은 숨긴 채 아들 뻘인 간병인과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기만 했을 것이다. 종종 우리는 가장 가깝다고 생각되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진실도 진심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러한 너와 나 사이의 괴리가 우리의 관계를 지탱해주는지도 모른다. 나와 전혀 괴리될 여지가 없는, 모든 것이 투명하게 비치는, 말하자면 사물이나 기계 같은 것과의 관계가 너와의 관계와 전연 다른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나와 타인이 매 순간 변화하기에, 언제나 타인이 모르는 나의 마음이 있고 내가 모르는 타인의 마음이 존재하기에, 그만큼 우리는 관계에 노력을 들이며 이어나가고 있을 것이다. 모든 관계에 양념처럼 끼어 있는 다소간의 괴리감이 그 관계를 무르익게 하는 것 아닐까.


그래서 이 연극이 단지 답답하고 쓸쓸한데서 끝나지만은 않는 것 같다. 차가운 길바닥에서 버림받고 발에 채이던 꽃이 결국에는 어느 집의 꽃병(사실 소주병이었지만)에 꽂히는 결말도 이를 암시하는 것 같다. 나는 너에게 진정으로 닿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너와 내가 관계를 맺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 아니겠냐고. 비록 그 괴리감에 때로는 답답하고, 억울하고, 화도 나지만, 그렇게 두 세계가 마찰하면서 내는 빛의 향연이 삶 아니겠냐고. 짧은 길이에 삶의 작은 빛들을 담은, 반짝거리는 단막극이었다.



덧,

1. 프리뷰에서 예상했던 대로, 영화 <더 테이블>과 여러모로 닮아 있는 극이었다.

2. 배우 분들이 연기를 너무 잘하셨다. 극중 여섯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커튼콜 땐 세 분밖에 인사를 안 하셔서 의아했다. 알고 보니 1인 2역이었다. 극을 보는 내내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연기였다.

3. 그러나 꽃의 연기는 좀 아쉬웠다. 음색도 말투도 연극 전체의 톤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개인적인 의견인데, 꽃의 대사는 아예 없어도 무방했을 것 같다. 물론 진짜 꽃은 누워있기만 하고 사전에 녹음된 목소리가 내레이션을 하는 정도지만, 그래도 내레이션 없이 조명이나 음향만으로도 충분히 꽃의 존재를 부각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 글은 아트인사이트와 함께합니다.

원문보기 http://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38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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