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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나 May 17. 2020

우리가 가진 언어

존 버거의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를 읽고

 지인들과의 독서 모임에서 영화를 보는 건 어떻겠냐는 제안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를 보고 이야기를 나눴다. 평생을 성실한 목수로 살아오던 주인공 다니엘이 심장병이 악화되어 일을 그만두고 정부에 질병 수당을 신청하지만, 신체 움직임에 문제가 없다는 사유로 거절을 당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이어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마련된 복지 정책이 지닌 관료주의적인 질서가 역설적이게도 어떻게 인간을 소외하는지 다니엘과 케이티의 서사를 통해 보여준다.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영화였다. 특히 '긴급재난지원금'이라는 이름으로 전례 없는 국민 수당이 지급되면서 우리의 대화는 한 층 더 현실과 맞닿았다. 우리가 헤어진 후에도 계속 마음에 남는 대목은 숫자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 제목이 <나, 다니엘 블레이크>인 것과 밀접한데, 영화 속 정부는 주인공을 '한 사람'이 아니라 '국가 수당 신청자 XXX번' 정도로 대하면서 숫자 아래에 존재하는 인격체의 삶을 지워버린다는 지적이었다. 그래서 주인공이 특유의 유쾌함으로 시위를 벌일 때도 당국 건물의 외벽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로 시작하는 문장을 적었으리라. 사지가 멀쩡한 XXX번째 신청자가 아니라, 요령 피운 적 없는 성실한 시민이자 지금은 병이 악화되어 일을 할 수 없는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사람으로 봐달라는 그의 메시지.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스틸컷


 내게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지점이었다. "요즘 코로나 확진자도 그렇고, 교도소나 군대에서 사람에게 숫자를 부여하는 것에 대해 여러 생각이 든다"던 H는 과거 메르스가 유행하던 때 일례를 들려주었다. 국내에서는 마지막으로 메르스 병원균을 가지고 있던 80번 환자가 사망하자 언론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메르스 종식" 따위의 헤드라인을 달았다고 한다. '80번 환자 사망'이 '메르스 종식 선언'으로 치환되는 동안 메르스 이전에 림프종을 앓고 있던 고(故) 김병훈 씨의 삶은 지워졌다. 



 여기에 미디어가 세상을 전달하고 분류할 때 사용하는 언어가 더해진다. 그것은 전문 경영인들이 사용하는 전문용어나 논리와 매우 비슷하다. 그 언어는 모든 것을 '계량화'하고 본질, 혹은 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율을 이야기하고, 여론조사의 변동이나 실업률, 성장률, 증가하는 채무, 이산화탄소 측정치 등등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숫자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목소리지만 삶이나 고통받는 신체에 대해서는 아니다. 그것은 후회나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공식적으로 말해지는 것들, 그리고 그것들이 말해지는 방식이 시민들로 하여금 일종의 기억상실에 빠져들도록 부추긴다. 경험이 지워지고 있다. 과거와 미래라는 지평선도 희미해지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끝없이 불확실한 현재에만 살게 하려는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다. 망각 상태의 시민으로 축소된 것이다.

-존 버거,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중 (107~108p.)


 자신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계를 글과 그림으로 담는 영국의 소설가이자 미술평론가 존 버거는 효율성 혹은 편리성이라는 핑계로 '사람'과 그의 '삶'을 손쉽게 지워버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대항한다. 그는 내가 앞서 인용한 책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초반부에서 "말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아예 말해지지 않을 위험이 있는 것들(10p.)"을 위해 글을 쓴다고 언급했다. 그는 가까운 친구,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들, 알베르 카뮈나 찰리 채플린부터 뉴스를 통해 전해 들은 소식이나 오감으로 느낀 풍경을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고 해석해 그의 언어로 풀어낸다. 그의 언어를 거치면 2차원, 심지어는 1차원에 머물렀던 것들이 3차원으로 되살아난다. "평생을 미술에 바치고도 천재성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평가받는 스벤은 존 버거의 텍스트를 거쳐 "(작품이 팔리지 않아 곤경에 처해도) 하루도 빠짐없이 파스텔, 펜을 들고 작업에 임했으며, 많은 날을 더 이상 빛이 들지 않을 때까지 꼬박 일했"던, 행복한 순간들과 자연의 신비를 소중히 생각했기에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았던 고귀한 화가가 된다. 


 휴대폰만 있으면 1200만 화소의 또렷한 사진을 찍어내는 요즘 시대를 살고 있는 나에게는 '찰리 채플린'이라고 하면 어릴 적 TV에서나 봤던 '유성 영화'의 흐릿하고 흔들리는 흑백 필름 정도의 단순한 심상이 무언가 달그락달그락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떠오르는데. 그의 글을 읽을 때면 마치 지금도 두문불출 활동하고 있다는 뱅크시처럼, 물론 그의 얼굴은 본 적 없지만, 요즘의 화소로 존재하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120페이지의 얇은 책을 300페이지 두께의 전공서를 읽는 것처럼 꽤 오랜 시간 붙들고 음미했다.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중 존 버거가 바라본 찰리 채플린


 존 버거가 글을 썼듯이, 고 김병훈 씨의 아내는 '80번 환자'를 '사람 김병훈'으로 바로잡는 고독한 투쟁을 이어갔다. "그는 바이러스 덩어리가 아니라 사람이었다"고 끈질기게 외치는 그녀의 목소리 덕에 3년 만에 그의 사연이 김탁환 작가의 소설 <살아야겠다(2018)>로 출간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있는 지금도 남편의 삶이 그저 '마지막 80번 환자'라는 활자에 머무르지 않도록 숨을 불어넣는 그녀의 투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오랜 시간 포기 않고 투쟁한 자가 또 있었으니, 영화 속 등장인물 다니엘 블레이크다. 마침내 질병수당 항소일이 확정되고, 그의 변호인은 "말도 안 되는 처사"였다며 승리를 확신한다. 다니엘은 항소장에 들어서기 직전, 승리를 목전에 두고 화장실에서 숨을 고르다가 심정지로 세상을 떠난다. 항소장에서 미처 읽지 못한 그의 편지를, 친구 케이티가 장례식장에서 대신 읽는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의 점도 아닙니다.
 나는 묵묵히 책임을 다하며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나는 굽실대지도 않고 이웃이 어려우면 기꺼이 도왔습니다.
 자선을 구걸하거나 기대지도 않았습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나의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 중



 흔히들 인간의 고유한 특성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꼽는다. 이는 다른 동물들과 비교할 때 훨씬 더 폭넓은 범위를 아우르는 문자로부터 발달한 것인데, 유발 하라리는 이 문자 체계가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꾸었다고 한다. 무언가를 지각할 때에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들도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자유 연상 체계에서 캐비닛에 파일을 분류하듯이 생각하는 "칸막이와 관료제" 방식으로 옮겨간 것이다. 이렇듯 조직적으로 데이터를 생산하고 관리하는 과정에서 숫자는 전 세계를 통틀어 어쩌면, 가장 중요한 언어가 되어가는 모양이다. 


 정부나 기구, 회사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싶은 사람은 숫자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전문가들은 심지어 '빈곤' '행복' '정직' 같은 개념도 숫자로 번역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194p.)

 쓰기는 인간의 의식을 돕는 하인으로 탄생했지만, 점점 더 우리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다. 컴퓨터는 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말하고 느끼고 꿈꾸는지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에게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숫자 언어로 말하고 느끼고 꿈꾸라고 가르치고 있다. (195p.)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중


 사피엔스를 읽다 보면 인간과 같은 포유류 동물들은 한 무리의 규모가 20~30마리를 넘지 않는다고 한다. 30마리를 넘어서면 통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작은 조직을 이룬다. 문자 발명 이전의 초기 인류가 이룰 수 있는 집단의 '자연적' 규모가 최대 150명임을 감안하면, 수천만 인구를 갖는 국가를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서 숫자를 매기는 일이 불가피할 테다. 하지만 꼭 기억하자. 우리를 위해 고안한 시스템이 우리에게 일련의 번호를 부여하더라도, 그 번호가 사람을 전부 대변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때때로 숫자가 누군가의 삶을 지워버릴 것 같으면 우리가 갖고 있는 또 다른 언어, 즉 말과 글 그리고 행동으로써 우리를 지켜내자. 우리가 고안하고 발전시켜온 우리의 언어는 그렇게 쓰여야 한다. 존 버거가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를 펼쳐내고, 케이티가 다니엘 블레이크의 편지를 대신 읽은 것처럼.






글을 쓰기 전 읽고 본 것들

존 버거, 2019,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열화당

켄 로치(감독), 2016, 「나, 다니엘 블레이크」, [영화] 영국

한국일보(2018.11.12), “내 남편은 바이러스 덩어리가 아니라 인간이었다”, 22면 (링크)

유발 하라리, 2015, 『사피엔스』,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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