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들이 알을 깨고 나오자, 촬영은 돛을 단 듯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했다. 하지만 예술하는 인간들이 모인 곳에 완벽한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산을 넘으니, 또 다른 산이 버티고 있었다.
"컷! 엔지(NG)!"
내가 다시 한번 슬레이트를 내리치자, 도지웅이 땀을 닦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 또요? 감독님, 이번엔 감정 좋았잖아요."
"감정은 좋은데, 대사가 너무 길어. 늘어져."
내가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김 작가를 쳐다봤다.
"형님. 선호가 보영이한테 자기 과거 이야기하는 씬 말이에요. 대사가 무려 열두 줄입니다. '나의 우주는 언제나 칠흑 같았지만, 네가 나타난 순간 성운이 피어올랐어...' 이거 80년대 연극 무대도 아니고, 너무 문어체잖아요. 관객들 하품합니다."
구석에서 대본을 체크하던 김 작가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박 감독. 그 대사가 선호라는 캐릭터의 영혼이야. 평생 수식만 파던 바보가, 처음으로 시적인 표현을 쓰면서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이라고! 그걸 자르면 어떡해!"
"그 영혼, 제가 시각으로 보여줄 수 있다니까요."
나는 키보드를 두드려 어제 인아에게 배운 프롬프트로 생성해 둔 배경 영상을 띄웠다.
"보세요. 창밖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흔들리는 백열등 불빛. 그리고 도지웅의 처절한 눈빛. 이 그림 자체가 이미 '사랑한다'고 소리치고 있어요. 여기서 구구절절 대사를 치면 그림이 죽어요. 그냥 대사 싹 날리고, 선호가 보영이 손만 꽉 잡는 걸로 갑시다."
"뭐? 싹 날려?"
김 작가가 펜을 바닥에 집어 던지며 벌떡 일어났다.
"야, 박찬혁! 네가 이미지 뽑는 기술 좀 배웠다고 이제 활자가 우스워 보이냐? 무슨 뮤직비디오 찍냐? 대사 속에 담긴 리듬감과 철학이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형님이야말로 시대를 좀 읽으세요! 숏폼에 뇌가 절여진 요즘 관객들은 10초 이상 대사 길어지면 바로 스킵 누른다고요! 구질구질하게 말로 설명하지 말고, 침묵과 여백으로 보여주자고요. 그게 시네마(Cinema)입니다!"
"시네마? 지랄하네! 넌 그냥 그 잘난 기계 놈이 만들어준 예쁜 그림에 취해서, 내 글의 본질을 거세하려는 것뿐이야! 네 영화가 맨날 차갑다는 소리 듣는 이유가 바로 그거라고!"
아차. 김 작가의 입에서 넘어선 안 될 선을 넘는 폭언이 튀어나왔다.
순간 창고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남 대표가 황급히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아유, 진짜! 두 양반 다 왜 이래! 지웅이랑 하나도 다 보고 있는데 낯부끄럽게!"
하지만 이미 내 자존심에도 금이 쫙 가버렸다.
"......좋습니다. 그렇게 활자가 중요하시면, 작가님이 직접 연출하시든가요."
나는 슬레이트를 바닥에 던져버리고는 창고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등 뒤로 남 대표의 "야! 박찬혁!" 하는 다급한 부름이 들렸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같은 시각. 방화 농수산물 시장 구석의 순대국밥집.
촬영이 중단되고 험악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눈치를 보던 도지웅은 슬그머니 창고를 빠져나와 밥집으로 향했다. 요즘 그는 마동식 일당을 피해 아예 시장통 근처 낡은 여관방에 달방을 끊어놓고 은둔 생활 중이었다.
푹 눌러쓴 야구 모자에 낡은 트레이닝복 차림. 도지웅은 구석 자리에 앉아 순대국을 퍼먹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카메라 앞에서 폭발하던 에너지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쫓기는 신세의 초라한 아재일 뿐이었다.
"자, 여러분! 오늘 제가 뜬 곳은 바로 방화동 농산물 시장입니다! 여기 순대국이 기가 막히거든요. 야쓰!"
그때, 밥집 문이 열리며 젊은이 두 녀석이 요란하게 들어왔다. 한 손에 짐벌 카메라를 들고 식당 안을 훑는 금발 머리의 청년. 구독자 80만을 보유한 이른바 '사이버 렉카' 유튜버, [배추보쌈]이었다.
도지웅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국밥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지만 유튜버의 시선은 뱀처럼 매서웠다. 렉카 킴이 식당을 훑다가, 구석에서 어깨를 웅크린 도지웅의 옆모습에 렌즈를 멈췄다.
"어라...? 잠시만요, 구독자 형님들. 저기 구석에 저분... 왠지 낯이 익지 않습니까?"
배추보쌈이 카메라를 든 채 슬금슬금 도지웅 쪽으로 다가왔다.
도지웅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저기요. 사장님."
배추보쌈이 불쑥 도지웅의 면전에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도지웅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는 순간, 모자챙 아래로 그의 흉터 있는 얼굴이 방송 화면에 고스란히 송출되었다.
"헐! 대박! 야, 우리 형님들! 이거 특종입니다! 코인 사기단 연루 의혹 받고 잠적했던 그 미친개 배우! 도지웅 씨 맞죠?!"
"......카메라 치워라."
도지웅이 낮게 으르렁거리며 얼굴을 가렸다.
"와, 도지웅 맞네! 여러분, 코인 사기 치고 도망다닌다더니, 시장 바닥에서 순대국 먹고 있었습니다! 지웅 형님! 피해자들한테 한 말씀 해주시죠!"
유튜버가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사이, 실시간 채팅창이 미친 듯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도지웅은 수저를 집어 던지고 식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어? 도망갑니다! 여러분, 제가 끝까지 쫓아가 보겠습니다!"
강남 삼성동, <미래 블록체인> 사무실.
복도 휴게실에서 낄낄대면서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보던 똘마니.
“어? 어?”
눈이 동그래지더니 부리나케 휴대폰을 들고 사무실 쪽으로 뛰어간다.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마동식 대표가 서류를 검토하고 있을 때, 다급하게 문을 열고 뛰어 들어오는 똘마니.
"형님! 찾았습니다! 도지웅 그 새끼요!"
"뭐? 어디야."
똘마니가 내민 화면에는, 방금 전 배추보쌈이 방송한 시장통 순대국밥집 라이브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도망치는 도지웅의 뒷모습, 그리고 간판에 적힌 '방화 농수산물 시장'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방화동...? 하, 쥐새끼 같은 놈. 그 영화사 사장놈이랑 시장 바닥에 숨어 있었어?"
마동식이 입에 물고 있던 시가를 재떨이에 짓이겨 껐다.
그의 눈에 서늘한 살기가 돌았다. 경찰의 압수수색으로 계좌가 동결되고 수배령까지 떨어진 마당에, 자신을 엿 먹이고 도망친 남정식과 도지웅을 가만둘 리 없었다.
"야."
"예, 형님!"
"애들 다 집합시켜. 오늘 그 쥐새끼들 잡아서 뼈까지 씹어버린다."
카메라 앞에 서서 조금씩 인간의 존엄을 되찾아가던 도지웅, 그리고 예술을 논하며 피 터지게 싸우고 있던 양파 창고의 낭만주의자들.
그들의 허술한 요새를 향해, 진짜 야만의 폭력이 질주를 시작하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