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예쁜 가짜와 못생긴 진짜

by 배윤성

새벽 2시. 농수산물 도매시장.


잠이 오지 않아 창고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던 나는, 어둠 속에서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남정식 대표였다.
그는 낡은 작업복을 입고, 거대한 5톤 탑차에 배추 박스를 싣고 있었다. 허리가 끊어질 듯 무거운 박스를 번쩍 들어 올릴 때마다, 그의 입에서 "으윽" 하는 신음이 샜다.
어디 가는 거냐고 묻기도 전에, 트럭 조수석에서 누군가 고함을 쳤다.
"어이! 남씨! 빨리빨리 좀 실어! 대전까지 언제가려고 그래!"
"예~예! 반장님! 다 실었습니다!"
남 대표는 수건으로 땀을 벅벅 닦고는 트럭 운전석에 올랐다. 매연을 뿜으며 트럭이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순간, 명치끝이 아릿해졌다.
인아가 1,000만 원짜리 컴퓨터를 사주고 떠났지만, 우리에겐 매일 먹어야 할 밥값, AI 프로그램 사용료, 소품 구입비 등 자잘한 진행비가 끊임없이 필요했다. 마이너스 통장마저 막힌 그가 선택한 것은, 우리들 몰래 심야 채소 장거리 수송 트럭의 운전대를 잡는 것이었다.
'하아... 이 미련한 형아...'
나는 다 타들어 간 담배꽁초를 바닥에 비벼 껐다. 15년 전, 최고급 일식당에서 해외여행이나 다녀오라며 척척 용돈을 내놓던, 손이 컸던 제작자는 이제 없다. 하지만 땀내 나는 작업복을 입고 배추를 나르는 지금의 남정식이, 내 눈엔 그 시절보다 백 배는 더 거인처럼 보였다.
목이 메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영화는 엎어지면 안 된다.

다음 날 낮, 창고 스튜디오.
도지웅과 이하나의 첫 대면 씬 촬영이 진행되고 있었다. 보영(이하나)이 선호(도지웅)의 수식이 적힌 노트를 주워주며 교감하는 장면.
이하나는 약속대로 화장기를 거의 지운 수수한 차림으로 왔다. 대본도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외워왔다. 연기에 대한 의지는 충만했다. 하지만 카메라가 돌아가자, 묘한 이질감이 화면을 덮었다.
"이거... 궤도 역학인데... 숫자가 많아서 머리 아프죠?"
도지웅이 투박하고 바보 같은 선호의 목소리로 대사를 던졌다.
이하나가 노트를 건네며 살포시 웃었다.
"아뇨, 예뻐서요. 숫자들이 꼭 음표처럼 흘러가는 것 같아서... 별을 노래하는 악보 같아요."
대사 톤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화면 속 그녀의 얼굴은 어딘가 작위적이었다. 눈물방울이 맺히는 타이밍, 고개를 45도 각도로 살짝 숙여 턱선을 갸름하게 만드는 각도, 슬픔을 머금은 입술의 완벽한 대칭까지.
그것은 한 편의 잘 만들어진 뮤직비디오 같았다.
"컷!"
내가 이하나에게 가기도 전에, 도지웅이 먼저 미간을 찌푸리며 대본을 바닥에 던졌다.
"야, 이하나. 너 지금 뭐 하냐?"
"네? 저... 감정 제대로 잡았는데요. 슬프고 아련하게..."
"슬프고 아련한데, 왜 앵글 계산을 해? 너 방금 고개 돌릴 때 왼쪽 턱선 각도 잡았지? 눈물도 예쁘게 똑 떨어지게 하려고 눈 깜빡이는 타이밍 쟀잖아."
정곡을 찔린 이하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배우가 앵글 신경 쓰는 게 당연하죠! 예쁘게 나와야 관객들이 감정 이입할 거 아니에요!"
"야, 네가 지금 여기서도 인플루언서야? 50만 팔로워 앞에서 라방하니?"
도지웅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보영이는 지금 조국의 명령이랑 자기 마음 사이에서 찢어지고 있는 간첩이야.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데, 턱선이 갸름하게 나오는지 그딴 게 중요해? 넌 지금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연기하는 척하는 예쁜 내 모습'을 전시하고 있는 거야."
이하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억울했다.
과거 아이돌 연습생 시절부터 수만 번의 카메라 테스트를 거치며 '가장 예뻐 보이는 각도'를 몸에 익혔다. 살아남기 위해 체득한 본능적인 방어기제. 그녀의 몸은 여전히 50만 팔로워의 '좋아요'를 받기 위해 세팅되어 있었다.
"감독님... 저 진짜 진심으로 한 건데..."
이하나가 억울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말없이 의자를 끌어당겨 그녀를 '뉴 워크스테이션'의 듀얼 모니터 앞으로 불렀다.
"하나야. 이거 어제 지웅이가 혼자 찍은 장면이야. 한 번 봐라."
나는 편집된 영상의 스페이스 바를 눌렀다.
화면 속 1982년의 낡은 하숙집. 텅스텐 조명 아래 앉은 도지웅의 모습이 나타났다.
[...보영 후배님. 세상이 너무 시끄럽잖아요.]
도지웅의 얼굴은 예쁘거나 멋있지 않았다. 땀에 절어 있었고, 감정에 북받쳐 안면 근육이 일그러져 있었다. 심지어 콧물까지 살짝 비쳤다. 완벽하게 못생긴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투박하고 처절한 눈빛이, 모니터를 뚫고 나와 창고의 공기를 짓누르고 있었다.
[근데 이거 꽂으면... 나만의 우주가 생기는 것 같아서 좋아요.]
영상이 끝났다.
이하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도지웅의 찌질하고 못생긴 진심이 그녀의 얄팍한 계산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하나야."
내가 낮게 불렀다.
"네 연기가 가짜라는 게 아니야. 넌 충분히 슬퍼. 근데, 네가 쓰고 있는 그 '인플루언서의 껍질'이 그 슬픔을 막고 있어. 못생겨지는 걸 두려워하지 마. 콧물이 나면 흘리고, 얼굴이 일그러지면 일그러지는 대로 둬. 진짜 감정은 통제되는 게 아니야."
"......"
이하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모니터 속 도지웅의 얼굴과 자신의 매끈한 얼굴이 너무나 대비되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감독님."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10분만 주세요."
이하나가 창고 구석의 간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쾅. 문이 닫히고, 거칠게 세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남 대표가 졸린 눈을 비비며 창고로 들어왔다. 대전까지 야간 운전을 마치고 막 돌아온 참이었다.
"아함... 야, 분위기가 왜 이래? 애 울렸냐?"
"아니요."
나는 형의 피곤한 어깨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10분 뒤. 화장실 문이 열렸다.
우리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이하나는 베이스 화장조차 남김없이 비누로 씻어낸 완벽한 생얼이었다. 눈가엔 아직 물기가 맺혀 있었고, 예쁘게 세팅했던 머리는 물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는 수건으로 거칠게 얼굴을 한 번 닦아내고는, 도지웅 앞에 섰다.
"쌤."
"어."
"나 지금... 진짜 못생겼죠?"
도지웅이 이하나의 벌게진 민낯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어. 완전 촌년 다 됐네."
"......다행이다."
이하나가 심호흡을 했다. 그녀의 눈빛에서 '좋아요'를 갈구하던 인플루언서의 그림자가 완전히 걷혔다. 벼랑 끝에 선 스파이, 홍보영의 눈빛이 그 자리를 채웠다.
"갈게요, 감독님."
나는 삼각대 앞의 카메라 녹화 버튼을 눌렀다.
남 대표의 야간 트럭 투잡, 인아의 천만 원짜리 컴퓨터, 그리고 못생겨질 용기를 낸 배우의 민낯.
됐다. 모두들 이 작업에 정말 진심이다. 나만 잘하면 된다. 이제 나만.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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