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이익- 철문을 열고 내가 들어오자, 스튜디오 안은 택배 온 새 컴퓨터를 뜯고 난리가 나 있었다.
"야! 남 대표 조심해, 조심! 기스 나!"
남 대표가 거대한 스티로폼 박스를 해체하며 낑낑대고 있었다. 그 옆에서 김 작가는 커터칼을 쥔 채 포장용 뽁뽁이를 경건한 자세로 벗겨내고 있었다.
그 중심에 놓인 것은 어제 인아가 보내온 1,000만 원 상당의 전문가용 워크스테이션이었다.
어젯밤 인아는 연남동 카페에서 과외를 끝내며 말했다.
"당분간 저는 못 와요. 회사 감사팀에서 예의 주시하고 있어서, 꼬투리 잡히면 진짜 끝이거든요. 장비는 제가 택배로 주문해 놨으니까, 가르쳐 준 프롬프트 공식대로 렌더링 돌려보세요."
자신의 안위가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기꺼이 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쾌척하고 후방으로 빠진 그녀. 그 묵직한 응원에 보답하는 길은, 이 기계 놈을 완벽하게 통제해서 기가 막힌 컷을 뽑아내는 것뿐이다.
전원 케이블이 연결되고 스위치를 눌렀다.
위이잉-
'당근 1호'의 경운기 소리가 아니었다. 고급 세단의 엔진처럼 낮고 묵직한 구동음. 32인치 UHD 듀얼 모니터에 선명한 화면이 뜨자, 양파 창고의 아재들은 불을 처음 발견한 원시인들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자, 박 감독! 보여줘! 네가 어제 연마했다는 그 독수리 타법의 매운맛을!"
김 작가가 내 등을 떠밀었다.
나는 비장하게 의자에 앉아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Prompt: 1982년 봄, 낡은 하숙집 방안. 오후 4시의 기울어진 햇빛.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 입자 렌즈 50mm, 노스탤지어 필터 적용.]
타닥타닥. 인아에게 배운 대로, 감정이 아닌 '빛과 공간'을 지시했다.
엔터를 치고 30초 후.
"와......"
뒤통수 너머로 남 대표의 탄성이 들렸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1982년의 눅눅하지만 따뜻한 하숙집 방이 그런대로 잘 구현되어 있었다.
내 손끝에서 세상에 없던 공간이 창조되는 쾌감. 며칠 전까지만 해도 컴퓨터 앞이 두려웠는데, 이제는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대로라면 꽤 괜찮게 작품이 빛을 볼 날이 멀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 입상도 불가능하진 않겠다.
하지만, 기술의 진보가 안겨준 얄팍한 성취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에게서 터졌다.
아까 전부터 도지웅의 심기가 아주 불편해 보였다.
"컷! 엔지(NG)!"
내가 디렉팅 보드를 신경질적으로 책상 위로 ‘탁’하고 던졌다.
"지웅아. 너 계속 감정이 안 올라오는데 왜 그래? 선호가 처음으로 보영이한테 설렘을 느끼는 씬이잖아."
"아... 씨발, 진짜 못 해 먹겠어요!"
초록색 크로마키 벽 앞에 서 있던 도지웅이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모션 캡처 센서를 거칠게 뜯어내며 폭발했다.
"감독님! 솔직히 까놓고 말합시다. 이래가지고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오겠어요?!"
그가 초록색 벽을 신경질적으로 걷어찼다.
"내 앞엔 시퍼런 천쪼가리밖에 없고! 이 좁은 창고에서, 상대 배우도 없이 허공에 대고 '보영아, 이 음악 들어봐' 이러고 있는데, 감정이 잡히냐고요!"
도지웅의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저는요, 현장에 2시간 전에는 도착해요. 그리고 공기 냄새부터 맡아요. 분장실에서 1980년대 옷 입고, 머리 포마드 바르고 거울 보면서 2시간 동안 '나는 김선호다' 최면을 걸어야 한다고요! 근데 지금 내 꼴을 봐요!"
그의 말이 맞았다. 그는 지금 츄리닝 바지에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얼굴엔 우스꽝스러운 검은 점들을 찍고 있었다. 상대 배우 이하나의 스케줄이 안 맞아 오늘은 도지웅 혼자 허공을 보며 원맨쇼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머릿속으로 상상하라고 했잖아! 야 헐리우드 배우들은..."
"상상력도 한계가 있죠! 숨소리, 눈빛, 현장의 그 공기, 긴장감... 그게 싹 다 거세된 이 초록색 창고에서 무슨 메소드 연기를 하라는 겁니까! 네? 전 못할 것 같아요."
도지웅이 구석의 낡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단순한 앙탈이 아니었다. 그는 정신적으로도 많이 지쳐 있었다. 코인 사기단 앵벌이로 전락해 바닥까지 떨어졌던 자존감. 오랜만에 카메라 앞에 섰는데, 자신의 유일한 무기였던 '연기'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절망감이 미친개를 짓누르고 있었다.
"지웅아. 생각해봐. 우리 형편이..."
남 대표가 다가가 달래보려 했지만, 도지웅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담배 연기만 뿜어댔다.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아무리 1,000만 원짜리 컴퓨터로 기가 막힌 배경을 뽑아내면 뭐 하나. 그 안에 들어갈 알맹이가 썩어가고 있는데.
나는 담배를 하나 빼 물고 창고 밖으로 나갔다.
지게차가 윙윙거리는 농산물 시장. 무, 배추 냄새를 맡으며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저놈을 1982년의 천재 공대생 선호로 만들 수 있을까. 가짜 환경 속에서, 어떻게 진짜를 느끼게 할까.'
문득, 창고 구석에 쌓여 있던 고동찬 사장님의 소품 더미가 떠올랐다.
나는 담배를 비벼 끄고 창고로 뛰어 들어갔다.
"형! 김 작가님! 빨리 이리 와봐요!"
나는 먼지 쌓인 소품 상자들을 미친 듯이 뒤졌다.
"박 감독, 뭐 찾아?"
"찾았다!"
내 손에 들린 것은 1980년대에 쓰던 투박하고 무거운 '삼성 마이마이(카세트 플레이어)'와 귀를 덮는 커다란 유선 헤드폰, 그리고 낡은 놋쇠 납땜 인두기였다.
나는 그것들을 들고 도지웅에게 다가갔다.
"지웅아. 일어나."
"안 한다니까요."
"그러지 말고 일어나. 마지막으로 한 번만 해보자."
나는 도지웅을 억지로 끌어다 크로마키 앞에 세웠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 커다란 헤드폰을 씌우고, 손에는 납땜 인두기를 쥐여주었다.
"이게 뭡니까?"
"눈 감아."
나는 카세트 플레이어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지지직- 거리는 거친 카세트테이프의 마찰음과 함께, 김 작가가 <별을 쏘다> 시나리오에 묘사했던 그 소리, 우주의 백색 소음(Cosmic Microwave Background)을 녹음해 둔 소리가 헤드폰을 통해 도지웅의 귀로 흘러 들어갔다.
동시에 나는 태훈 형님이 주고 간 아리(ARRI) 텅스텐 조명의 스위치를 켰다.
차갑고 평면적이던 형광등 불빛 대신, 오후 4시의 석양처럼 따뜻하고 묵직한 호박색 빛이 도지웅의 얼굴을 강렬하게 내리쬐었다. 텅스텐 전구 특유의 열기가 그의 뺨을 데웠다.
"눈 감고, 손에 쥔 거 꽉 쥐어봐. 차갑고 무겁지? 쇠 냄새도 나고."
나는 도지웅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너는 지금 냄새나는 창고에 있는 빚쟁이 도지웅이 아니야. 1982년, 먼지 풀풀 날리는 하숙집 방구석에서 우주에 쏠 로켓 발사체를 꿈꾸는 공대생 김선호야. 네 귀엔 우주의 소리가 들리고, 네 손엔 뜨거운 인두기가 있어. 그리고 네 앞엔..."
나는 남 대표를 쳐다보며 눈짓했다. 남 대표가 얼른 낡은 대본을 들고 도지웅의 시선 밖으로 가서 섰다. 낮고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첫 눈에 반한 여대생 보영이가 있는 거야."
도지웅의 미간이 미세하게 떨렸다.
“보영이는 정말로 청초한 느낌의 소녀야. 눈이 맑고, 슬퍼. 하지만 앞으로 그녀에게 얼마나 엄청난 시련이 다가올지 상상조차 못하고 있어”
헤드폰에서 들려오는 거친 백색 소음이 외부의 차가운 현실을 차단했다. 뺨에 닿는 텅스텐 조명의 뜨거운 열기, 손에 쥐어진 놋쇠 인두기의 묵직한 쇳덩어리 감촉.
가짜 초록색 벽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그를 1982년으로 강제 소환하고 있었다.
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본을 읽었다.
"선배님. 이 소리... 꼭 별이 노래하는 악보 같아요."
한참을 눈을 감고 있던 도지웅의 호흡이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소름이 돋았다.
사기꾼의 탁한 눈빛, 패배자의 불안한 동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곳엔, 평생을 고독한 수식 속에 갇혀 살다가 난생처음 자신을 알아주는 여자를 만나, 심장이 터질 듯 덜컹거리는 스물네 살의 너드(Nerd) 청년 '김선호'가 서 있었다.
도지웅이 인두기를 쥔 손을 미세하게 떨며, 허공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눈시울이 서서히 붉어졌다.
"...후배님. 세상이 너무 시끄럽잖아요. 근데 이거 꽂으면... 나만의 우주가 생기는 것 같아서 좋아요."
완벽했다.
작은 근육의 떨림, 침을 꿀꺽 삼키는 목울대의 움직임, 그리고 허공에 닿은 애틋한 시선까지. 기계가 수만 장의 사진을 학습해도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오직 인간만이 뿜어낼 수 있는 날것의 진심이었다.
"컷! 오케이!!!"
내가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소리쳤다.
도지웅이 헤드폰을 벗었다. 그는 방금 전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허공을 응시하다가, 이내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하아... 하아..."
"야~ 연기 광인(狂人). 살아있네."
내가 다가가 그의 어깨를 강하게 쥐었다.
"세트? 분장? 그딴 거 없어도 돼. 내가 빛으로, 소리로, 소품으로 다 만들어 줄 테니까. 넌 그냥 그 안에서 놀아. 알았어?"
도지웅이 붉어진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씨발... 감독님 진짜 변태네요. 사람 감정 후벼 파는 데 선수야."
"칭찬으로 들을게."
우리는 마주 보고 낄낄거렸다. 김 작가도 안경 너머로 눈시울이 약간 붉어졌고, 남 대표는 말없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초록색 감옥 안에서, 우리는 마침내 진짜 영화를 찍고 있었다. 기계는 단지 도울 뿐, 인간이기에 가능한 마법.
"자, 분위기 탔을 때 뽕을 뽑자! 다음 씬 스탠바이!"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