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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금한 민지 Apr 21. 2023

챗GPT야, 내 회의실 비서까지만 해라.

농담 따 먹기는 하지 말고.

- 최재천의 아마존과 조던 피터슨의 챗 GPT에 관한 영상을 보고



최근 연애를 시작했다. 매일 만났다. 생각했다. 현실이 지나치게 단조롭거나 과거가 없다면, 매일을 채울 말들이 남아날지 말이다. 일상의 7할은 업무와 회사 생활이었고, 이를 얘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회사 슬랙에서는 챗GPT에 관한 소식이 오갔다. 곧 유튜브 알고리즘도 챗GPT 영상으로 채워졌다. 최재천의 아마존 채널에서는 챗GPT의 한계와 미래에 관한 영상​이 올라왔다. 진화생물학자답게 최재천 교수는 챗GPT가 인간을 대체할 순 없다고 봤다. 그들이 인간처럼 유성생식을 통해 번식하지 않는 한.


한때 추종했던 조던 피터슨 교수가 챗GPT를 두고 아이폰에 들어가는 칩을 개발한 처남과 나눈 대화​도올라왔다. 피터슨 교수의 영상은 보다 위협적인 내용이었다. 챗GPT에게 글을 주문했더니 그의 저서 <12가지 세상의 법칙>과 <질서 너머> 스타일로 쓰인, 그가 봐도 ‘그가 썼을 법한’ 것이었다고.




며칠 전에는 출근하자마자 그룹장이 ‘딥엘(DeepL)’이라는 번역 사이트를 추천했다. 구글보다 번역이 한결 낫다는 게 추천 이유였다. 마침 글감으로 염색체에 따른 X 정자와 Y 정자의 차이를 조사 중이었던 터라 관련 논문을 구글과 딥엘에 나란히 입력했다.


딥엘의 문장은 매끄러웠다. 등가인 단어에 ‘및’이라는 표현을 써서 혼란을 야기하는 구글의 현상이 딥엘엔 없었다. 단, 비교급에 대해서는 이해가 떨어졌다. 정확성 측면에서 구글의 승리였다. 나는 아직 대체되지 않은 에디터로서(!) 기술의 이기를 누리며 두 번역기의 부족한 부분을 메웠다.


AI와는 경쟁할 수 없다. 능력치 면에서 인간이 기계를 따라잡을 순 없기 때문이다. 일 년에 책 7권 읽는 인간과 700만 권을 읽는 AI를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경쟁하려면, 라이벌 의식을 갖기 이전에 상대와 내가 동급인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우린 동급이 아니다.




오랜만에 팀 간 회의를 다녀왔다. 회의 아젠다는 분명했는데, 대화가 산으로 갔다. 논의가 표류했으나 내 뇌는 이를 바로잡지 못했다. 대화를 따라잡기 급급했다. 머리 위엔 흐리멍덩한 느낌표와 물음표가 뒤섞여 떠다녔다.


자리에 돌아와 회의를 곱씹자 문제점이 드러났다. 하나의 소재를 두고 각자 쟁점이 달라 논의가 생산적이지 못했던 것. 삼천포로 빠지는 대화를 바로잡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회의 판이 비생산적으로 돌아갈 때 챗GPT가 이를 잡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대화가 산으로 갈 때 지금 해발고도 몇 미터까지 올라갔는지 알려줄 빛! 회의의 GPS가 되어줄 비서! (아마 당시 상황이라면 같은 위치에서 뱅뱅 맴도는 좌표 두 개가 떠 있겠지.)




AI에 관심이 지대했던 과거, 점심시간마다 기술문명에 대한 한담을 가졌던 에디터 선배에게 조던 피터슨의 영상을 보냈다. 육아로 바쁜 선배는 영상을 공유해 줘서 고맙다고 얘기했고, 나 역시 이런 영상을 보고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 있음에 감사했다.


통화 중에 애인은 “입맛대로 만날 거면 AI랑 만나지 애인을 왜 만들어”라 했다. 마땅히 혼나던 상황도 아니었는데 이 문장에 멈칫했다. 챗GPT가 유효한 건 비즈니스 차원에서만이 아닐까. 챗GPT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업무적인 어눌함을 채워주는 선까지.


듣고 싶은 말이든 듣기 싫은 말이든 상대가 입밖에 내뱉는 말을 나는 조금도 예측하지 못한다. 세 치 혀는 순전히 상대의 것. 그것으로 날 죽일지 살릴지, 비행기를 태울지 주눅 들게 할지는 오로지 그의 몫이다. 그런 면에서 GPT는 인간과 비교 대상이 못 된다. ‘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만 같을 뿐. 곧 정답만을 추구한다면, 인간과 챗GPT는 경쟁 상대가 될 것이다.




챗GPT는 소개팅에 나가서 할 말에, 오늘 점심 식사에 동료와 나눌 말에, 말이 안 통하는 애인과의 관계를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말과 살의 간극에 대해서도 고심하지 않겠지.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들의 허위에도 힘들어하지 않겠지. 이것에게는 상대에게 환심을 살 의지도, 이겨먹거나 저 주려는 마음도, 교감의 기쁨도 없으니까.


챗GPT가 “네가 원하는 대답만을 듣길 원하면 다른 사람 만나”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혹은 고마움을 표시할 수 있을까. 허를 찌르는 농담과 기도 안 차는 헛소리로 날 들었다 놨다 하는 친구와 애인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한때 '그럴 수 있지'라는 말을 추종했다. '근데'로 시작하는 멘트가 올라오면, 숨을 고르고 "그럴 수 있지"를 뱉었다. 챗GPT를 재평가 해야 하는 시점은 그가 '그럴 수 있지'라는 한 마디의 어려움을 아는 순간이 아닐까. 상대가 원하는 답이 눈에 선한데 그 말을 해주지 못하는 어려움을 아는 순간 말이다.


우린 안심해도 좋을 것이다. 챗GPT가 ‘답정너’인 지금까지는.




[불확실한 세상에서 불안과 헛소리를 뛰놀기], 이하 ‘불불헛뛰’를 시작합니다. 급변하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농담 같은 글을 부정기적으로 실을 예정입니다.


표제 이미지 @https://unsplash.com/ko/@dengxia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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