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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궁금한 민지 Jun 18. 2023

존재 불안과 수행 불안

혼자 된 랍스터가 될까봐 불안해 하다가.

영화 <더랍스터> 스틸.


결혼할 상대를 제때 구하지 못해 랍스터가 되는 것과 이혼하지 않으면 다행인 결혼생활을 하는 것 중 무엇이 나을까?




Unsplash, @Bud Helisson


1. 더 잘 보이는 쪽을 고르기      


안경점에 갔다. 원데이 렌즈를 살 요량이었다. 시력 검사를 한 지 1년이 지나 시력도 측정했다. 모두가 아는 그 시험. 이마를 고정해 앉고 저 푸른 초원 위의 집을 본다. 잘 보일 듯 보이지 않는다. 눈꺼풀에 힘을 주면 조금이라도 잘 보일까 애를 쓰지만 달라지는 건 없다.      


자리를 옮겨 시야 축이 틀어지진 않았는지 측정한다. 안경사가 중앙에서 방사형으로 뻗은 실선 중 유난히 두드러지는 선의 방향을 묻는다. 몇 시 방향이 잘 보이시나요. 6시?요. SNL 코리아에서 MZ 세대의 말투를 패러디한 주현영처럼 말끝에 물음표가 따라붙는다.     

 

확신이 없는 대답을 내놓는 건 그나마 낫다. 이젠 좌우 각각 적색과 녹색 배경에 숫자가 올라가 있다. 어느 쪽이 더 잘 보이시나요. 숫자부터 읽히지 않는다. “다 안 보이는데요.” 일단 보이는지부터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상대는 ‘무엇이 더 잘 보이느냐’고 묻는데, 정작 나는 문제부터 읽지 못한다. 그리고 살면서 맞닥뜨리는 질문 대부분은 질문이 유효한지 검토할 새 없이 몰아친다. 질문의 타당성을 먼저 들여다봐야 하는데, 답을 내놓지 못하는 자신에 불안부터 느낀다.     




Unsplash, @Jan Schulz # Webdesigner Stuttgart


2. 실체 있는 불안, 실체 없는 불안     


불안에는 크게 2종류가 있다. 대상이 구체적인 경우와 추상적인 경우다. 전자는 수행(to do) 불안이다. 특정한 행위를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을까 봐 하는 우려다. 후자는 존재(to be) 불안이다. 특정한 상태나 존재에 이르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볼까. 나의 대표적인 수행 불안은 ‘글을 쓰지 않는 것’이다. 친구와 노느라, 야근을 하는 바람에 피로하다는 이유로 글을 쓰지 않는 일이 해당한다. 반면 존재 불안은 작가가 되지 못하는 미래를 두려워한다. 수행 불안이 행위 불이행에 대한 강박이라면, 존재 불안은 가능성이 가능성으로 머물다가 닫힐 것을 걱정한다.    

 

존재 불안에는 원형적인 이미지가 자리한다. 책상에 앉아 머리를 괸 채 글을 쓰는 작가의 모습. 반면 수행 불안은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수행 불안은 ‘to do list’가 지워지지 않은 상황, 다이어리에 쓸 한 줄이 없는 상태다. 그런 의미에서 수행 불안은 금세 물리칠 수 있다. 이 순간 노트를 펼친 채 글자 하나만 써도 되기 때문이다.     


반면 존재 불안을 없애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특정한 존재에 이를 가능성을 입증할 방법이 묘연하기 때문이다. 5년 뒤 작가가 될지 무엇으로 증명하겠나. 게다가 ‘작가’라 해도 머릿속 이미지가 다를 것이다. 책을 내기만 하면 작가인지, 독립서점 몇 곳에 들어가면 작가인지, 교보문고 같은 대형서점에서 출판기념회를 해야 작가인지 등.     


존재 불안은 ‘매일 100자 이상 글을 썼는지’ 묻는 수행 불안으로 대체돼야 한다. 최소한 수행 불안은 실체를 지니니까. 존재 불안에 사로잡히면 실체 없는 미래에 현재가 덜미 잡힌다. 그리고 무엇보다 존재 불안은 수행 불안의 상위 개념이다. 곧 이는 불안이 아닌, 믿음의 영역이다.




Unsplash, @Shafagh Faridifar


3. 비전은 휘둘리지 않게 품어줄 것     


존재 불안은 자신의 이상향을 반영한다. ‘10만 헥타르에 달하는 넓은 숲에 산책로를 갖고 싶다’는 그림이 이상향, 일종의 비전이라고 치자. ‘바깥쪽에는 A나무를 심고, 안쪽으로 갈수록 B와 C를 심어야겠다’ 등 구체적인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토질 조사에 들어간다. 이쯤 되면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수행 단계로 접어든다.   

   

이렇게 보면 선명하다. 한참 뒤 숲을 가진 존재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림만으로는 어떤 가능성도 판별할 수 없다. 그저 나날이 할 수 있는 일은 한 그루의 나무를 심고, 돌보고, 물을 주는 일이다.     


5년 뒤 결혼을 했을지, 10년 뒤엔 엄마가 되었을지 묻는 것은 질문 자체가 틀렸다. 누군가 ‘~가 되고 싶다’는 그림에 ‘되겠니?’라고 물을 수 있겠는가. 그만큼 무례한 질문도 없을 것이다. 질문의 대상이 자신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비전은 의심의 대상이 아닌, 세파에 휘둘리지 않게 지켜야 할 꿈 아닐까. 비전은 그저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믿어주는 수 밖에 없다. 오늘 할 일은 매일 머릿속 갤러리에 들러 그림이 완성될 수 있을지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물감을 사고, 조색을 하고, 붓터치를 하는 것일 테다.





Unsplash, @Jade Stephens


4. 가망성은 보는 데서 오지 않는다     


‘언젠가 글을 쓰지 않을까봐’라는 불안은 끈덕진 편은 아니다. 대개 이런 불안은 ‘어제도 글을 쓰지 않았어’라는 불쾌감에 기인한 경우가 많다. 명백하게 하지 못한 과거의 일은 현재 행동을 개선하는 데 용이하게 쓰일 수 있다. 반면 ‘작가가 되지 못할까봐’는? 이런 접근이 불가능하다. 아직 무엇도 실패하지 않았으니까.    

 

결혼과 육아는 어떨까? 이것도 내 머릿속 그림 중 하나다. 이것도 비전의 가능성을 가늠하는 대신 이를 실현하기 위해 감당해야 할 정신력과 경제적 기반을 어떻게 다질지 고민하는 게 현명하겠다. 아이를 낳지 못한 40대 싱글 여성이 되는 그림을 두려워하느니 말이다. 전자는 적어도 강인한 생활력을 쥐어줄 테다.     


‘어느 쪽이 더 잘 보이세요?’라는 질문을 현실에 대입한다면, ‘어느 쪽이 더 가망성 있어 보이나요?’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식의 질문은 성립하지 않는다. 가망성은 그저 보는 데서 나오지 않으니까. 정말 실현 가능성이 궁금하다면, 마음속 이상을 의심하는 대신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영화 <더랍스터> 스틸.

영화 <더 랍스터>는 결혼할 사람을 구하지 못하면 동물이 되는 세계관으로 이뤄진다. 2023년을 살아가는 나도 다르지 않다. 분면 내 머릿속엔 <결혼과 가정>이라는 그림이 있다. 랍스터가 된 나는 내 머릿속 갤러리에 없다. 하지만 우습게도 캔버스는 텅 비어있다. 작품명만 적혀있을 뿐. 구체화된 그림도 없던 것이다.     


누구나 원하는 그림 몇 점은 마음속에 품고 있을 테다. 그림이 생각한대로 완성되는 데에는 자신의 노력과 이를 지속하는 꾸준함. 그리고 적소에 귀인이 나타나 적시에 세상이 이를 도와주는 운때가 맞아 떨어져야 한다. 곧 처음에 바라던 대로 그림을 완성할 가능성은 낮다.     


곧 그림을 곧이곧대로 이루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속 갤러리에만 두어도 충분하다. 자주 들를 필요도 없이. 미래가 보이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이제 미래는 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겠다. 그저 시시각각 팔레트와 캔버스를 오가는 내 손만이 있을 뿐.




[불확실한 세상에서 불안과 헛소리를 뛰놀기], 이하 ‘불불헛뛰코너에서는 급변하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농담 같은 글을 부정기적으로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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