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계와 금융업의 닮은 꼴과 다른 꼴
*해당 글은 ‘자본주의 연속극(가제)’ 시리즈의 일부로 부정기 연재 예정입니다.
은행원들이 모이면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예술가들이 모이면 돈에 대해 이야기한다. – 오스카 와일드
미술에 관심이 생기고서 미술 모임을 몇 개 거쳤다. 4회차 모임에 35만 원 수준의 소셜 살롱. 내 또래로 보이는 여성부터 중년의 여유가 느껴지는 4050 남성까지 외모는 다양했지만, 내 머리는 재빠르게 계급을 나눴다. 수년간 콘텐츠업에 종사한 끝에 연봉 4천만 원을 겨우 넘긴 나와 달리 출발선 자체가 다른 금융계 사람들. 취향 차원에서 계층은 같지만, 소득 관점에서 갈리는 계급. 난 경매나 컬렉팅을 대표한 미술시장에는 요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아마 그 탓이겠지. 소유보다는 안목을 기르고 싶었다. 관심사를 공유하는 이들과 있으면서도, 왜 난 언제나 분수를 의식하고 마는 걸까?
미술은 원래 유한계급 거다. 책 하나 읽고 경도되는 게 제일 무섭다고 하던데, 한 권은 아니고 두 권이다. 미술평론가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랑 금융의 역사를 다룬 <금융 오디세이>. 오늘날 이탈리아는 문화유산으로 먹고 산다. (물론 최근에는 문화유산을 팔아치울 정도로 나라 경제가 힘들지만.) 여전히 전 세계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14~16세기 르네상스 미술은 넘치게 살던 메디치 가문의 후원 덕에 가능했다. 내가 한 헛소리들이 지나간다. ‘작가와 창작 생태계에 기여하는 일을 하고 싶다.’ 600년 전 메디치 가문을 보고 알았다. 기여는 쥐뿔이 있을 때 하는 거다. 장사를 했어야 했다! 언젠가 비평 수업에서 만난 누군가는 ‘돈 많은 좌파’를 꿈꿨다. 나도 그렇다. (근데 난 좌파인가?) 유한계급이 되어서 예술가를 스폰하자!
…….어떻게?
난 태생이 멍청하다. 뭐든 근원까지 파고든다. 가령 이런 식이다. 5만원은 실제 얼마일까? 종이는 나무로 만들어진다. 인쇄비와 제작비를 따지고 들자면 종이 재질과 잉크량, 한 면당 찍을 수 있는 5만 원권의 장수, 나아가 회차당 생산량까지.(한국은행에 문의하면 알려주나) 챗GPT한테 물으니 5만 원 1장에 드는 제작비는 200~300원으로 추정된단다.(1천 원은 40원이 든대는데, 근거가 시원찮아서 싸웠다. 돈 단위만큼 제작비가 축소되는 건 아니잖아) 이걸 따지고 드는 것 자체가 멍청하다. 그건 그냥 약속이니까.
돈은 무가치하다. 봉제 기술이든 석유 시추 기술이든 유혹의 기술이든(?) 진보된 기술은 후퇴하지 않는다. 돈은 기술을 굴리는 동기를 제공할 뿐이다. 돈을 받든 안 받든 갑자기 콘텐츠를 제작할 수 없는 불수가 되는 건 아니니 말이다.(물론 하도 안 만들어서 후져질 순 있음) 만약 품앗이처럼 모두가 작정하고 다이렉트한 협상으로 재화와 서비스를 교환한다면, 엄청나게 다양하고 다층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발달할 거다. 텃밭을 갈아주면 이사할 때 손을 빌려주는 식으로. 배추 한 포기를 얻기 위해 시장에서 할머니와 1시간 수다를 떠는 모습을 상상해 보기.
자, 내가 당신을 위해 들려줄 쇼팽 녹턴 9번은 당신이 내게 제공할 한 잔의 커피와 마들렌과 어떻게 교환할 수 있을까? (강조하지만 우린 돈 없이도 이를 교환할 수 있어. 가까운 사람과 특히 그런 관계를 맺곤 하지.) 빵 만드는 사람은 많은데 피아노 치는 사람은 적다, 혹은 빵에 들어가는 재료는 공수부터 해야 하는데, 연주는 다 스러져 가는 악기 하나만 있으면 시도라도 할 수 있다 등. 반대도 가능하겠지. 탁월한 마들렌을 만드는 기술이 얼마난지, 녹턴 9번을 치기까지 들여야 하는 시간이 얼마난지. 결국 둘은 무엇이 더 귀한지 혹은 그에 들인 품이 얼만지 머리씀의 흔적을 측정해서 가장 페어한 트레이딩을 하려고 할 거야. 그래서 돈은 결국 환율이다. 둘 이상이 맺는 관계에 대한 상대적 힘 말이지.[1]
2013년 12월,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1억 4240만 달러에 낙찰된 프란시스 베이컨의 ‘루시안 프로이트의 세 가지 연구’. 한화로 1,500억 원에 달하는 그림에 동감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떤 영상에서는 파인 아트는 다수의 이해를 구하지 않는다고, 일반인들이 참여하는 영역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나는 반은 동의하면서도 반은 물음표가 뜬다. 소수의 사람들이 이해하는 대상이 문화유산으로 남기도 하지만, 그것은 얼마나 소멸에 취약한가. 결국엔 어떻게든 그를 조금이라도 찾아줄 사람이 늘어나면 좋은 것 아닌가, 하는 거지. 그러다가 다수에게 빠르게 소화되는 것만큼 순식간에 죽어버리는 것도 없다는 걸 화들짝 깨닫는다.
미술에 상한선이 없다면 금융에는 하한선이 없다. 한없이 올라가는 작품 가격에는 어안이 벙벙하고, 한없이 생성되는 돈 찍어냄-돈의 가격 하락, 즉 실제 거래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비싸짐(물가 상승)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쉰다. 작품 따위 안 사도 그만이고, 미술관이야 평생 안 가도 그만이지만, 백반이 김밥으로 축소되고, 그마저도 삼각김밥으로 후퇴하는 건 심각한 일이니까. 근데 무한정 찍어내는 돈으로 인해 한없이 올라가는 물가도 벙벙하지 않나? 인간인 예술가는 유한한 삶의 일부를 투입해 작품을 만들지만, 추상으로 존재하는 은행과 정부는 영속적 존재를 가정하며 부채를 생성한다. 미래에 생산활동으로 인한 자본이 될지, 혹은 더 심각한 빚으로 남을지 모르는 돈을.
금융에는 하한선이 없다. 인류 역사를 뒤집을 작품이 계속 나올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채는 무한정 생성될 수 있다. 우리가 미래를 낙관하기만 한다면. 황홀하게 무르익을 미래에 부채는 까짓것이다. 내가 믿는 그것을 너도 믿어줄 거지? 그렇게 우리의 부채는 자산으로 귀결될 거야! 부채는 미래의 이익 창출을 위해 감수하는 리스크라고 배웠는데, 내 주위 어디에 리스크가 있는지 모르겠다. 분배의 정의가 실현된 걸까? 모두가 균등하게 침몰하고 있는지도.
2021년, 갤러리K라는 회사가 등장한다. 구매한 미술품을 대여하는 대가로 매출을 벌어들이는 회사다. 나는 회사, 당신은 구매자. 당신은 나한테 미술품을 구매해. 단, 일종의 할부로. 미술품이 천 만원이라고 쳐. 당신은 내게 단번에 천 만원을 주는 대신 24개월 혹은 36개월에 걸쳐 할부로 작품을 구입해. 그동안 난 미술품을 대형병원 등에 빌려주지. 미술품을 전시하는 동안 당신 수중에는 임대료가 떨어져. 미술품을 청산하지만 않는다면, 당신은 조금씩 미술품을 소유하면서도 일종의 배당금을 받게 돼. 자산화를 하는 가운데 세를 주는 것이니 일종의 미술품 월세다. 값비싼 그림을 한시적으로 대여해 주면서 돈 벌기. 내겐 꽤나 민주적인 매혹으로 들린다.
할부가 끝난 시점, 교환이 끝나 완전한 제로로 수렴해야 할 거래는 다시 이어져. 내가 미술품을 ‘재판매’해주거든. ‘폰지사기’로 불리는 갤러리K의 붕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돼. 곧 당신은 모든 값을 치르고 미술품을 완전히 소유한 시점에서 별도의 수고를 치르지 않고서도 해당 미술품을 재판매함으로써 당초 치렀던 1천만 원 이상의 수익을 거두게 되는 거지. 환상적이지? 손해보지 않는 장사. 그야말로 리스크라곤 없는 보험이다. 그래서일까, 갤러리K의 아트딜러들은 재무설계사와 보험설계사였다고.
예술은 얼마나 보험과 멀리 있는가, 에 대해 얘기해봐야 한다. 이미 박물관에 들어간 작품들은 예외. 재평가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이미 반열에 오른 작품을 거론하는 건 반칙이잖아. 그냥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예술을 하는 이가 보험과 얼마나 거리가 있는지 보자. (예술과 콘텐츠가 갈리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예술을 ‘될(팔릴) 것 같아서’ 한다는 게 말이 되나? 차라리 이 시대에 필요한 말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게 오만할지언정 설득력 있겠다. 예술가는 저도 모르는 새 누구보다 앞서 가 있는 사람. 세상의 진도를 비교적 빨리 감지하는 조금 앞서간 사람이라면, 광의의 크리에이터일 순 있겠지.
자, 유일하게 남는 질문은 이거다. 탁월한 예술을 당대에 알아볼 수 있는가. ‘이것이 몇십 년, 몇백 년 뒤 미술관에서 모시고 갈 예술이다’라고 호언하려면, 우리는 현재가 과거에 비해 어떤 사회이며,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알아야 할 거야. 어, 그렇다. 주식은 ‘망하지 않을 회사’라는 우량주 개념이라도 있지만(하지만 시장 역사는 ‘망하지 않는 회사는 없다’는 단 하나의 진실을 가리킨다), 우량주 미술품은 어떤지? 배당주 미술품은 어떤지? 확실한 건 예술가가 짊어지는 리스크(자신의 삶)는 존재하는데, 컬렉터가 짊어지는 리스크가 한 쪼가리도 없을 수 있는 걸까? 무엇보다 확실히 이상한 건 <보장성 예술>이라는 말이다. 훗날 예술이 될 작품을 알아보려면 얼마나 깊은 식견과 멀리 내다보는 혜안이 있어야 하는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남을 예술에 대해 나는 아는 바가 없다. 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를 보며 해석을 읽고, 오디오 가이드를 듣고, 도록과 각종 예술서적을 헤맬 뿐. 당대의 갤러리를 거쳐간 작품들 몇이 살아남을까? 잊지 않아야 할 예술의 물결을 형성한 일부로서 기억될까. ‘내가 볼 줄 모르는 무엇을’ 전문가라는 사람이 볼 줄 안다고 믿고 맡긴다. 인간의 신뢰는 실로 그렇게 움직인다. 무슨 그리스 철학자가 그랬다매. 인간은 말의 내용이 아닌,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반응한다고. 그래서 뭐다? 딜러가, 큐레이터가, 갤러리스트가 어떤 사람인지 봐야 한다는 거! 어… 그게 내가 감내해야 할 유일한 리스크-테이킹이 아닐까? 결론은 나도 컬렉팅에 관심이 생겼다, 이 말이다. 어제 본 그림 한 점은 이 시대의 진정한 자산일지 모른다.(아닌가?) 보장성 예술이 있다면 나도 알려주세요!
[1]당초에는 ‘둘 이상이 맺는 외재적 관계에 대한 상대적 가치’라고 썼다. 내재적 가치와 구분된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음식과 음악을 비교한다면, 누구나 음식을 우선으로 꼽을 테다. 굶주림은 청각의 결핍보다 우선하니까. 그러나 당장 끼니를 잇지 못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개개인의 상태와 선호도에 따라 가치는 달라진다. 마들렌 하나가 주는 심리적 만족도와 녹턴 9번을 듣는 심리적 만족도는 주체에 따라 갈린다. 식사를 마친 당신에게 단 하나의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당신은 마들렌 하나를 고를 것인가, 녹턴 9번을 재생할 것인가? 결국 사물의 객관적 가치는 최소한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을 때에만 의미 있으며, 이후에는 주체가 대입된 주관적 가치만이 따져보는 의미가 있다. 곧 사물의 내재적 가치와 외재적 가치를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글을 쓰게 된 핵심단상: 왜 금융계와 미술계는 친밀한가?
*영향을 준 레퍼런스: 책 <예술을 보는 눈(The Value of Art)>, 영화 <더 울프 오브 아트 스트리트(The Price of Everything)>, KBS 1TV <추적 60분> 「사기가 된 예술, 갤러리K 아트테크」 편, 책 <금융 오디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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