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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불불헛뛰

썩지 않는 자산이라는 환상에 대하여

왜 노동소득은 자본소득을 따라잡을 수 없을까

by 궁금한 민지

*해당 글은 ‘자본주의 연속극(가제)’ 시리즈의 일부로 부정기 연재 예정입니다.



2018년 서울 아파트 중위가격이 6억8866만 원에서 5년 만에 10억 원을 돌파할 때, 같은 기간 임금근로자의 중위소득은 25% 증가했다.[1] 노동으로 받은 보수는 가치를 저장하기에는 속도가 더디다. 한때 문 정부가 추진한 소득주도 성장은 노동가가 자본가가 되도록 힘을 실어주려는 일환이었을 텐데.(아니. 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은 늘어난 임금만큼 노동자가 돈을 쓰는 전제 하에 세워진 정책이었다. 노동자의 소비가 내수를 진작시키고, 늘어난 수요만큼 기업의 투자가 활발할 것을 노렸던 것.[2] 그치만 저소득층은 빚 갚고 고소득층은 저축하기 바빴다고 한다.[3]) 이 글은 노동소득이 왜 자본소득을 따라잡을 수 없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됐다. 노동소득은 왜 자본소득을 따라잡지 못할까? 재테크 책에서는 노동소득을 비축해 자산을 소유하라고 한다. 이유는 하나다. 자산을 소유하는 행위만으로 가치를 저장하거나 급기야 가치를 불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가치를 불린다는 건 뭘까? 오늘 5억5000만 원을 주고 구매한 부동산이 몇 년 뒤 6억3000만 원이 된다는 것. 이를 매도할 경우 8000만 원을 (세금은 제하고) 이득 보는 것. 근로소득으로 한 해 1600만 원을 알뜰살뜰 모아야 했을 돈을 한 번의 매매로 챙길 수 있다는 것. 이건 예시일 뿐, 근로소득 상승보다 자산가격 상승이 빠르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주택 구매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짠테크가 배로 빡세지지 않는 이상.





Cut 1.

자본가가 되고 싶다. 몸을 쓰지 않는데 수입은 꽂혀서 과육이 흐르는 촉촉한 계좌를 떠올린다. 패시브 인컴에서 강조되는 건 그 사람이 실천한 고생(친구 안 만나기, 하루 1만 원으로 살기, 이직해서 연봉 올리기, 매일 부동산 공부하기 등)보다도 매일 노동을 투입하는 이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손가락질. 엄마한테 ‘남의 돈 가져오기 힘들다’를 들으며 자랐는데, 이젠 ‘돈은 아등바등 버는 게 아니’라고 한다. 들인 공에 비해 돌아오는 바가 없으면, 남이 돈 번 얘기를 곁눈질한다. 모두가 자본가-소유주를 꿈꾼다. 모두가 건물주이자 주주인 세상. 기업의 비전에 물심양면으로 공감하는 주주는 있어도, 제 역량을 투입하는 사람은 없다. 밭이 있고, 돈은 대겠다는데 쟁기를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도 일하지 않는 것은 가장 상상하기 쉬운 장면이다. 한 단계 나아간다. 보다 현실가능성 높은 그림은 자본을 소유한 이들이 사람을 고용하는 것. 정확히는, 채용 대신 계약하기. 생산물을 산출해낼 인력을 외주로 쓰기. 샘 올트만은 챗GPT를 소유하지만, 이를 일구는 사람들은 나 같은 사람들이다. 부지런히 일해서 남 좋은 일을 시킨다. 아니, 나도 이득을 본다. 이 원고 일부를 챗GPT와 토론하며 꾸렸으니까. 나는 챗GPT를 계약직 근로자처럼 사용한다.(매일 보는 풍경이다!) 계약직 근로자-챗GPT가 만든 아웃풋은 과연 퀄리티를 보장할 수 있을까? 이건 프리랜서 에디터가 인하우스 에디터보다 못하다는 논쟁점으로 번질 수도 있겠다. 어, 나 둘 다 하는데. 일단 패쓰.


자본을 통해 소득을 얻는다고 치자. 자본소득은 세상에 뭘 일으켰나? 자본소득은 자산이나 투자로부터 발생하는 소득을 말한다. 부동산만 볼까. 부동산에서 자본소득은 토지와 건물을 포함한 붙박이 자산을 타인에게 빌려줌으로써 거두는 사용료다. 그런데 매매를 통한 시세차익은 개인 입장에서는 일종의 투자를 통한 소득일지 몰라도, 사회에 기여하는 생산성과는 무관하다. 기존 주택 매매는 일종의 당근마켓 거래다. 이는 국내총생산(GDP)[4]에 포함되지 않는다. 물론 임차인에게 월세를 받으면 건물주 입장에선 임대소득이라는 현금흐름도 생기고, 국내총생산에도 포함된다. 아주 조금. [5] 임차인이 내는 공간 대여료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생산성에 기여한다. 한 번 오른 부동산은 그마저도 멀어진다. 텅 빈 가로수길의 ‘전층임대’ 임대료가 경제에 무슨 보탬이 되겠느냔 말이지. [6]


자본주의는 모두가 소유주가 되라고 말한다. 그 세상이 얼마나 볼 만한 풍경인지는 떠나서.


Unsplash @Aaron Sousa




Cut 2.

감가상각을 생각한다. 감가상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지는 유형자산의 가치를 회계에 반영하는 것을 말한다. 토지는 감가상각에 포함되지 않는다. 건물은 감가상각 대상인데 토지는 아니란다. 예술작품도 감가상각 대상이 아니다. 후대로 갈수록 호출되는 이야기를 하는 예술은 그럴 수밖에 없겠지. 이 같은 극단적인 비교가 아니더라도, 결국 세상에 태어난 많은 물품은 필요, 혹은 취향과 같은 욕망에 따라 생산되고, 세월이 흐를수록 쇠락하다가 없어진다. 정말 토지를 제외하고는 다 그렇다. 몇 주, 몇 달, 혹은 몇 년. 건축물처럼 몇십 년 혹은 몇백 년에 걸쳐 스러지는 대상도 있다. 세상에 만들어진 모든 것은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기능을 다하며 감가(減價)된다. 자산을 냉장고에 넣어둘 순 없나? 아, 상함을 미뤄주는 냉장고 말고, 생명이 불어나는 냉장고. 이런 게 세상에 존재한다고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자산을 갖고픈 이유는 명확하다. 내 몸을(시간을) 덜 투입하면서 돈을 벌어들일 수 있으니까.[7] 그러니까 사실상 자본을 갖고 싶은 이유는 - 우리 모두가 그것을 선망하는 이유는 – 자산이 지닌 저장성이다. 근로소득은 오늘을 치환해 내일을 구매하지만, 그를 통해 구매할 수 있는 시간이 한참 적은 데 반해 자본소득은 구매할 수 있는 시간이 훨씬 크다. <시간을 번다>는 말은 여기서 나온다. 그렇다면 왜 자본은 노동보다 그렇게나 월등한 시간-저장성을 갖게 된 걸까? 토지를, 건물을, 주식을 가진다는 건 왜 더 많은 축적을 가능하게 하고, 결국엔 대대손손 물려줄 자산이 되는가? 노동의 결과물이 자산이므로, 자산이 큰 저장력을 지니는 것은 지당한 일일까? 노동이 그렇게나 뒤떨어지는 저장력을 지닌 것은 온당한 일일까? 근로소득에는 노동자가 향후 미래의 노동을 구매할 수 있을 정도의 보수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존 러스킨의 주장은 그럼 어떻게 봐야 할까? [8]


모든 것이 유한한 세상에서 감가되지 않을 자산이란 어떤 것일까? 시간이 가도 건재한 대상이라는 게 존재하는가? 토지가 사람이 발 디딜 여건을 마련해주고, 예술이 당대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욕망을 구현하고, 또 다른 상상의 지평을 열어줬기 때문이라면, 시간이 지나도 가치가 깎이지 않는 자산이란 세상을 살(No buy, Yes live) 만한 환경으로 만드는지가 자산의 척도가 돼야 하지 않을까? 서울을 살(No buy, Yes live, I will say it again.) 만한 곳으로 만드는 자산은 건물과 녹지가 모세혈관처럼 얽혀있는 어느 동네 풍경, 크고 작은 고무 대야에 심긴 나팔꽃과 해바라기와 초록 고추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모짜르트 소나타 피아노 소리와, 책가방을 흔들며 뛰어가는 아이들의 몸싸움과 창 곳곳에 고르게 번지는 노란 햇빛이 아닐까. 고무 대야의 미학은 차치하고 만약 이 그림에 공감한다면, 한 사회와 개인이 몰락하는 것은 거시적 세계의 이상과 미시적 삶의 이상의 차이가 벌어질 때 아닐까.


Unsplash @wave wu





세상을 살 만하게 만드는 것은 다른 언어로 쉽게 환원되지 않는다. 한 세기를 건너온 회화와 천 년을 지켜온 문화유산처럼. 최소 한 세기를 풍미한 예술조차도 번역은 힘들다. 번역의 어려움은 곧 그만큼의 가치를 뜻한다. 감명을 일으키지만, 체계의 언어로 번역하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그를 그 자체로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그는 수많은 해석을 낳지만, 어떤 언어로 환원되지는 못한다. 그를 해석하려는 이들과 이에 매달린 노력만큼 세상에는 그를 향한 무수한 해석이 탄생하고, <그의 고유함>과 그에 따른 해석의 풍부함은 곧 그의 가치를 상징한다. 그리고 인생을 살 만하게 만드는 것은,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대부분 이처럼 치환될 수 없는 무언가다. 힘들 때 묵묵히 곁에 있어주는 친구나 품 안에서 응석을 부리는 아이, 미칠 듯이 불안에 떨 때 위로가 되어준 어느 작가의 문장, 어느 맑은 5월 플라타너스 나뭇잎 사이로 뺨을 데우는 햇빛은 누구도 화폐가치로 환산할 수 없을 것이다. 화폐가치로 바로 치환되는 아파트 가격은 이와는 대척점에 있다. 그래서 이곳은 사야 하지만, 살고 싶진 않은 곳이 되었는지 모른다. 오직 하나의 언어만 존재하는 곳이어서.


어쩌면 이 같은 맥락에서 노동의 예술성이 발휘되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노동은 결코 감가되지 않을 무형의 자산이 될지도 모른다.






자산은 곧 시간이 가도 가치를 유지하거나, 불린다는 환상이다. 하지만 자연은, 생물은 무엇도 보관하지 않는다. 그저 현재를 헌신할 뿐. 자연은 보존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낭비하지도 않지만, 기어코 욕심을 내 쟁여두지도 않는다. 썩지 않는 자연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지. (봉준호 감독의 영화 <미키17>에 등장한 크리퍼와 꼭 닮은 꼴인 물곰(Tidigrade)이 거의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영하 272도와 영상 150도에서도 살아남고, 인간이 사망하는 방사선의 1500배까지 견딘다니 이만하면 죽지 않고 썩지 않는 생물일지도.)[9] 썩지 않게 아주 오래.[10] 냉장고가 감자를 아무리 잘 보관한들, 기어코 싹이 나고 만다. 썩지 않는 자산은 너무 많은 당분으로 채워진 잼은 아닐까. 세상에 의미 있는 가치를 낳지 않아도 번식하는 아파트 가격처럼. 동형유전자로 저 자신의 위세를 떨치는 꿀버섯처럼. 언젠가 더는 사람도 살지 않는 곳에 대대손손 물려줄 자산으로 주상절리가 될 때까지 서울의 아파트는 살아남을까?


Unsplash @Haonan Zhang


솔직히 노동소득이 자본소득을 왜 따라잡지 못하는지는 도저히 모르겠다.[11] 이 글은 당초 질문에서 부질 없어졌지만, 그래도 산다는 건(No buy, Yes live) 조금 알 것 같다. 제 한 몸 소멸할 때까지 공들여 태운 시간이 삶이다. 그렇게 마르고 닳도록 쓰다 없어지는 게 유기물이 영생을 살아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누가 알아, 그렇게 산 삶이 후세에 전해지는 예술이 될지.






[1] 서울 아파트 중위가격을 언급하면, 지방을 배제한 서울 임금근로자의 중위소득을 언급하는 게 인지상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과연 그렇다. 하지만 알맞은 통계를 찾지 못했다. 평균 대신 중위값을 쓴 까닭은 상층부 데이터가 끼치는 영향의 막대함을 고려했다. 다 떠나서, 2012년에는 중위소득 가구가 구매 가능한 아파트가 100채 중 33채 수준이었으나, 2022년에는 6채로 줄어들었다. 10년 만에 엄청나게 급감한 것이다.

[2] 우리나라는 경제활동인구의 4분의 1이 자영업자로, 이는 OECD 국가의 2배다. 그런데 소득주도성장, 정확히는 노동자 중심의 임금주도성장은 5인 미만 사업장이 대다수인 자영업자들에게 큰 부담을 안겼다.

[3] 문재인 정부 동안 가계부채는 양극화가 심해졌다. 고소득층은 저축이 늘면서 빚이 줄어든 반면, 저소득층의 부채는 더 늘어났다.

[4] 국내총생산(GDP)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범위를 벗어나는 주제라 토론은 미뤄두겠다.

[5] 왜 부동산 가격은 경제를 성장시키지 못할까, 어피티, 2025. 3. 11

[6] 서울에 공실률 40%의 거리가 있다?, Youtube 채부심, 2025. 4. 21

[7] 자산을 득템(!)하는 데 수고롭지 않다는 말은 틀리다. 자산은 그야말로 세심한 관리의 영역이다. 가령 세입자의 요구에 귀 기울여야 하는 집주인을 떠올려보자. 그럼에도 확실히 실시간으로 많은 공과 시간을 투입해야 하는 노동과는 거리가 멀다.

[8] 19세기 활동한 영국의 사상가이자 예술비평가 존 러스킨은 그의 저서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존 러스킨, 곽계일 역, 아인북스, 2023) 에서 노동자의 보수에는 당장 그가 자신의 시간을 교환한 대가와 함께 시간이 흘러 ‘열매를 맺기 마련(117쪽)’인 노동 특성상 향후 결과물에서 오는 이익을 고려해 추가적인 보수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로써 노동자는 향후 또 다른 생산물을 만들기 위해 또 다른 노동자를 고용하는 자본가가 될 수 있다. 이는 부가 한 곳에 고이지 않고 순환되는 사회를 지향하는 그의 사상을 잘 보여준다.

[9]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 크리퍼의 비밀, Youtube 송박의 과학수다

[10] 아이유, 정규 4집 「팔레트」 ‘잼잼’ 중.

[11] 소심하게 적자면, 아마도 돈 복사를 만드는 인플레이션 탓이라고 추정된다. ‘노동 복사’는 없잖아.


*글을 쓰게 된 핵심단상: 노동소득은 왜 자본소득을 따라잡지 못하는가 → 자본에 비해 노동은 가치를 저장하지 않고 바로 치환됨으로써 미래 가치를 쟁여두지 못하기 때문이다 (손실율이 높은 노동소득) → 그래, 다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가 되자!

▷ track 1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1)아무도 노동을 안 하려고 한다 (2)모두가 노동을 외주화한다(과연 그 가치는 어떠할까) (3)실상 소득이 났다고 하자, 그래서 실제 무엇이 생산되었는가?
▷ track 2 모든 만물은 소멸하는 것이 이치(감가되지 않는 자산이란?) → 회사 회계에서 매입한 토지의 가치는 감가상각하지 않는가? → 냉장고가 생물을 아무리 잘 보관한들, 감자엔 싹이난다 = 썩지 않는 자산은 너무 많은 염분과 너무 많은 당분으로 이뤄진 불량식품 → 대대손손 내려줄 만한 자산이 존재하는가? → 우리는 얼마나 그 자신이 오래도록 무한하도록 노력해야 하는가? → 사실은 만물의 이치란 마르고 닳도록 쓰는 게 아닌가

*영향을 준 레퍼런스: 존 러스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곽계일 역, 아인북스, 2023


표제 이미지: Unsplash @Dmitry Dre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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