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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불불헛뛰

지고 지는 빚 안에서 사랑은 나아간다

버블과 꿈과 낙관과 부채에 부치며

by 궁금한 민지

*해당 글은 ‘자본주의 연속극(가제)’ 시리즈의 일부로 부정기 연재 예정입니다.



“나도 빚 한 번 져 보자!”
그의 외침에 내 가슴이 쿵쿵거렸다.


버블은 사후적으로만 판단’된’다. 우리는 누군가의 꿈을 검열하지 않는다. 꿈에 대한 수혈은 옳은 것, 지당한 것, 바람직한 것. 그의 대책 없는 꿈은 나의 피가 된다. 나의 꿈은 너의 욕망과 맞닿는다. 우리는 다 같은 혈족이다. 우리는 물거품이 될지도 모르는 희망을 낙관하도록 이곳에서 태어났다. 꿈은 실현되지 않는 한 현실이다.


사람들은 분수에 안 맞는 차와 집을 원하고, 넌 그걸 도와주지. 그들이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건 우리의 자비로운 손가락 덕분이야. 우리가 손을 떼면? 전 세계는 빠르게 공평해질 테지. 하지만 아무도 공평함 따위 좋아하지 않아. 돈이 생기기만 하면 좋아하지. 그러면서 순진한 척 돈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고 해. - 영화 <마진 콜>.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는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그녀가 사는 거주지 근처에 땅을 매입해 대저택을 짓고, 그녀가 파티에 참석하길 기다린다. 그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일을 벌인다. 그는 감당불가능한 꿈을 꾸기 시작하고, 방화자보다 앞서 번져가는 불길은 로맨스가 된다. 그것을 감당가능할 정도로 덜어내는 행위를 솔직함이라 부른다. 그리고 솔직한 로맨스는 없다. 오직 ‘사랑함’만이 솔직함으로 대체될 수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솔직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자본주의와 사랑을 연계한 글을 쓰고 싶었다. 정확히는 대출과 사랑을 연계한 글을. 대출은 미래의 현금을 당겨 지금을 일으키는 일. 채무자는 현재의 사랑을 일으킬 자원을 얻고, 채권자는 사랑으로 일군 밭에서 난 생산물을 가져갈 권리를 획득한다. (밭 자체가 될 수도 있다!) 대출이 있으면 사랑을 꿈꿀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머물 둥지를. 사랑이 하고 싶다. 현실과 어깨를 부딪히는 정당한 사랑을. 이제는 누군가와 함께 부딪히기로 하는 것 자체가 사랑임을 안다. 사랑은 우리가 세상에게 진 빚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나한테 뭐 받아둔 것 있어?는 사랑과 가장 먼 곳에서 온 말. 세상으로부터 받은 것을 되갚는 일은, 되갚기로 결심하는 일부터 무겁다. 자신이 채무자임을 인정해야 하므로. 채무자의 신분을 인식한 우리는 사랑을 시작한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핑계로 무장한 채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은 걸지도.



- 책임질 수 있는 꿈을 꿔야지, 하는 소리 들어봤어?
- 그게 무슨 말이야.
- 반대로 정말 그 일을 좋아한다면, 핑계를 대면서 내버려두지 않는다, 는.
- 자기계발 영상에서 종종 본 멘트 같다.
- 어떻게 생각해?
- 뭐가?
- 방금 말한 멘트들 말야.
- 글쎄, 맞는 말이긴 한데… 꿈을 꾸는 게 녹록지 않은 현실이니까.
- 틀렸어. 꿈을 꾸는 건 세상에서 제일 쉬워.
- 무슨 말이야?
- 꿈만큼 방치되는 것도 없잖아. 맨날 타령하고. 일부러 이루지 않는지도 몰라.


대출에는 천장이 있다. 그건 꿈을 꾼 값이니까. 꿈은 거저 꿀 수 없다. 시중에 흐르는 꿈과 현실의 간격은 중앙은행의 손짓에 따라 좁아졌다가 넓어진다. 혈액과 세포간 삼투압 수준, 혈압과 혈류량, 혈당에 따라 꿈과 현실은 결탁하고 또 멀어진다. 혈액에 유동성이 높아진다. 인간은 눈앞의 현실에 따라 꿈을 꾼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신고가에 눈도 벌게진다. 버블은 꿈과 현실이 엉겨붙어 한몸이 될 때까지, 더는 이자를 갚을 수 없어 숨이 멎어버릴 때까지 계속된다. 그래도 괜찮다. 아직은 뛸 수 있으니까.






끝이 정해진 꿈과 끝이 정해지지 않은 꿈. 우리는 그것을 채권과 주식이라 부른다. 한도가 정해져 있는 꿈은 도달해야만 하는 목표를 제시한다. 한도가 없는 꿈은 도달하고 싶은 목표를 제시한다. 채권에 쓰인 액면가는 정부와 기업의 야심에 거는 신뢰의 값. 주식창의 붉고 푸른 파도는 희망을 품었다가 이내 절망하는 사람들의 물결. 꿈은 실현되든 되지 않든 오만하다. 높은 곳에 이미 앉은 제 자신만을 떠올리면서.


희망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을 바꾸겠다고 완전히 새롭고 전혀 다른 누군가가 돼야겠다고 결심한다. 자신을 변화시키겠다는 이 욕망은 우리를 다시 희망을 채운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에 매달리는 이유는 자신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이 희망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이 운명의 주인이고, 꿈꾸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성으로 감정을 통제해야 한다는 믿음이 수백 년간 지속된 이유다. 하지만 그 통설은 틀렸다. - 마크 맨슨 <희망 버리기 기술>, 한재호 역, 갤리온 (p.53)


부동산이 천사 네티의 부푼 풍선처럼 창공을 향해 날아간다. 1991년 일본 도쿄를 배경으로 한 KBS 다큐 버블 경제 영상을 본다. A 기업에서 금리 8%에 7억 엔을 빌리려던 고지마 씨. B 은행으로 간다. B 은행은 손사래를 치며, 7.5% 이자율로 8억 엔을 빌려주겠다고 한다. C 은행은 어떨까. 7% 이자율로 10억 엔을 건다. 은행들은 고지마 씨의 현금 장사를 믿는다. 그의 수완을 믿는다. 그의 꿈이 이뤄질 거라 믿는다. 이 상황이 계속될 거라 믿는다.



거품에 껍질을 칠해, 아주 단단하게.
나는 낙관적인 꿈을 꾼다.



책임과 채권은 비슷하다. 헌신을 호소하니까. 기꺼이 헌신할 의무와 기어이 갚아내기로 한 약속에 주리를 틀기. 나는 아주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고, 그러니까 채권자를 만나도 자신있을 거야. 당당하게 걷다가, 그가 앞지르기 전에 그 값을 다 토해버리자.


사랑은 기어이 빚을 지되, 약속된 어음은 잊고 별개의 사랑을 퍼붓는 것이다. 그로 인해 내가 당신의 기댈 곳이 될 수 있고, 당신이 내 기댈 곳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의존을 믿음, 각자도생의 반대. 서로가 있음으로써 생이 성립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 우리는 서로에게 빚을 진다. 은행에도 빚을 진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감당가능하다고 믿는 꿈을 꾼다. 현재와 미래를 뒤섞어 버린다. 현재만을 남긴 사랑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지. 나는 그와의 한 달 뒤 여름휴가를, 일주일 뒤 우리가 함께 볼 공연을, 조금 이따 들려줄 목소리를 기대한다. 나는 기약하지 않는 사랑에 대해 알지 못한다. 무엇보다 나는 절대 알지 못한다. 그 기약이 언제든 저버릴 수 있는 것임을.



빚은 미래를 당겨와 현재를 만든다. 그럼 오늘은 어떻게 되나? 저당 잡힌 미래가 오늘이 될 때 그는 어떤 얼굴이 되나. 실의 끝을 기정사실로 잡아두고 쑥 당긴다. 현재와 미래가 엎치락하며 올이 엉킨다. 인생에 굴곡이 생긴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일상에 구김살이 가득해지는 것. 울렁이는 일상을 받아들이고 어딘가 올이 나간 우리의 세계에 헌신하는 것. 주름살이 가득해질지언정.


사랑은 무람없이 빚지고, 마구 퍼준다. 내심 내일을 기약하면서, 내일이 또 내일을 낳을 거라 믿으며. 매일 희비가 담긴 거래가가 오가도 괜찮다. 언젠가의 액면가가 있으니까. 지금의 고통은 일시적인 것일 뿐, 그럴 듯 ‘언젠가’가 올 것이다. 다만 그때까지 끊임없이 조정할 뿐. – 채무를 조정하지 않는, 그런 사랑이 가능한가? 그것은 신과의 관계에서만 가능한 일. 나는 인간끼리의 그런 사랑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부모 자식도. 무엇보다 부모는 자식의 번성을, 자식은 부모의 보존을 바란다. 그들은 상대가 훼손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채무란 상대에 대해 꿈꾼 대가. 채무를 조정하지 않는 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린 서로에게 모두 빚지고 있으니까.



지고 지는 빚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공산주의가 끼어들 틈이 없다, 사랑엔.



사랑은 두 번 시작된다. 더는 감당할 수 없다고 시인할 때.
버블도 시작된다. 이대로는 지속불가능함을 느끼며 무너질 때.


당신들은 무리하고 있습니다. 중앙은행의 금리 인상은 말한다.
우리는 무리하고 있습니다. 로맨스의 1막이 끝날 때 말한다.


빚을 탕감하고, 이자율이 높아진다.
미래의 뷰는 낮아지고, 꿈꾸는 값은 비싸진다.


너와 나의 사랑은 다시 계속된다.
같은 꿈을 향한 공동의 투자자이자 서로에 대한 채무자로서.
내가 너에게 주고, 너가 나에게 주고, 미래를 낙관할 때까지.







Youtube, "공짜 점심은 없다" 1991년 일본 버블 경제가 처참히 꺼지다! 욕망이 낳고 두려움이 키운 부의 거품

제임스 홀리스, 「사랑의 조건」, 김현철 역, 더퀘스트


표제 이미지 : OC Gonzalez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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