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블코인은 마케팅에 성공할까?
*해당 글은 ‘자본주의 연속극(가제)’ 시리즈의 일부로 부정기 연재 중입니다.
태초에 온화한 성격의 흡혈귀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피를 온 세상에 선사하였다. 피가 필요한 이들은 자신의 피를 만드는 대신 그의 피를 자신의 피로 삼았다. 믿을 만한 피를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만든 재화와 서비스를 팔면서 그의 피를 흡수하였다. 한동안은 괜찮았다. 흡혈귀는 자신의 시나리오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는 세계를 먹여 살릴 피를 만드느라 다른 일을 할 수 없었다. 피를 되갚는 정맥과 개폐문인 판막 힘이 점차 떨어졌다. 그는 그럴수록 피를 생산하는 데 집중했다. 동맥이 콸콸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흡혈귀를 쳐다봤다. 사람들은 쏟아지는 피 안에서 손쓸 틈도, 손쓸 힘도 없이 그의 피를 받아냈다. 흡혈귀의 정맥과 판막은 형편없었다. 그는 견디는 힘을 상실했고, 다른 이들의 수혈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흡혈귀가 생산한 피를 걸러내기 바빴던 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 피를 다 받다가 살갗이 찢어지겠어! 공포에 흔들리는 눈빛들. 그때 흡혈귀의 손에는 도금한 ____가 들려 있었다.
페트로 달러, 브레튼우즈.
어떤 사실을 안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달러가 기축통화임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은 몰랐다. 올봄 다녀온 프랑스 여행. 유로 환율은 1500원을 넘었다. 여행을 가겠다는 이는 그에 연연하지 않는다. 몰랐다. 원유로 환율은 실상 유로달러 나누기 원달러 환율임을. 기축통화는 그를 중심으로 모든 교환비를 구성한다. 이를 인지한 지 얼마 안 돼 금태환이라는 단어를 접했다. 금본위제 폐지를 누가 몰라. 나도 아는 세계의 기본 규칙이 있다니! 안도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페트로 달러. ‘돈’은 달러라는 무형의 규칙에 대한 신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물질세계에서 거저 얻는 믿음은 없다. 달러를 향한 믿음을 신뢰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석유가 있었다. 그러나 신뢰의 근거였던 석유는 지난해 달러와의 고리가 느슨해졌다. 1974년 이후 50년 간 지속된 페트로 달러 협정이 시효를 다했기 때문. 그토록 달러가 힘이 센 이유는, 세계의 모든 경제활동이 석유를 에너지원으로 굴러갔기 때문이다. 서른일곱에 이걸 알았네.
머릿속에 단어가 둥둥 떠다닌다. 돈은 가장 많은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다. ‘돈을 번다’는 것은 결국 내 언어를 이해해 달라는 호소다. 돈을 버는 일에는 마케팅이 필요하다. 돈을 만드는 일도 그런가? 그럴지도. 끊임없는 코인 소환에 나도 눈이 뜨였으니까. 시작은 비트코인이었다. ‘디지털 금’으로 불리는 비트코인은 2008년 리먼 브라더스 파산 사태에 등장했다. 집 없는 사람도 소액의 이자를 지불하면 끝내 집을 소유할 수 있다며 대출을 내어준 은행. 월가는 이런 모기지론을 담보로 한 파생상품을 끝없이 만들어냈다. 좀, 많이, 과하게. 그때 사토시 나카모토가 등장했다. 영악한 금융세력이 제 잇속을 불린 참상을 지적, 근원에는 정부가 무지성으로 찍어낸 돈과 이를 이용한 금융세력이 있음을 지적한다. 그렇게 사토시는 채굴량에 한계치가 있는 디지털 자산, 비트코인을 만들어냈다. 햇빛, 물, 바람처럼 중앙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스테이블코인으로 돌아오자. ‘안정적인 코인’이라니. 돈 앞에 형용사를 붙인다니 웃기다. 망하지 않는 미국, 같은 설명이랄까. 고유명사 앞에 형용사를 붙인다는 건 그토록 안전성을 강조하고 싶었다는 의미처럼 들린다. 평안한 죽음처럼. 달러는 미국 부채가 5경 원을 찍는 마당에도 ‘안전 자산’으로 불린다. 대체할 만한 게 있어야 말이지. 미국은 미국 법이 다스리는 역외에서 운영되던 테더의 가능성을 넘봤다. 법정화폐가 기능을 잃은 외국에서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 환경 위에 달러를 거래하는 용도로 쓰이는 테더의 코인을. 미국은 제지하는 대신, 포섭한다. 스테이블 코인을 발행하고 싶다면 달러를 사 거나 미국 국채를 사 들이라! ‘지니어스 법안’의 의결이다. 미국 국채의 수요를 만드는 것이다. 자, 여기서 이해가 안 가는 지점. 미국이 빚을 존나 많이 져서 미국 화폐인 달러에 의구심을 갖는 상황인데, 의심받는 화폐인 달러를 코인에 연동시킨다? 이게 웬 어불성설이람.
하지만 깨닫는다.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뭘 할 수 있을까? 미국의 달러보다 믿음직한 화폐가 있다고 들어봤어? 아니. 그 와중에 디지털 화폐의 배후를 달러가 차지한다면? 그 생태계를 만든 이, 진입하려는 이 모두 달러를 사야 한다면? 모두가 직간접적으로 달러에 기대는 판을 짠다. 그제야 알았다. 스테이블코인은 달러와 연동돼서 스테이블코인이 아니라, 미국이 전 세계에 외치는 찐한 소망이라는 것을. 최고로 스테이블하게 돈 벌고 싶다는 외침이라는 것을.
흡혈귀는 도금한 _____을 내밀었다. 사람들의 동공이 확장됐다. 사람들은 _____의 노르스름하게 찬란한 빛을 보았다. 사람들은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그의 피를 공급받기 위해서라면 팔을 걷어야 했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서로의 눈을 맞추고 깜빡이는 것만으로 피를 보낼 수 있었다. 깜빡. 그것의 빛이 번쩍였다. 사람들은 더는 소매를 걷지 않았고, 마주 봤다. 그럴수록 사람들의 눈은 형형해졌고, 모두가 같은 눈을 하게 되었다. 말라붙은 피바다를 누군가 밀대로 밀었다. 정맥 너머로 미끄러지는 핏소리가 맑았다.
마케팅에 저항하거나 굴복하거나. 지금 가장 첨예한 마케팅의 대상은 암호화폐, 그중에서도 스테이블 코인이다. 나는 고민한다. 하루는 뉴스를 보고, 하루는 가상자산 거래소를 깐다. 며칠이 지난다. 암호화폐 전문가들의 콘텐츠를 보고, 국제 정세를 들으면서 크립토 대통령의 향방을 보려고 애쓴다. 나에게는 국적이 없다. 그저 새 나가는 주머니를 막고 싶은 불안만 발작처럼 존재한다. 나는 기체다. 국적 없이 표류하는 화폐를 쫓는 기체. 적어도 나한테 스테이블코인의 마케팅은 성공한 것 같다. 녹아내리는 현금을 스테이블하게 방어해 줄 대상으로 보이기 시작했으니.
표제 이미지: unsplash @Trax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