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선택이라는 새파란 거짓말
사람은 왜 타인의 서글픔을 건드릴까. 서른 넘어 옆 사람에게 ‘너도 이거 먹고 싶지’ 묻는 일은 드물다. 사례를 바꾸면 많다. ‘아이 낳고 싶지 않아요?’ 나는 일관되게 말해왔다. 저도 낳고 싶은데요. ‘지나가는 아이 보면 너무 예쁘고 그렇지 않아요?’ 나는 변주해서 말했다. ‘딱히 그렇진 않은데요.’ 뒷말을 삼키며 호르몬의 마지막 발작을 느낀다. 이러니 실라 헤티의 <마더 후드>를 읽을 수밖에.
누군가는 부모의 지원을 받는다. 누군가는 십 년 동안 일하며 모은 몇 천만 원에 기댄다. 양쪽 다 직업을 구한다. 정비 시간이 길어진다. 누군가는 한쪽이 일하지 않는 것을 기정사실화한다. 가부장 신화의 끝자락에 서서 서로를 부둥켜안는다. 누군가는 척박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경제력이 지켜줄 목소리를 붙든다. 상대가 한 사람 몫 이상 해 주면 좋겠다고 기대한다. 또는 자신만을 믿는다. 믿는 구석이 나라는 건, 나를 믿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언젠가 가까운 선배가 한 말을 떠올린다. ‘에디터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 자체가 그렇죠. 돈이 뒷단에 있는 거예요.’ 에디터는 돈이 얼마나 풍요로운 것인지 최전선에서 접하는 직업이다. 유명 양주 브랜드의 새로운 위스키, 기상천외한 디스플레이로 이목을 끄는 아이웨어 브랜드의 디저트 브랜드 런칭 행사, 수 억 원을 호가하는 작품들이 즐비한 아트페어. 행사별로 자본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목을 끌고 매출을 일으키는 현장에 출몰한다. 십 년째 콘텐츠의 제작비는 상승하지 않았을지라도.
각자가 판단하는 힘듦은 어디서 올까. K가 말한다. 세상살이가 얼마나 힘든데. 나에게도 힘든 때가 있었다. 월급을 100만 원 올려주겠다는 말에 벙벙하게 서 있었던 압구정로데오의 어느 길. 저축액이 30만 원 남짓이던 시절, 그 달 벌어 그 달 월세를 냈던 때, 아빠한테 ‘이번 달 월세 좀 보내줄 수 있을까’ 했던 날. 혹은 대학교 졸업 이전까지 올라가기. 월 60만 원으로 알고 시작한 인턴비를 30만 원 밖에 못 주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느꼈던 분노와 교수실을 찾았던 기억.
가난을 생각하면 돌아가는 풍경이 있다. 신사동의 한 가게 매니저로 일하던 시절, 당시 살던 금호동의 2층 주택. 버스비를 아낄 요량으로 구한 16만 원짜리 중고 자전거. 자전거 세울 공간이 마땅치 않던 집. 중세시대 탑을 떠올리게 하는 침침한 내부. 조명 하나 없이 시멘트를 너절하게 바른 폭이 불규칙한 계단. 자전거를 꽉 붙잡은 채 올라갔던 기억. 발 디딜 폭이 여의치 않은 계단을 십 킬로 넘는 자전거와 우르르 넘어지지 않으려고 뱃심을 팍 주며 올랐더랬다.
가난을 생각하면 언제나 저 기억으로 돌아간다. 그게 가난이야? 응, 나한테는 그래. 힘듦을 증명하라! 그 정도 기억이라면 대단치 않다고 말할 테지. 마음에 수증기가 우글부글하며 목구멍에 화딱지가 눌어붙는다. 나는 내가 딱 모르는 만큼만 안다. 돈이 나를 지켜주기도, 혹은 나의 중요한 것들을 두고 내몰리게도 한다는 정도로만 안다. 너가 안다고? 자신 눈높이에 맞지 않는 사람을 대화 상대로 삼지 마시오.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대상과 왜 떠들고 있나? 누군가를 가르치고 싶다면 자신의 시야각이 얼마나 넓은 지부터 확인할 것.
돈 많은 남자를 만나면 좋잖아, 라는 말은 한 데 자고 싶니?라는 질문처럼 들린다. 아니오, 를 기어코 길어 올리려는 외침. 너 배고프고 싶니? 아니오. 나는 따뜻한 방바닥이 좋다. 식욕도 출중하다. 내가 자주 하는 탄식은 이렇게 잘 먹는 짐승을 어떻게 먹여 살릴지다. 흰쌀밥에 깍두기, 잘 풀어낸 구수한 된장국이 쑥쑥 들어간다. 나는 여지껏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채소를 사서 된장국을 끓여낸다. 밥 큰 술을 입에 넣는다. 여기서 더 알아야 하는 게 뭐지? 나는 돈을 벌어 한 개체를 먹여 살리는 회전을 알고 있다.
돈 많으면 그만이면, 떠오르는 한 사람. 세 번의 데이트를 떠올린다. 그는 두 번째 데이트 때 내게 물었다. 그거 써서 돈 좀 받아요? 나는 홍상수 영화의 버럭하는 김민희가 되었다. 그만한 꽁트가 없었다. 그는 무엇이 무례인지 몰랐다. 그의 세계에서 그 질문은 여전히 무례가 아닐 것이다. 상대가 하는 일의 내막을 들여다보기 전에 대가부터 묻기. 나는 편협하게 확신한다. 그의 세계는 빈곤해. 세상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오로지 돈이라니. 사람의 동기에 대한 상상력이 그토록 허약하다니.
다문화는 쉽지 않다. 다문화가 가능하려면, 상대를 존중해야 한다. 그게 왜 안 돼? 대부분은 맞출 수 있던데. 조금씩 화가 난다. 속에 무언가 튀어 오른다. 나는 오로지 하나의 기준만 있었어. 기 센 여자는 안 만나. 그래! 나는 정확히 문다. 기 센 여자를 안 만나는 게 당신의 기준이겠지. 나는 원고료부터 묻는 사람과는 못 만난다고! 나는 그의 기준을 존중한다. 그는 왜 내 기준을 존중하지 않나?
형편이 넉넉하면 좋지. 백번 공감하는 말은 하등 쓸데없는 말.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처럼 실패한 기획도 없다. 관심 가는 대상을 향해 움직이는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왜 그렇게 살아? 반문하기. 난 이렇게 생겨 먹었어, 너도 그렇잖아! 물론 나도, 그도 다르게 살 수 있다. 인생에서 기약 없이 찾아오는 [선택해야 하는 순간을 맞닥뜨릴 때]. 당장 먹고 살 게 없다면 선택지는 생긴다. 만들어진다. 그때는 정말 선택해야만 한다. 그 이전까지 해오던 결정은 선택이 아니다.
’다른 수가 없다 아닙니꺼.’[1]
사람이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하는 양 몰아가는 갑갑함. 각자의 세계에서 상대를 바라보면 판단은 신속해진다. 어쩜 저렇게 미련할 수가! 어쩜 저렇게 부도덕할 수가! 세상에서 가장 종류 나쁜 양판단이 맞닿는다. 무지에 대한 판단과 도덕적 판단. 그는 생존을 모른다는 눈치다. 그의 눈에 비친 내 행보는 어리석다. 내게는 아니다. 나는 아직까지 생긴 대로 살고 있기 때문에. ‘생긴 대로’란 여태껏 내가 부여받은 기질과 스스로 채워온 살아가는 역량대로 살고 있다는 뜻이다.
사람은 저가 부여받은 기질을 바탕으로 시간을 살아내며 삶에 대한 자세를 빚고 역량을 쌓는다. 삶의 무수한 사건 속에서 무언가는 제 것으로 취하고, 무언가는 저 밖으로 밀어내며 자신을 만들어간다. 『파칭코』의 선자는 말한다. 다른 수가 없다 아닙니꺼. 먹을 것이 말라가는 척박한 환경에서 김치를 만들어 팔기로 한 선자와 경희. 차마 장사만큼은 못하겠는 경희는 생존을 모르는 걸까? 아니다. 흔히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먹고살려는 ‘어쩔 수가 없는 일’ 앞에서의 선택이 그를 드러낸다.
왜 사람은 사람을 내버려 두지 못할까? 왜 자신처럼 사고하고 행동하길 바랄까? 내 인생행로에 동의해주지 않으면 불안해서? 눈앞의 상대가 탄탄대로를 밟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이 안타까워서? 나는 선의로 위장한 선의를 모른다. 사람은 자신만의 외길을 간다. 인생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인생의 선택이라고 일컫는 일들은 대개는 그 사람 안에 내재된, 예정된 일. 진짜 선택해야 하는 순간은, 더는 생긴 대로 살 수 없을 때다. 그 순간은 누구보다 본인이 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가 더는 생긴 대로 살 수 없는 순간을 맞닥뜨리길 기다리나?
나는 아직까지 생긴 대로 살고 있다.
[1] 이민진 『파칭코』, 신승미 옮김, 인플루엔셜, 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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