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기대해서, 앞으로는 널 믿을게

영화 <그래비티>와 그림책 <하늘을 나는 사자>

by 궁금한 민지


중력을 감당한다는 것


지난 토요일에는 재개봉한 <그래비티>를 재관람했다. 5년 전과 지금의 내가 변한 탓일까. 처음 봤을 때보다도 좋았다. 자유로이 유영하는 우주로 떠났지만 축축한 흙과 끈적이는 바람, 정체 모를 벌레들과 세찬 물살이 기다리는 지구로 돌아온 여자. 내게 ‘그래비티(중력)’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에 대한 거대한 은유로 다가왔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일은 중력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과 닮은 꼴 아닐까. 물체와 지면 사이의 힘은 멀수록 약해지고, 가까울수록 강해진다. 사람으로 치면 자신과 타인 사이의 긴장감을 견디는 것. 이 같은 힘의 작용을 인지할 때 사람은 겸허해진다.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수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오만했는가. 사람 간의 인력(引力)에 질려 도망가거나, 내키는 대로 굴면서.




난 네가 생각한 그런 사자가 아닌걸


무심하게 던지는 문장으로 한 대 맞는 기분을 주는 사노 요코 할머니의 그림책을 읽는다. <하늘을 나는 사자>에는 태양처럼 눈부신 갈기를 가진 사자와 고양이 떼가 등장한다. 포효하는 소리가 우렁차고, 황금빛 털을 가진 사자. 고양이들은 사자의 늠름함에 찬사를 보낸다. 사자는 매일 자신을 보러 오는 고양이들을 위해 금빛 갈기를 휘날리며 하늘을 향해 뛰어오른다.

사자에게는 남모를 취미가 있다. “있지, 나는 낮잠을 자는 게 취미야,” 고양이들은 까르르 뒤집어진다. “농담도 잘하잖아?” 수줍은 고백은 한바탕 폭소로 돌아온다. 사자는 멋쩍은 듯 웃는다. 컴컴한 집에 돌아와 지친 몸을 누인다. “아아, 힘들다.” 사자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진다. 고양이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그는 자신을 혹사하며 점프를 계속한다.




기대와 신뢰는 다르게 쓰인다


기대는 서로를 지치게 한다. 기대를 거는 쪽은 상대가 자신의 바람에 부응할 것이라 예상하며 욕망을 상대에게 투영한다. 기대를 받는 쪽은 상대의 환상을 깨뜨리지 않고자 자신을 채찍질한다. 그 지점에서 비극은 시작된다. 한껏 몸집만 부푼 환상은 모두를 파괴한다. 한쪽은 한낱 신기루에 불과한 환상을 직면하고, 다른 한쪽은 자신의 부족함을 경멸한다.

기대하는 이는 상대에게서 나약한 모습을 보기를 거부한다. 기대를 받는 쪽은 상대의 환상을 몸이 고꾸라지도록 짊어진다. 상황이 파국을 맞은 뒤 둘은 고백한다. 나는 이런 모습이지만, 너만큼은 빛나줬으면 했어. 네 환상은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높고 찬란했어. 기대는 끊어지기 직전의 고무줄과 같다. 찢어지거나, 한쪽으로 쏠리면서 튕겨 나간다.

신뢰는 다르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타인을 존재 그대로 받아들임에서 시작한다. 상대의 욕망과 이상, 가치관이나 생활 방식 등을 고스란히 수용해야 가능하다. 서로의 민낯을 인정하는 것은 우주에서 갓 추락한 산드라 블록이 물가의 흙을 딛고 일어서는 것처럼 딱 그만큼의 용기를 요구한다. 믿음은 나와 네가 바로 서도록 지탱해준다.




이제 환상을 거둘 시간


나는 친밀함을 빌미 삼아 너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한편, 이해를 들먹이며 내 환상을 주입해 온 건 아닐까. 자신은 속이고, 네게는 최면을 걸면서. 아름다운 환영 속에서 우리 둘은 허우적거렸을 테지. 무중력의 우주에서 팔다리를 휘저으면서 자유롭다고 착각하면서.


영화의 막이 내리면 투영된 상은 증발하고 텅 빈 스크린이 드러난다. 너는 말한다. 네 이상 속의 나는 없어. 알몸을 드러낸 상대 앞에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미안해. 네 앞에서 어깨에 힘을 준 채 으스대던 환상 때문에 힘들었지. 보잘것없는 날 마주하기 두려워서 널 근사하게 꾸며냈어. 널 오해하고 싶었던 나의 나약함을 인정할게.

무엇도 속박하지 않는 우주는 사실 공허하다. 중력이 있는 지구는, 딱 그만큼의 자유를 내게 허락한다. 그리고 역시 아득한 우주보다는, 곧 죽어도 발 디딜 수 있는 네 곁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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