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사랑할 때 (2014)
오리 싫어? 딴 데 가? 얼른 먹어.
군산시의 한 오리백숙집.
태일(황정민)이 큼지막한 오리고기를 호정(한혜진)의 앞접시에 덜어줍니다. 하지만 호정의 표정은 왠지 심란해 보입니다. 그녀와 마주 앉은 남자 태일이 불한당 같은 사채업자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호정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태일이 상주노릇까지 해주며 물심양면으로 그녀를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큰일 치렀으니 몸보신이라도 하라며 오리백숙집까지 데려와 그녀 앞에 큼지막한 오리고기를 건네주고 앉았는 태일. 그의 무한한 호의를 받아줄지 말지 잠시동안 고민하던 호정은 마지못한 듯 젓가락을 드나 싶더니 웬걸, 손으로 고기를 들고 뜯어먹기 시작합니다. 이제야 비로소 호정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태일도 이제야 비로소 흐뭇한 미소로 그녀를 바라봅니다.
영화 <남자가 사랑할 때>(감독 한동욱)에는 거친 사나이조차 펑펑 울리고 마는 눈물의 식탁신이 나옵니다. 죽을병에 걸린 주인공 태일이 군산을 떠나기 전, 태일은 집에서 라면을 먹으며 아버지에게 진심 어린 고백을 합니다.
태일은 사실 한때 결혼할 뻔한 여자가 있었다고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털어놓습니다. 그녀는 얼굴도 예쁘고, 무엇보다도 지극히 효녀였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몸져누워 있을 때 오랫동안 병시중을 할 정도로 헌신적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자신까지 병시중을 부탁할 수는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태일은 그녀를 위해 돈이라도 많이 주고 떠나려고 했지만 현실은 여의치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아버지에게 부탁 하나를 남깁니다. 자신이 없더라도 그 여자를 만나면 잘해 달라고, 아버지가 되어달라고 부탁하죠. 마지막으로, 그녀가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임을 밝히며,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달라는 말과 함께 아버지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합니다. 연로하신 아버지보다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떠나야 하는 불효 막심한 상황에서도 태일은 아버지에게 그녀를 만나면 잘해줄 것을 부탁한 것이죠.
태일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여자 주호정.
그녀와 매일 밥이라도 먹고 싶어서 태일이 손수 만든 만남의 계약서에는 모두 60개의 빈칸이 그려져 있었는데요, 아마도 태일은 남자가 여자에게 60번이나 밥을 사주면 굳게 닫혀있던 마음의 문도 결국은 열릴 거라고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각서를 쓰면서 태일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태일이 세상에서 사라진 후에도, 군산 시내에서 계속 살아가게 될 호정이 그와 함께 갔었던 수많은 식당 앞을 지나칠 때마다, 그와 함께 밥 먹었던 기억을 떠올릴 수도 있다는 것이죠. 사람은 이미 떠나서 없고 사랑도 이제 끝이 났지만 한 남자와 함께 밥을 먹었던 그 기억은 언제 어느 식당 앞에서라도 문득 떠올라 그녀를 슬프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