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2018)
난 내가 먹고 싶을 때 항상 귤을 먹을 수 있어.
젊은이들로 넘쳐나는 홍대 골목의 한 포차.
요즘 팬터마임을 배운다는 해미(전종서)가 종수(유아인) 앞에서 귤을 까먹고 있습니다. 종수도 인정할 만큼 해미의 팬터마임이 제법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는 그녀의 생각 자체가 남다르기 때문입니다.
해미는 종수 앞에서 귤을 까먹는 팬터마임을 하며 의미심장한 말을 건넵니다. "여기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돼, " 라며, 그녀는 종수에게 상상력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귤이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가 아니라, 그것을 진심으로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하죠. 그렇게 하면 입에 침이 고이고, 마치 실제로 맛있는 귤을 먹고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대사는 단순한 팬터마임을 넘어서, 현실과 상상, 욕망의 경계를 흐리는 영화의 주제를 잘 보여줍니다. 해미의 말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갈망하는 인간의 본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는 없는 귤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4차원 캐릭터 해미. 하지만 그녀의 실제 삶은 좀 고달프기만 합니다. 햇빛도 잘 들지 않는 빌라의 작은 방에 살고 있는 해미는 내레이터 모델로 하루종일 춤을 추며 일하지만 현실은 카드값에 허덕이며 빚만 늘어갈 만큼 팍팍합니다. 하지만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해미는 그렇게 힘들게 모은 돈으로 아프리카 여행을 떠나려고 하는데요, 그 이유가 무척이나 특이합니다.
해미는 종수에게 자신이 아프리카로 떠나려 한다는 이야기를 하며, 아프리카 칼리하리 사막에 사는 부시맨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녀는 부시맨들에게 두 가지 종류의 굶주림이 있다고 설명하죠. 하나는 단순히 배가 고픈 '리틀 헝거'이고, 다른 하나는 삶의 의미에 굶주린 '그레이트 헝거'입니다. 해미는 단순히 배고픔을 느끼는 사람보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하는 사람이 진짜로 굶주린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레이트 헝거를 만나기 위해 아프리카로 떠나려 한다고 하죠. 이 장면에서 해미의 대사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그녀가 삶의 깊은 의미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레이트 헝거'라는 표현은 영화 속에서 삶의 본질을 탐구하려는 인간의 갈망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며, 해미의 캐릭터가 지닌 철학적 깊이를 잘 보여줍니다.
종수 입장에선 그런 해미가 쉽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해미가 제법 멋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삶의 의미를 찾아 먼 여행을 떠나려는 해미야말로 진짜 그레이트 헝거처럼 보이기도 했으니까 말이죠. 하지만 해미가 아프리카에서 만난 사람은 그레이트 헝거가 아니라 미스터리 한 남자 벤(스티븐 연)이었습니다.
내가 서울에서 제일 맛있는 곱창집 알고 있는데, 갈래?
서울시내에서 맛집으로 유명한 곱창집.
아프리카 여행에서 돌아온 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곱창 맛집으로 해미와 종수를 데려갑니다. 곱창과 함께 마신 술에 살짝 취한 해미가 아프리카 칼리하리 사막에서의 선셋 투어 후일담을 늘어놓는 동안 벤은 넉넉한 미소를 지은 채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습니다.
해미는 칼리하리 사막의 노을을 바라보며 느꼈던 감정을 고백합니다. 처음에는 주황색이었던 하늘이 점점 피처럼 붉어지고, 그 후에는 보라색과 남색으로 물들다가, 마침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노을을 보면서 그녀는 갑자기 눈물이 났다고 말합니다. 그 순간, 그녀는 마치 세상의 끝에 다다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자신도 그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고백합니다. 죽음이 두려워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그녀의 감정은, 존재 자체를 지우고 싶다는 깊은 절망과 공허함을 드러냅니다. 해미의 이 대사는 그녀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상실감과 삶의 무게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며, 영화의 분위기를 한층 더 무겁고 서정적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벤의 어딘가 미스터리한 반응을 보입니다. 벤은 겉모습에서 풍기는 지적인 인상과는 달리 자유분방한 자아의 소유자인 해미를 만날 만큼 개방적인 면도 있어 보이고, 곱창집에서 소주를 마실만큼 소탈한 면도 있어 보이고, 자신의 포르셰 대신 종수의 낡은 트럭을 타고 올 정도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매너도 몸에 배어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 사막의 노을을 보며 느꼈던 쓸쓸함을 토로하며 서럽게 우는 해미를 보자 벤이 보인 반응은 슬픔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눈물에 대한 신기함이었습니다.
벤은 해미와 종수에게 사람들의 눈물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신은 한 번도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해미가 이유를 묻자, 그는 어렸을 때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기억 속에서는 눈물을 흘린 경험이 없다고 설명합니다. 해미는 이를 신기하게 여기며 놀라워하지만, 종수는 그가 여전히 슬픔을 느낄 수는 있지 않냐고 묻습니다. 벤은 그럴지도 모르지만, 눈물이라는 증거가 없으니 그것이 슬픔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다고 답합니다. 벤의 이 대사는 그의 감정적 무감각과 거리감을 드러내며, 인물의 미스터리한 면모를 더욱 부각합니다. 감정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벤의 태도는 그를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로 만들며, 영화 속에서 긴장감을 자아내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살면서 눈물을 흘린 기억이 없다는 신기한 남자 벤. 슬픔이란 감정을 전혀 모르는 것 같은 벤을 보자 종수는 문득 그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가 궁금해졌습니다. 하지만 종수의 질문에 대한 벤의 대답은 간단히 말해 '그냥 논다'는 다소 어이없는 말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한 벤의 얘기를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벤이 하는 일은 '돈을 갖고 노는 것'을 말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돈을 이용해서 사람을 갖고 노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 일도 안 하고 그냥 놀아도 될 만큼 돈이 많은 사람들에게만 노는 것과 일하는 것이 구분이 없는 법이니까 말이죠.
유통회사의 아르바이트생으로 등골 빠지도록 힘들게 일을 해야만 푼돈이라도 벌 수 있는 종수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 소위 말하는 '금수저'라 불리는 사람이 바로 벤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면 벤이 지금까지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돈만 많으면 거의 모든 걸 살 수 있고, 거의 모든 걸 할 수 있는 세상에서, 금수저로 태어난 벤을 슬프게 하는 일 따위는 거의 없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영화 <버닝>(감독 이창동)은 영화 초반 해미를 통해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삶의 의미에 굶주린 그레이트 헝거가 되고 싶다던 해미. 하지만 정작 그녀의 실상은 카드빚 때문에 가족과도 연을 끊은 상태도, 어디 여행 갈 돈 한 푼조차 없는, 돈에 굶주린 리틀 헝거처럼 보이기만 합니다. 한편, 돈에 굶주릴 일이라곤 전혀 없는 부유한 금수저 벤은 삶의 의미를 찾는 일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삶의 재미만을 찾아다니는 벤도, 그레이트 헝거와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종수가 그레이트 헝거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지 않을까 싶지만 종수야말로 그레이트 헝거와는 가장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아르바이트하며 생활비 벌기도 빠듯한 종수는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여행 같은 건 꿈도 못 꾸는 리틀 헝거일 뿐입니다. 그레이트 헝거에 대한 동경 같은 건 애당초 없어 보이는 종수는 젊은 나이에도 부자로 사는 '위대한 개츠비'들을 부러워하며 그들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 더 큰 젊은이입니다. 나름 소설가를 꿈꾸고 있지만 수수께끼처럼 알 수 없는 세상에 대해 아직 뭘 써야 할지조차 모르는 종수에게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이 가능하긴 한 일인 지조차 확실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그레이트 헝거가 될만한 사람은 전혀 없다는 것일까요? 삶의 의미를 찾기에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고, 삶의 재미를 찾기에는 그럴만한 재력이 없었지만, 삶의 희망을 준 해미를 찾는 일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했던 종수. 하지만 해미를 찾는 헤매는 과정에서 종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과 마주하게 됩니다.
해미의 가족이 운영하는 분식집에 찾아간 종수는 해미가 들려주었던, 어릴 적 우물에 빠졌다가 구출되었다는 이야기가 '없었던 일'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듣게 됩니다. 심지어 집 근처에 우물조차 없었으며 해미는 원래 감쪽같이 이야기를 잘 지어내는 아이였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죠. 그동안 종수가 알았던 해미와 실재의 해미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한 종수는 그래도 끝까지 먹고 있던 라면 한 젓가락을 더 먹습니다. 해미의 진자 잔가 말한 우물 이야기는 진짜로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그녀가 지어낸 가짜 이야기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라면 먹는 신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 있습니다.
삶의 본능에 잔뜩 굶주려있는 배고픈 청춘들에게는 삶의 의미를 찾아다닌다는 그레이트 헝거의 이야기나 삶의 희망을 상징하는 우물 이야기의 진위 여부보다는 한 그릇의 라면을 남기지 않고 끝까지 먹는 일이 훨씬 더욱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는 씁쓸한 진실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