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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작 Dec 28. 2020

정답게 마주 앉아 밥 먹을 사이

신세계 (2013) 

먹어 먹어. 여기 송아지 고기 아주 연하고 좋아. 게다가 이거 한우야, 한우.


뷔페식 테이블이 세팅된 고급 레스토랑.

골드문 그룹의 상무이사 이중구(박성웅)가 부하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와인을 곁들인 한우 안심 스테이크를 능숙한 칼질로 잘 썰어먹는 이중구. 하지만 그의 부하들은, 다른 험악한 칼질은 잘해도 스테이크 써는 칼질은 영 익숙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때, 형사들이 들이닥치면서 정답던 식탁의 분위기는 깨지고 맙니다. 하지만 이중구는 눈 하나 깜빡 않고 오히려 형사들에게 으름장을 놓습니다. '식전 댓바람부터 남들 식사하는데 먼지를 피우냐'며 큰 소리 치는 이중구의 허세도 대단하지만 조폭과의 기싸움에서 쉽게 물러날 강 과장(최민식)도 아닙니다. '대충 다 처 드신 건 같으니' 그만 먹으라고 맞짱구를 치죠.


사실 이중구와 감 과장은 얼마 전, 골드문 그룹의 보스였던 석동출 회장(이경영)의 장례식장에서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잠복근무를 나온 형사팀과 보스 장례를 치르는 깡패들 사이에 고운 말이 오고 갈리는 없지만 이때 장례식장에서 강 과장의 대사가 굉장히 맛깔났습니다. 형사들에게 아는 척을 했으면 '왕건이가 잔뜩 들어있는 한우 육개장'이라도 좀 내오지 그랬냐고 농담을 던지는데 정말 웃겼죠. 그렇다고 강 과장이 그날 한우 육개장 못 얻어먹은 것 때문에 이중구를 찾아온 것은 절대 아닙니다. 강 과장이 이른 아침부터 이중구를 찾아간 이유는 '어울리지 않게' 한우 스테이크를  너무 좋아하는 놈에게 '콩밥'도 좀 먹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거대 범죄조직 골드문의 공식서열 4 위인만큼 구속영장에 적힌 이중구의 죄목도 무진장 많은데요, 과연 강 과장은 이번에는 정말로 이중구의 범죄사실들을 확실히 입증할 수 있을까요?


영화 <신세계> 스틸컷




큰일 앞두고 으짜스까. 보약이라도 챙겨 먹어야 쓰겠네...


화교가 운영하는 정통 중식당.

정청과 이자성(이정재)은 맛깔난 중식 요리를 먹으며 독한 고량주를 원샷하고 있습니다. 골드문 그룹의 차기 회장으로 유력한 후보인 정청이지만 회장 선출 건보다 마주 앉은 동생의 안부가 더욱 걱정되는 모양입니다. 안색이 안 좋다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묻는 정청에게 그냥 피곤할 뿐이라고 얼버무리는 이자성.  


골드문 그룹 서열 5위인 이자성이 '요즘 좀 피곤한' 이유는 회장 쟁탈전을 앞두고 잠복경찰인 이자성에게 새로운 오더가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강 과장의 명령을 거부하자니 목숨이 위태롭고, 명령을 따르자니 정청에 대한 양심이 괴로운 상황. 하지만 이자성은 골드문의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 그가 맡은 특수임무-정청을 감시하고 보필하라-를 계속 수행해야만 합니다. 자성이 피곤한 진짜 이유가 뭔지 알리 없는 정청은 안색이 좋지 않은 자성에게 보약이라도 먹여야겠다며 진심으로 잘 챙겨주려 합니다.  그리고 정청은 앞으로 태어날 자성의 아들을 위해 다 같이 축배를 들고, 자성의 부하들에게도 먼저 다가가 술을 따라주며 아랫사람들을 살갑게 대합니다. 정청의 그런 면모를 잘 알고 있으니 정청을 감시해야 하는 이자성의 죄책감 또한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데요, 과연 이자성은 잠입경찰로서의 특수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정청과의 끈끈한 의리를 끝내 저버릴 수 있을까요? 


영화 <신세계> 스틸컷 (출처: IMDB)




영화 <신세계>(감독 박훈정)는 국내 최대 범죄조직에 잠입한 경찰 이자성(이정재)과 그의 정체를 모른 채 친형제처럼 아끼는 조직의 이인자 정청(황정민), 그리고 잠입수사 작전을 설계하고 조직의 목을 조이는 경찰 강 과장(최민식) 사이에서 벌어지는 의리와 배신, 음모의 드라마를 그린 영화입니다


영화 <신세계>에는 극 중 이중구의 유명한 대사가 있습니다.  골드문 그룹 후임회장을 선출하는 일정하는 정하기 위해 고위급 간부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선배님들 모시고 밥이나 같이 먹자'는 정청(황정민)의 제안에 이중구가 싸늘하게 받아치는 대사입니다.  


영화 <신세계> 포스터


보스가 사망 후 그룹의 후계자를 정하기 위해 모였지만 이중구는 그들 사이의 관계를  '낯짝 마주대고 정답게 앉아 밥 처먹을 살가운 사이'는 아니라고 규정 짓습니다. 그의 말처럼 영화 <신세계>에서는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들끼리는 절대로 식탁에 마주 앉지 않고, 서로 굳게 믿는 사람 하고만 얼굴 대고 마주 앉아서 밥을 먹습니다. 


이중구가 그의 심복들과 함께 스테이크까지 먹으며 아침식사를 함께 했던 이유는 다른 이사들은 절대 못 믿어도 자기 부하들만큼은 확실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중구의 부하들에 대한 신뢰는 부하들의 충성을 담보로 하는 것이었죠. 반면 정청의 이자성에 대한 믿음은 충성을 전제로 주는 믿음과는 차원이 다른 어떤 것이었습니다. 변함없는 충성을 보이면 믿어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형님인 자신을 그저 '믿기만 하라'고 말하는 정청의 무한 애정 때문에 이자성은 더더욱 형님을 배신한다는 죄책감에 괴로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아이러니 한 점은 이중구와 정청은 자신의 심복들과 이자성을 믿었던 반면 고 국장과 강 과장은 자신들이 심어놓은 비밀경찰인 이자성을 완전히 믿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깡패들도 자기를 믿고 따르는데 같은 경찰들은 자신을 완전히 믿지 못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이자성. 


영화 <신세계> 스틸컷 (출처 : IMDB)


특히 고국장의 경우, 이자성과 같은 특수요원들의 목숨은 큰 일을 위한 '자잘한 희생'으로 치부했을 뿐만 아니라 이자성의 충성심을 의심하기만 했습니다. 


강 과장의 경우에도 이자성을 믿지 못해 그에게 이중삼중의 감시요원을 붙여놨을 뿐만 아니라 이자성을 그저 '그물에 걸린 물고기'로 치부하며 그를 계속 이용할 생각만 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임'무 수행의 과정이었다곤 하더라도 강 과장이 간과했던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깡패든 경찰이든, 결정적인 순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강요나 명령이나 협박이 아니라 '정(情)'이라는 것을 말이죠. 누군가와 어떤 중요한 일을 할 때에는 협박에 가까운 명령만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밥이라도 자주 먹었어야 한다는 것을 간과한 것은 강 과장은 큰 실수였습니다.  '얼굴 마주대고 정답게 밥 먹은 사이'도 아닌 그런 삭막하고 건조한 인간관계에서는,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는 굳건한 충성심이나, 어떤 상황에서도 변치 않는 뜨거운 의리 같은 건 절대로 생기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출처 : 영화 <신세계> 캐릭터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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