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개론 (2012)
매운탕, 이름 이상하지 않냐?
제주도 서귀포 항의 유명한 횟집.
싱싱한 회를 안주 삼아 승민이(엄태웅)와 서연이(한가인)가 소주잔을 비우고 있습니다. 서연이가 화가 난 이유는, 승민이가 그녀를 ‘돈 많고 시간 많고 혼자 살기 때문에’ '남의 일에 함부로 말하는 여자' 취급을 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화가 가라앉자 서연은 승민이에겐 말하고 싶지 않았던 이혼 사실을 승민이 어떻게 알았는지가 궁금해졌습니다. 하지만 서연이가 집을 지어 달라 했을 때 승민이는 이미 말을 했었습니다. ‘널 잘 알아야 너한테 맞는 집을 잘 지을 수 있다’고 말이죠. 결국 서연이는 소주 한잔의 힘을 빌려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별거, 이혼, 위자료, 그런 씁쓸한 이야기들을 하며 술잔을 기울이던 서연은 때마침 나온 매운탕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매운탕'이라는 이름이 이상하지 않냐고 말이죠. 알이 들어가면 알탕이고, 갈비가 들어가면 갈비탕인데, 매운탕은 안에 뭐가 들어가든 그냥 다 매운탕이라고 부르는 게 마음에 안 든다는 서연. 하지만 서연이가 지금 왜 이런 얘길 하는지 아직 눈치채지 못한 채 '지리를 시킬 걸 그랬나' 후회하는 승민이에게도, 서연이의 다음 말만큼은 귀에, 아니 가슴에 확 꽂힙니다.
"그냥 나 사는 게 매운탕 같아서.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고 그냥 맵기만 하네."
스무 살 시절의 풋풋했던 서연이는 이제 산전수전 다 겪은 서른다섯 살의 이혼녀가 되어, 자기 삶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른 채 그저 맵기만 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고 앉았으니,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의 입장에서는 가슴 한 구석이 참 먹먹해지는 순간입니다.
그녀의 삶은 어쩌다 매운탕 같이 되어버렸을까?
15년 전 그때, 그녀와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그때 두 사람의 첫사랑이 이루어졌더라면 서연이의 삶은 지금처럼 맵지 않았을까?
술에 취해 펑펑 우는 서연이에게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빌려준 채 승민이는 그런 생각들을 해봅니다. 그러니 이제 승민이는 아마도 매운탕을 먹을 때마다 서연이를 떠올리게 될 것이고, 그때마다 승민이의 속은 맵고 쓰라릴 것입니다.
제주도의 어느 골목길.
서연의 집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어느 날, 공사 상황을 체크하러 온 승민이는 연락도 없이 제주도에 내려와 공사 현장에서 일을 돕고 있는 서연이를 만납니다. 그녀를 데리고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 어디선가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서연이가 발길을 멈춥니다.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바이엘을 배우고 있는 소녀를 보면서 어린 시절의 감회에 젖는 서연이. 그런데 승민이는 옆에서 분위기 확 깨며 밥 좀 먹자고, 뭐 먹고 싶은 거 없냐고 징징대고 있습니다. 그러자 서연이도 못 참고 왜 '하루종일 밥 타령' 이냐고 승민이에게 타박을 주는데요, 사실 그리 배가 고프지도 않은 승민이가 자꾸만 밥 타령을 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11월 11일인 오늘은 서연이의 생일이니만큼 미역국이라도 챙겨주고 싶었던 것이죠. 승민이의 말에 그제야 서연의 입가에 배시시 미소가 지어집니다. 첫사랑 승민이가 아직 내 생일을 기억하고 있다니. 정작 자신의 생일인 것도 까먹고 있었던 서연이에게 이보다 기분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요?
승민이와 서연이는 지난번에 회를 먹었던 식당에서 다시 한번 마주 앉아 미역국을 먹게 됩니다. 제주도에서만 먹을 수 있는 별미인 ‘성게 미역국’을 맛있게 먹는 승민이에게 서연이는 미역국으로 생일을 퉁 칠 순 없다며 '선물' 받고 싶은 게 있다며 은근슬쩍 밑밥을 깝니다. 서연이가 뭔가 어려운 부탁을 할 것 같다는 걸 눈치챈 승민이가 자꾸 말을 돌려 보지만 서연이는 결국 어려운 부탁을 하는데요, 그건 바로 서연이의 피아노 놓을 방을 따로 만들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집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시점에 방을 하나 더 추가해 달라는 게 얼마나 무리한 요구인 줄은 알지만, 서연이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제주도에 내려와 살면서 일 년도 채 남지 않은 아버지의 말년을 함께 해드리며, 자신의 인생도 리셋하고 싶다는 서연이. 고향에서의 새 출발을 하겠다는 서연이의 결심이 왠지 짠하게만 느껴지는 승민이는 서연이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승민이는 서연이가 원하는 대로 피아노 방을 마련하기 위해 집 설계를 변경해 주기로 합니다.
그런데요, 사실 15년 전부터 승민이는 서연이가 시키는 일은 뭐든지 군말 없이 해주었었고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15년 전, 서연이가 차가운 자리에 앉을 때면 재빨리 공책을 꺼내 밑에 깔아주던 승민이. 서연이를 배려하는 승민이의 매너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15년 전, 서연이 자취방으로 이사할 때 무거운 짐을 대신 옮겨주던 승민이. 지금도 서연이가 옮겨야 할 무거운 짐은 승민이가 대신 옮겨주고 있습니다.
15년 전, 양평의 술집에서 서연이의 빈 잔에 막걸리를 채워주며 그녀의 신세한탄을 들어주던 승민이. 지금도 승민이는 제주도의 횟집에서 서연이의 빈 잔에 소주를 채워주며 그녀의 신세한탄을 들어주고 있습니다.
15년 전, 술에 취한 서연이가 버스 정류장에서 졸려할 때 편히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어깨를 빌려주던 승민이. 지금도 승민이는 술에 취한 서연이가 술집에서 펑펑 울 때 편히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어깨를 빌려주고 있습니다.
15년 전, 서연이에게 예쁜 집을 지어주겠다고 약속했던 승민이. 지금 승민이는 서연이가 살게 될 예쁜 집을 진짜로 지어주고 있습니다.
15년 전, 서연이의 스무 번째 생일날, 그녀의 곁에 함께 있어줬던 승민이. 서연이의 서른다섯 번째 생일날에도 승민이는 그녀의 곁에 함께 있으면서 따듯한 미역국까지 챙겨주고 있습니다.
성게알을 넣은 미역국처럼, 진국 같은 사람.
서연이에게 승민이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서연이는 아마도 미역국을 먹을 때마다 승민이를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마다 그녀의 가슴 한 구석은 따듯하고 아련하게 아파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을 할 때 우리는 어떤 특별한 추억을 갖게 됩니다. 두 사람이 함께 들었던 노래가 잊지 못할 추억이 되기도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먹었던 음식이 잊지 못할 추억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첫사랑은 그저 첫사랑으로 끝이 나기 마련이고, 좋아했던 청춘들도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겠지만, 살면서 가끔씩 매운탕이나 미역국을 먹게 된다면 그땐 첫사랑의 아련한 그 맛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승민이에게는 매운탕 같았던 서연이.
서연이에게는 미역국 같았던 승민이.
당신은 어떤 음식을 먹을 때 첫사랑이 기억나시나요?
그리고 어딘가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당신의 첫사랑은 어떤 음식을 먹을 때 당신을 기억하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