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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작 Nov 01. 2019

가장 힘들 때 함께 라면 먹은 사람

내 깡패 같은 애인 (2010)

여기 라면 하나 주세요. 계란 빼고요.


산동네의 허름한 분식집. 시끌벅적한 여고생들로 꽉 차있는 분식집 안에 딱 하나 남은 빈자리에 앉은 세진(정유미)이 라면 한 그릇을 주문합니다. 그때 옆자리에 앉아있던 동철(박중훈)이 세진을 ‘옆방 여자’라 부르며 아는 척을 하는데요, 세진은 그런 동철이 전혀 반갑지 않습니다. 


서울 산동네 반 지하 방으로 세진이 이사 오던 날, 옆집 사는 동철에게 반갑게 인사했을 때에 대꾸도 없이 그냥 갈 정도로 싸가지도 없던 남자. 세진의 입사지원서를 함부로 꺼내 볼 정도로 개념도 없고, 처음 만난 사람에게 대뜸 반말을 할 정도로 매너도 없던 불량스러운 남자. 게다가 여자 혼자서 힘들게 이삿짐을 나르는 것을 보고도 이삿짐센터 욕만 할 뿐 가벼운 짐 하나 날라주지 않고 그냥 가버리는 못된 남자였으니 세진 입장에선 동철을 만난 것이 전혀 반갑지가 않았던 것이죠. 하지만 여고생들이 시끄러운 수다 소리에 묻혀 분식집 아줌마가 세진의 주문 내용을 듣지 못한 것 같은데요, 그러자 그때 동철이 시끄럽다며 버럭 소리를 지릅니다.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의 버럭에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얼어붙는 여고생들. 주위가 조용해지자 동철이 대신 주문까지 해줍니다. '계란 뺀, 라면 하나' 달라고 말이죠. 


영화 <내 깡패 같은 애인> 스틸컷


주문을 대신해 준 건 고마운데, 험악해진 이 분위기는 대체 어쩌라는 건지. 동철의 옆 자리에 앉아있는 것조차 불편한 세진 이건만 눈치 없는 동철은 ‘너 아직도 노냐?’면서 세진을 더욱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런데요, 세진을 계속 놀리려나 싶던 동철의 입에서 전혀 뜻밖의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옵니다. 취직 못해 힘들어하는 세진의 입장을 대변해 주며 영화 <굿 윌 헌팅>의 명장면 같은 대사를 날리는 동철. 세진은 동네의 허름한 분식집에서 라면을 기다리다 동네 건달 같은 옆집 남자가 해준 뜻밖의 거친 위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더욱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그동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힘이 되는 응원의 말을 하필 동네 분식집에서 동네 건달 같은 사람한테서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세진.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라면도 더 맛있는 거 같은데요, 먼저 한 그릇 뚝딱 비우고 일어나는 동철이 계산을 하려다 주인아줌마가 자리에 없자 세진의 옆에 오천 원을 툭 던져놓고 놓고 나갑니다. 따뜻한 위로의 말을 해준 것도 고마운데, 웬걸 라면 값까지 동철이 대신 내주는 건가 싶은데요, 그건 순진한 세진이의 착각일 뿐이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세진이 분식집 밖으로 나오자 골목길에 쭈그려 앉아 식후 담배를 피우고 있던 동철이 다가와 세진에게 라면 값 2500원을 내놓으라고 합니다. 힘내라고 위로해 줄 땐 언제고, 라면 한 그릇 값을 기어이 돌려받아가는 이 남자. 세진은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이 남자의 정체가 대체 뭔지 궁금해 묻자 솔직하게  “나 깡패야.”라고 말하는 동철. 처음 볼 때부터 왠지 깡패 같아 보였지만 그래도 설마 했는데 진짜 깡패라는 말에 세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산동네 반지하방으로 이사 온 것도 서러운 판에 옆집 사는 남자가 심지어 깡패라니. 안 그래도 불안한 세진의 청춘에 어두운 먹구름이 한 층 더 두껍게 드리우는 것만 같았습니다. 

 



며칠 후.

세진의 인생에 있어서 최악의 면접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 비통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창밖으로 보던 세진의 눈에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붙이고 있는 동철의 모습이 들어옵니다. 재빨리 버스에서 내려 동철에게 다가가는 세진. 면접 보러 가기 전, 비까지 쫄딱 맞아가며 편의점에서 우산도 사다 주고, 면접 잘 보라고 손 흔들며 응원까지 해주던 동철에게, 왠지 모를 고마움과 미안함이 느껴지는 세진. 가뜩이나 혼자 밥 먹긴 싫은 지금 이 순간, 그녀가 먼저 '저녁 먹으러 가자'고 제안합니다.  


세진이 동철을 데리고 간 곳은 지난번에도 함께 라면을 먹었던 동네 분식집이었습니다. 분식집 식탁에 마주 앉아 얼굴을 맞대고 먹는 첫 번째 식사 자리지만 이번에도 메뉴는 겨우, 라면입니다. 거의 매일 먹어서 물릴 대로 물리고 질릴 대로 질린 라면. 하지만 돈 없는 백수 신세인 세진이 다른 음식을 사줄 형편은 안 되는데요, 구시렁거리며 라면을 먹던 동철이 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봅니다. 원래 라면에 계란을 안 넣냐고 말이죠. 


같은 연립 주택의 반지하방에 살고 있고, 둘 다 지지리 궁상 돈이 없다는 공통점 말고도, 두 사람은 라면에 계란을 넣어 먹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는데요,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은 왜 굳이 ‘계란을 안 넣은 라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요?


라면엔 무조건 계란을 넣어야만 맛있다는 고정관념은, 깡패는 무조건 나쁜 사람이고 형편없는 인간일 거라는 고정관념과, 지방대 출신 졸업자는 무조건 머리가 나쁘고 실력도 형편없을 거라는 고정관념과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요? 어쩌면 우리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들의 대부분은 라면엔 무조건 계란을 넣어야 맛있다는 고정관념처럼 우리 사회에 이미 관습처럼 굳어져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고정관념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인데도 말이죠.


세진과 동철이 계란을 안 넣은 라면을 좋아하는 이유는 계란을 안 넣어야만 그 라면 본연의 맛을 충분히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라면 철학’은 곧 고정관념 없이 사람을 봐야만 그 사람 본연의 능력과 진가를 충분히 알 수 있다는 이 영화의 주제와도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래서 이 식탁 장면에서 ‘계란 안 넣은 라면’을 영화의 메시지를 함축하는 상징적인 음식으로 부각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영화 <내 깡패 같은 애인> 스틸컷


계란 안 넣은 라면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의 유대감이 생기긴 했지만 아직 동철과의 관계가 마냥 편치만은 않은 세진.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동철의 호칭에도 신경이 쓰이는 모양입니다. 세진은 ‘옆방 여자’보단 ‘옆방 세입자’로 불리고 싶어 하는데요, 그 이유는 단순히 남자와 여자라는 성별로 구분되는 것보다는, ‘경제활동인구’에 당당히 포함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철도 세진의 그런 마음을 알고는 있는지 기꺼이 세진이 원하는 대로 ‘옆방 세입자’라고 불러주고, 내친김에 빨리 취직하는 비법에 대해서도 알려주는데요, 동철의 비법이란 결국 ‘사장 앞에 무릎 꿇고 진심으로 빌기’라는 정말 깡패다운 비법이었습니다. 


그래도 세진은 ‘진심을 보여 봐’라는 동철의 말에서 어떤 용기를 얻었는지 경력직만 뽑는다는 회사에도 무작정 찾아가서 혹시 신입사원 뽑게 될 때 보시라며 일단 이력서를 내고 보는 당찬 행보를 보여줍니다. 세진보다 더 세진의 취업에 관심이 많아 보이는 동철. 그의 바람대로 세진은 과연 취업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영화 <내 깡패 같은 애인>(감독 김광식)의 달라도 너무 다른 두 남녀가 옆방 세입자로 만나 사사건건 부딪치면서 점차 가까워지는 과정을 유쾌하고 공감대 있게 그려낸 영화입니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세진은 첫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인 줄 알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세진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은 회사가 부도나면서 고작 3개월 만에 끝이 나고, 그 이후 세진은 또다시 험난한 취업준비생의 길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영화의 엔딩 시퀀스에서 세진은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을 떠올리면서 그때 곁에 있었던 한 사람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고 합니다. 세진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그때, 끝내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 취업에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끝까지 세진의 꿈을 응원해 주던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취업 때문에 스스로를 탓하고 질책하고 싶을 때 네 탓이 아니라며 뜻밖의 응원을 해주고, 비 오는 날에는 면접 보러 가야 할 세진을 위해 제 몸을 적셔가며 우산을 사다 주던 그 사람. 인생을 비관해 죽고만 싶을 때 그녀의 곁을 지켜주기도 하고, 세진이 더 이상 취직을 포기하려 할 때 정신을 차리게 해 주던 그 사람. 돈이 없어 밥 한 끼 대접 못해도, 함께 먹는 라면 한 그릇에 정을 나누던 그 사람. 그리고 세진이보다도 더 간절하게 세진이 취직하길 원했던 그 사람. 


동네 삼류 건달인 오동철에게 옆방 취준생 세진이는 다시 돌아가고 싶은 청춘의 한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공부가 싫어 고등학교도 못 나온 오동철에게 대학원까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옆방 취준생 세진이는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면 그땐 정말 착실하게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하게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밑바닥 인생을 살면서도 자존심은 누구보다 셌던 오동철이 생판 모르는 남의 회사 사장 앞에서 무릎까지 꿇어가며 세진의 취직을 돕고 싶었던 건 자신은 엄두도 못 냈던 직장인의 꿈을 대신 이뤄줄 사람이 세진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동철의 그런 간절한 소망이 있었기에 세진이는 일생에 다시 오지 않을 취업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취준생 한세진이 오동철이 이루고 싶었던 과거의 꿈이었다면, 취직 후 2년 만에 최연소 대리까지 진급한 한세진은 갓 입사한 신입사원들에겐 이루고 싶은 미래의 꿈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아마도 세진이는 평생 동안 기억할 것입니다. 그녀가 가장 힘들었던 그때, 그녀 곁에 있었던 그 사람과 함께 먹었던 그 라면이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맛있었던 라면이었다고 말입니다.


진라면 매운맛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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