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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Bom Apr 19. 2020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빛바랜 기억을 빛으로 채우는

잠들어 있던 상상력과 색채 감각을 톡 건드리는 고전 문학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트와 헤어지는 순간부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쉬기로 한 2박 3일 여행에서 어떤 책을 읽으며 뒹굴거릴까 하던 참.

여행에 가져갈 책을 고를 때면 그 여행의 콘셉트가 분명해진다. 아닌 척 하지만 의미 부여하며 사는 꽤 로맨틱한 사람이다. 쉬기로 했으니 소설을 읽고 싶었다. 시간으로 사치 부릴 땐 역시 고전이 좋겠다. 요즘엔 넉넉한 시간과 마음이 갖춰져야 문학이 읽힌다. 조급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 같아 조금 울적해진다.

어쨌든, 짐을 다 싼 뒤엔 책장에서 책 등을 훑고 몇 가지 책을 꺼내 문장을 읽어 본다. 첫 문장이 유명한 소설이 몇 개 있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도 분명 그 안에 들어야 할 것이다. 잠자고 있던 상상력을 깨운다. 저 밑에 간신히 숨 쉬고 있던 색채 감각을 톡 건드리자, 인상주의처럼 거칠고 빛과 색으로 이루어진 풍경, 그런 게 잡힐 듯 그려진다.


다 읽고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가 보니, 결국 저 문장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를 온전히 완성하기 위해 작가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만 같다. 작가만이 할 수 있는 강력한 논리. 수식과 과학으로 증명되어야만 '논리'라고 생각했던 내 편협한 논리가 부끄러워졌다.


묘사가 아름다워서 이름만 한국 이름이었다면 한국 소설로도 읽힐 만큼 단어가 예쁘고 구체적이다. 번역은 김화영 교수가 했는데, <이방인> 번역으로 한 때 논란이 되었던 번역가이다.

책 읽는 걸 그저 유희로 삼는 내겐 문단의 논란거리가 그다지 중요하진 않다. 불어를 모르는 나는 어쨌든, 모디아노나 카뮈의 글을 읽을 수는 없다. 번역된 글을 번역가의 문체로 읽는다. 잘 읽히고, 재밌으면 일단 된 거다. 결과적으로 번역된 이 책은 무척이나 재밌었다.


자아를 찾아가는, 빛바랜 추억을 찾는, 미래가 아닌 과거에서 나를 찾는... 같은 수식어가 이 책과 작가에게 붙어있다. 문단의 평가라고도 하지만 난 일종의 마케팅 문구라고 생각한다. 상을 준 지식인들이 그렇게 읽었다면 나도 그렇게 읽어야 하는가? 글쎄. 내게 이 책은 자아 찾기는 아니었다. 그저 색채가 가득한 그림 같았다.


희미한 조각 끝을 붙잡고 안갯속으로 차근히 걸어가는 '기'. 그가 정말 '페드로'였는 지는 끝내 알 수는 없다. 또 한 조각을 손에 꼭 쥐고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로 이동하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주인공 '기'가 자신이 '페드로'였다는 걸 알아가기 위한 일련의 이야기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기'가 골목을 걸어갈 때 같이 걸어가고, 지긋이 창문 너머를 쳐다볼 때 같이 상상해 보는 것. 그걸로 이 책의 재미는 충분했다. 또 좋아하는 작가가 생긴 것 같아 기쁘다. 모디아노의 <슬픈 빌라>를 주문했다.



"잠깐만... 그의 이름은, 저... 페드로였어요..."
우리는 비탈길 가에 서 있었다. 또다시 그는 주머니에서 파이프를 꺼냈고 어떤 이상한 작은 도구로 그것을 소제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태어났을 적에 내가 얻은 그 이름을, 내 생의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불렀던 그 이름을, 내 생애의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불렀던 그 이름을, 어떤 사람들에게 내 얼굴을 환기시켜주었던 그 이름을 스스로 되뇌어보았다. 페드로. p. 100
지금도 황혼의 그 인적 없는 대로며, 뒤꽁무니로 불똥을 튀기던 보라색 소형 전기 자동차를 탄 드니즈와 계집아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들 두 사람은 웃고 있었고 계집아이는 나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 계집아이는 누구였을까? p. 159
흐린 녹색 벽의 방. 붉은 커튼이 쳐져 있다. 빛은 침대의 왼쪽 머리맡의 등에서 나오고 있다. 나는 그녀의 향수 냄새를, 약간 톡 쏘는 냄새를 맡는다. 눈에 보이는 것은 피부의 주근깨들과 오른쪽 엉덩이에 난 점뿐이다. p.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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