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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당신을 꺼내서 먹는다.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 하미나

by Summer

똑똑한 여자의 글을 읽고 나니 개운하다. 멋지고 부럽다. 질투도 난다. 질투의 가장 큰 이유는 그녀는 나와 또래이기 때문에. 줄곧 탐구하고 써오는 인생을 살 동안 나는 그저 화이트 칼라에 취해 최신 IT 서비스를 한다며 설치고 있었다.

‘최신’만큼 오래되어 보이는 단어가 있을까. ‘설친다’라고 말하면서 나는 왜 나를 내려치나? 그저 부러워서?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이것도 내 자기부정의 오랜 습관이어서? 모를 노릇이다.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대답은 내가 그렇게 살아온 10년의 시간이 지겨워진 탓이다. 그 세계가 싫어진 것도 있지만 그 세계 안에서 과하게 억눌렸던 내 모습이 안쓰럽기 때문이다. 그 시간들을 게워내려면 들숨-날숨이 더 필요하다. 숨을 내쉴 동안 자신을 최소한만 의심하길 바란다.




공유하는 시대감각이라는 게 있다는 걸 크게 느꼈다. 비록 나는 글을 업으로 살아오진 않았지만, 내가 연습 삼아 써보는 글들은 산만해 보이고 조각나고 부서져 있었다. 당최 봉합하려 해도 그 답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다 리디아 유크나비치의 ⌜물의 연대기⌟에서 몸으로 글을 쓴다는 말에 실마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위대한 남성 작가들의 글에 전율하며 경외감을 느꼈다면, 여자들의 글을 읽을 때는 ‘와, 미친’을 내뱉으며 숨을 헐떡였기 때문이다. 숨을 헐떡이게 만드는 글. 그런 글은 무엇이 다르지? 하던 와중에 ‘몸으로 쓴다’는 말에 옳다쿠나, 했었다.


상당한 분량의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에서도 내가 가장 좋았던 파트는 ‘몸-글쓰기’이다. 산울림 소극장에서 진행된 북토크에서 이 글 전체를 거침없이 낭독하는 하미나 작가를 보며 다시금 느꼈다. 이 작가도 이 부분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책 전체에서 작가가 미간을 찌푸리며 찾고자 하는 질문, “어째서 어떤 진실은 그토록 진실된 느낌을 주는가?”의 답을 이 글이, 작가가 스스로 하고 있다고 들렸다.


몸-글은 알려진 적 없는 글쓰기입니다. 몸-글은 규정할 수 없고 규정하는 순간 도망쳐버리는 글쓰기입니다. 몸-글은 물 같은 글쓰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몸-글은 글쓰기에 경험을 끼워 맞추지 않습니다. 글쓰기의 규칙을 파괴하고 깨버리며 기어이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가버립니다.

(…) 머리-글이 설계도를 따라 계획대로 자신을 만들어 낸다면 몸-글은 흐름을 쫓아가며 씁니다. 서둘러 받아 적습니다. (…) 장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바라봅니다. 몸-글은 경험이 자신을 통과하게 내버려 둡니다. 몸-글은 자신을 도구로서 씁니다.

(…) 몸-글은 자신의 옮음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더없이 진실하다는 감각을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비선형적이고 되돌아가는, 구부러지며 흘러갔고 두 번은 돌아오지 않는 물 같은 글. 그런 ‘물 같은 글’은 독자가 다시금 읽으며 그 물을 역류시키고 있기 때문에 역겹고 숨이 차고, 몸이 베베 꼬인다. 나는 ‘역류’를 느끼는 글을 좋아한다. 더러워, 역겨워, 근데 야, 이건 진짜야. 흔히 말하는 탐미적인 글과는 다르다. 탐미적인 글은 더러움을 감싸는 아름다운 포장지의 질감을 매만지는 작가가 보인다. 내겐 특히 하루키가 그렇다. 그의 글은 재밌고, 술술 읽힌다. 그것이 문제다. 더러움을 술술 읽히게 한다는 것. 남성의 시선이 덧씌워져 소비되는 포르노. 그런 식의 작가의 글은 너무도 많이 읽어 왔다. 그러한 작가는 ‘여성적인 문체’라는 형용사를 트로피 마냥 목에 걸고 있지만, 그 트로피를 걸어주는 사람은 뭐 또, 끼리끼리다.



다시 돌아가, 이 책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 는 몸-글쓰기를 중간중간 배치해 주어 이 책을 더 진실되게 만들어 준다. 사고력을 요구하는 학술적인 글을 읽다가, 느닷없이 몸-글로 작가의 몸 전체가 내 앞에 놓인다. 그러면 나는 아, 맞아, 당신이 그렇다면 그렇지, 하고 믿게 된다. 객관적 사실인 것보다, 내가 이 저자를 믿을 수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작가가 자신을 기꺼이 글의 도구로써 보여준다는 것. 거기서 이 작가를 믿게 되었다.


무엇이 더 우월한지를 가리는 것은 내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사람들이 받아들인 앎의 체계가 그 집단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혹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경험하게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 어째서 어떤 진실은 그토록 진실된 느낌을 주는가? 이것이 내 질문이다. 어떤 진실은 어째서 그토록 강렬하게, ‘진리’라는 느낌을 주는가. 인지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로 보이고 들리게까지 만드는가. 어떻게 개인의 경험을 넘어 집단의 경험으로도 나타나는가.




하미나 작가가 글을 쓰면서 들었다던 Healing - Sampa The Great 노래를 그 후로 계속 듣는다.


아주 품이 커다란 여자가 나를 껴안아 주는 것 같지 않나요?

숨을 헐떡이는 글들은 항상 나를 그렇게 불안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래, 이런 걸 읽을 때 네 몸이 불안해하는 걸 알아, 나도 그랬어, 지금도 가끔 그래. 그래그래, 고개를 끄덕이고 두 손으로 어깨를 톡톡, 그러다 얼굴을 쓰다듬는 축축해진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 눈물과 땀방울이 섞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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