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디아 유크나비치
이런 글을 보면 나는 몸이 달아오른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았다. 단어는 나의 몸이었다.
그 일들을 이야기로 풀어내면, 그것이 글쓰기다. 우리에게서 멀어진 몸이다. 글쓰기, 글쓰기의 형식과 왜곡, 저항과 거짓말, 끝없는 욕망, 이어지고 이어지는 문장.
몸으로 글을 쓴다는 유크나비치의 글을 소화해 내는 몸이 감각하는 건 당연했다. 그의 글은, 물로 뛰어들어 다시 헤엄치려는 펄떡이는 활어 같았다. 이런 글을 보면 나도 글을, 정말 쓰고 싶어진다. 이보다 좋은 선생님이 있을까?
나는 우아한 글에 지겨움을 느낀다. 정확히는 돌파하지 않고 자신을 부숴버리지 않는 심정으로 쓴 글. 그런 우아한 사람에게 열등감이 느껴서일까. 그보다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걸 직시하지 않거나, 고통이 없는 척하는 것이 지겹다. 최소한 내겐 닿지 않는다.
<물의 연대기> 같은 글은 오만함이 없다. 오만하기 어렵다. 처절하게 자신을 혐오하며 자신을 파괴하고 싶은 분노가 있고, 그 안에는 솟움치는 슬픔이 있다. 나는 안타깝게도, 혹은 운이 좋게도, 나를 싫어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마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며 펄떡이는 활어처럼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거겠지.
맞다, 나도 안다. 내가 엮어놓은 인생 이야기는 때때로 분노로 가득하고 자기 파괴적이고 지저분하고 심지어 망상처럼 읽힌다는 것을. 그렇지만 아름다운 것들. 우아한 것들. 희망찬 것들은 때때로 어두운 곳에서 생겨난다. 게다가, 나 같은 여자의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 내 목적이니까.
나는 계속 ‘글’이라 부른다. ‘이야기’라고는 하지 않는다. 만약 이 에세이를 ‘이야기’로만 치부한다면 그저 역겨운 이야기, 배설적인 일기로만 느껴질 것이다. 유크나비 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과한 의례를, 글자로 박아버려 승화시킨 의식을 행하고 있다. 나는 이 과정에서 보편성을 느낀다.
그녀와 똑같은 스토리를 갖긴 쉽지 않다. 성적 학대를 한 아버지, 방치한 어머니, 같은 아픔을 가진 언니, 그 트라우마로 인한 자기 파괴적인 마약, 폭력적인 섹스, 분노하는 삶. 다만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지옥이 있고, 지겹도록 겪었으며, 벗어나고 싶어 하는 간절함이 있다.
나는 알고 싶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엉망으로 만드는 걸까? 아니면 우리에게 주어진 대본 때문에 엉망이 되는 걸까? 내 안의 한 자아를 떠나 다른 자아를 포용하는 일은 쉽지 않다. 당신의 자유는 당신에게 상처를 남길 것이다. 어쩌면 죽일 수도 있다. 당신 혹은 당신 내면의 한 자아를. 그래도 괜찮다. 더 많은 자아가 남아 있으니까. 우리는 몇 번을 죽어야 하는 걸까? 언어에는, 자아처럼, 죽음을 감내할 가치가 있다. p256
에크하르트 톨레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통체, 불교의 언어로는 카르마, 그리스도교의 비유로는 십자가.
어떤 사람은 유독 강렬한 카르마를 지고 태어난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만이 그 카르마를 직시하고 온몸을 불사 질러 끊어낸다. 몇 억 겹을 살아낸 카르마를 끊기 위해선 몇 번을 죽는듯한 고통을 통과해야만 한다.
몇몇 챕터는 거북하고 역겨웠으나 그가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과정이었다. 이런 직면을 하는 사람, 난파하며 기어이 죽지 않고 살아낸 사람을 보면 우리는 불편해진다. 과해 보인다. 너는 왜 굳이 그렇게 살아? 라며 정상선 밖으로 밀어내고 싶어진다. 하지만 철학자 키르케고르의 표현처럼 십자가를 감당하는 존재에게 느끼는 불편함에는 사실 두려운 경외심이 있다.
누군가는 세상에 태어나 밑바닥 같은 삶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린 모른 체하지만, 안다. 그것을 기꺼이 짊어지는 용기가 내게는 없는 것 같아 모른 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어이 스스로를 구원하고 자신의 구멍 뚫린 옆구리를 드러내며, 다른 사람의 고통을 헤아리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는 당신 옆에는 끝없는 패턴과 반복이 있게 하라.
그러면 그것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발단과 전개와 결말과 결말 그 후로 이루어진 선형적인 이야기는 버리라고, 버리라고, 우리는 시(詩)라고, 우리는 이렇게 긴 삶의 여정을 걸어왔다고, 당신에게 계속 살라고, 계속 살아야 한다고 말해주려 그 긴 여정을 버텨냈다고.
‘우리는 시(詩)라고’.
나는 이렇게 말하는 글 앞에서, 들썩이는 몸과 빨라지는 심박수를 감출 수 없다.
P.S. 부국제에서 크리스틴 스튜어트 감독의 <물의 연대기>를 보았다. 책을 보고 영화를 봐야 그나마 친절하다. 영화만 본다면 불친절할 것. 리디아 유크나비치의 예술하는 방식으로 영화도 풀어낸 것 같아서 연출이 내용과 맞물렸다. 리디아를 연기한 배우 이모전 푸츠 보는 맛이 상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