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누누 Feb 01. 2018

영화 연인: 그건 분명 사랑이었어

꾸준히 쓰고 싶은 영화 일기

베트남의 사이공 하면 어떤 것들이 떠오르지. 호찌민 시의 옛 이름? 메콩이 흐르고, 넝 라(베트남의 전통모자)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 싸고 맛있는 쌀국수를 먹고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미스 사이공'(자코모 푸치니의 '나비부인'을 토대로 만들어진 뮤지컬)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신을 바라보며 'why god why'를 부르는 주인공 크리스의 모습이 어릴 적의 나에게 큰 인상을 남겼었기 때문이겠지.


사이공으로 향하는 주인공 (메콩을 가로지르는 배 위에서)

그리고 오늘 그곳을 배경으로 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작품 '연인'을 보았다. 그리고 아직 베트남에 가 보진 못했지만 언젠가 그 뜨거운 나라에 방문하게 된다면, 사이공으로 가는 길목에서 뗏목을 타고 메콩강을 건너게 된다면 떠오를 작품이 마음속에 하나 더 생겼다. 베트남으로 여행을 떠나야 할 이유가 늘었으니 기쁘기도 하지만 두 이야기의 결말을 알기에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 가난한 백인 여자와 부유한 중국 남자의 대화 소리, 신에게 자신의 운명을 묻는 한 군인의 노랫소리가 사이공 어딘가에 여전히 숨 죽이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비극적인 미래를 알면서도 나아가는 관계는 어떤 기분일까. 다가올 절망보다 눈 앞에 펼쳐진 사랑의 희망이 더 크기에 당분간은 지속되고 마는 그런 관계가 세상엔 꽤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사이공은 내게 그런 곳으로 각인되었다. 이루어지지 않을 사랑들이 잠시 머무는 곳. 그 모든 아픔을 강과 함께 흘려보내는 곳.


그들의 첫만남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명장면으로 뽑는다)

처음 두 주인공이 만나 조심스레 손을 잡는 장면을 보며 나의 첫 데이트가 잠시 스쳐갔다. 어느 여름, 아무도 없는 어두운 영화관에서 첫사랑과 살갗이 스치는 순간. 덕분에 두 시간 동안 영화에 집중하지 못했었던 그때. 섹스를 하는 장면보다 손이 마주하는 장면에서 더 큰 짜릿함을 느낀 건 그런 기억 때문인걸까?


메콩강

 

흙먼지 날리는 시장 구석의 어두운 은신처에서 두 사람은 자주 애틋하고 비밀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그럴 때마다 수위가 높은 장면들이 자주 연출되었는데 조금 놀랐던 건 그런 장면을 보면서 여자의 나체만 보면 궁둥이를 들썩대던 소년시절의 내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는 것. 장면 하나하나를 마주하고 있던 내 모습은 가슴 아픈 사랑을 절절히 이해하고야 말겠다는 뜨거운 청년이었다. 섹스보다도 더 본능적인 사랑의 행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어느 어른이었다.


베트남을 떠나는  배에 올라 탄 주인공 소녀

영화의 장면 장면에 비쳤던 메콩강의 표정은 무척이나 담담했던 것 같다. 체념의 경지를 넘어서서는 아무것도 거부하지 않으며 순리를 받아들이겠다는 늙은 강물처럼 영화 '연인'의 사랑은 메콩강과 꼭 닮아 있었다.


보이지 않는 배웅

나를 스쳐갔던 모든 관계에 대하여 이제야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다. 헝클어졌고 끊어졌던 모든 관계가 인정하기 싫었을 뿐 그건 분명 사랑이었다.


인생이 연극이라는 말, 영화를 보며 조금 더 그 말에 믿음이 갔다. 남자가 '내게 돈 때문에 왔다고 말하'라며 여자에게 던지던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여자는 분명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거든. 둘의 관계는 돈 때문이 아니었다는 걸. 온 힘을 다해 사랑한 만큼 온 힘을 다해 멀어져야 했을 그들을 위로하면서 영화의 여운을 달랬다.


이십 대 후반을 향해 달리는 요새는 감정이 자꾸 메마른다. 사랑을 해야 하는데 자꾸만 멀어진다. 아무나 붙잡고 저랑 만나실래요, 그리곤 아프게 우리 헤어질까요?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여태 배웠던 감정의 결이 아니고 훨씬 깊고 아득하고 무기력한 감정이라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처음 마주하는 친구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잘 헤쳐나갈 자신이 있다. 영혼은 그렇게도 성장해 나가는 것일 테니까.


내가 요새 좋아하는 어느 문장을 인용하며 나의 첫 영화 일기는 끝. 자주 써야겠다.

 

… 햇살에 목숨을 내놓습니다. 부디 만나지 않고도 살 수 있게 오지 말고 거기 계십시오.

<이병률, 화분>


<영화를 보며 떠오른 것>

츠지 히토나리의 ‘안녕 언젠가’ / 이병률의 ‘화분’ / 뮤지컬 ‘미스 사이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