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귀리밥 Sep 21. 2017

상쾌한 식사대접 '취업 턱'

직장인 일생에 딱 한 번 찾아오는 순간


“다음 주 수요일에 친구가 취업 턱 낸대. 저녁 먹고 올게.”

남편의 말을 듣는 순간 ‘취업 턱’이란 말에 물음표가 투덕투덕 붙었다.


취업 턱이라니, 세상에. 얼마 만에 들어본 단어인지 손가락으로 햇수를 세봤다. ‘이직’도 아니고 ‘취업 턱’이라면 첫 취직이라는 것. 짓궂은 취업 턱이라는 단어가 어쩐지 싱그럽게 다가왔다.


남편이 올해로 서른한살이니, 친구들의 나이도 다. 나와 남편의 나이차가 있는 데다 여자가 먼저 취직하는 편이라 격차가 있다. 군대를 다녀오고 학업을 마친 남편의 친구들 중엔 갓 신입사원이나 학생들이 더러 있다. 내겐 까마득한 옛일인 취업 턱이 남편의 주변에선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좀 전에 손가락으로 햇수를 세어본 나의 취업 턱은 9년 전이었다. 재수를 하며 회사를 다니긴 했다만, 기간이 정해진 아르바이트 개념이라 제대로 된 취업은 대학 졸업 후였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입사한 완구회사에서 첫 월급을 받았다. 사실 한 달 동안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사회생활은 이렇게 하는 건가?’라는 생각으로 가득했기 때문에 월급을 받고는 얼떨떨했다.


당시엔 업무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한 상태였고, 사내 분위기를 파악하고 트집 잡히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게 회사생활의 대부분이었다. 여직원들은 자리에 없는 사람의 흉을 잘 봤고, 남직원들은 보다 높은 직급에 오르기 위해 치열하게 정치공작을 펼쳤다.


늘 학교생활은 치사한 거라 생각했다. 수십 명이 모인 반과 학과에서 눈치 보고 머리를 써야 했다. 수준과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있기 때문일 거라고, 적어도 사회에 나가면 어른스럽게 행동해야 하니 나아질 거라고 기대했다. 빨리 졸업을 하고 사회로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회사란 곳은 더욱 뾰족했다. 밉보이지 않기 위해 나를 다잡는 시간이 많았다. 결국 첫 월급은 내 마음고생에 대한 합의금이었다.




월급을 받던 날, 각별한 친구 몇과 서로의 월급 액수를 공유했는데 딱히 적지도 많지도 않은 액수였다. 월급은 통장에 원단위까지 정직하게 찍혀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통장을 확인한  집으로 돌아가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예전에 재수생 시절, 사회생활을 하며 받은 첫 월급으로 엄마 내복을 샀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엄마가 집에서 내복 입은 모습을 본 일이 없었다. 엄마는 집에서 내복 차림으로 있는 일이 없었다. 집에서도 늘 티셔츠와 긴 치마를 입곤 했다. 가족들에게 월급날을 미리 말해둔 터라 빈손으로 갈 수 없고, 무언가를 사가야 할 참인데 머릿속엔 내복뿐이었다. 게다가 몇 년 새 둥실둥실해진 엄마의 사이즈도 몰랐다. 결국 전철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속옷 사이즈 어떻게 돼?”

“왜?”

“아, 그냥 좀 알려줘.”

“너 내복 사려고 그러지?”

“뭐?”


엄마의 직설적인 질문에 둘러대지도 못하고 뻣뻣하게 굳었다. 엄마의 직설이 이어졌다.


“맞네, 맞아. 월급 타서 내복 사려고 전화했구먼.”

“아니, 무슨 엄마가 이래. 알아도 좀 모른 척 사이즈나 말해주지?”

“넌 젊은 애가 왜 그리 촌스럽니? 요즘 첫 월급 때 누가 내복 사 오냐? 그냥 들어와.”

“엄마, 김새게 왜 이래? 사준대도 뭐래.”

“시끄럽고, 길에 서있지 말고 빨리 와.”


내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엄마는 전화를 톡, 끊어버렸다. 부푼 가슴에서 공기가 빠져나오고, 다리에 힘이 쪽 빠졌다.




무안하게도 엄마는 끝까지 내복을 못 사게 했다. 나중에 교환하게 되더라도 사갈까 했지만, 예전에 내복을 사드렸다가 ‘이런 건 왜 사냐’고 핀잔을 들었던 과거가  떠올라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전철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탔다. 창밖을 보는데 복잡한 심경이었다. 마음의 밑가슴에는 엄마에게 순수하게 선물하고 싶은 마음보다 선물꾸러미를 내밀며 떵떵거리고 싶은 허세도 어렴풋이 있었다.


내릴 때가 되어 버스에서 내렸다. 횡단보도 방향으로 가려는데 옆구리에 지갑을 끼고 서있는 엄마와 언니가 서있었다. 언니가 먼저 다가와 어깨를 톡 쳤다.

“너 오늘 첫 월급 탔다며? 좋겠다야.”


그 길로 엄마와 언니는 나를 자주 가던 오리고깃집에 데리고 갔다. 평소엔 한 마리를 주문해 구워 먹고 녹두죽을 배부르게 먹었는데 이날은 엄마가 처음부터 한 마리 반을 주문했다. 능숙하게 고기를 굽는 엄마가 말했다.


“남기더라도 실컷 먹어. 우리 막내, 첫 월급 탈 때까지 고생 많았어.”

“어?”

언니가 옆에서 곁눈질하며 말했다.

“너처럼 모난 성격에 회사 나가서 한 달을 버텼으니 대단한 거지. 앞으로도 잘 버텨라.”


오리고기는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빠르게 익었고, 내 양볼도 붉게 익고 있었다. 엄마는 고기를 내 앞접시에 자꾸 놔줬다.

“엄마 내복 같은 것 사지 말고 잘 모아 놨다 시집가. 너 취직할 때 비싼 가방 하나 못 사줬는데 엄마가 무슨 낯으로 내복을 받아.”


그제야 나는 말없이 방백으로 속을 털어놓고 있었다.

엄마, 나 실은 회사 생활 너무 힘들어, 사람들 사이에 지내는 게 너무 어려워, 말도 마음대로 못 하고, 내가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래도 취업 턱이라는 걸 가족에게 한 번 내고 싶어서 엄마에게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엄마, 그럼 취업 턱으로 여기 고깃값 내가 내면 안 될까?”

“시끄러워 이년아!”




그날 이후, 9년째 나는 엄마에게 취업 턱을 못 내고 있다. 그 이후로도 몇 번 시도했지만, 허투루 쓰지 말고 적금이나 넣으라는 윽박만 들었다. 친구들에게 취업 턱이란 명목으로 밥도 사고 술도 샀다. 이제 사회에서 기업의 녹을 먹으며 산지 9년째, 집들이나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수줍은 허세로 친구들에게 밥을 살 일은 없다.


남편의 친구가 취업 턱을 낸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속으로 상상을 하고 있었다. 직장인으로 사는 이상, 일생의 딱 한 순간이다.


첫 취직. 설레고 긴장되며, 온 마음이 깎여 나가도록 상처도 받는 시절. 비록 회사에서 잔뜩 눈치를 보더라도 취업 턱을 내는 날 만큼은 시원하게 세수하고 말간 얼굴로 소중한 사람들을 만난다. 새로 산 지 얼마 안 된 정장을 입고 나타나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털어놓고, 함께 모인 친구들에게 평소보다 조금 비싼 식사를 산다. 그리고 소소한 축하를 받는 풋내 어린 서른 살 사내의 모습. 그날의 계산은 얼마나 상쾌하고 적당한 식사대접일까.

매거진의 이전글 가을과 은행나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