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한 세상에서도 나를 기다리는 아름다움은 너무 많다.
이야기의 시작은 떡볶이집이었다. 친구 둘과 떡볶이세트를 먹던 중이었다. 대화에 딱히 어긋남을 느껴본 적 없는 편안한 친구들이었다. 그날 식탁에서 나온 이야기는 어쩌다 보니 ‘이별한 후’의 대처가 주제였다.
나는 그 무렵 이혼 후 새로운 연애를 시작한 지인을 진심으로 축하해 줬다. 다신 연애 따위 할 여유가 없다던 지인이었지만, 좋은 사람에겐 으레 마음이 열리기 마련이다. 함께 차를 마시기도 했는데 지인의 새 연인이 꽤 반듯한 사람이라 둘의 연애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이어지길 바랐다. 그 티타임을 이야기하며 누군가와 헤어지고 다시 시작하는 일은 당연히 응원받을 일이고, 그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어 나 역시 행복했다는 소회를 털어놓았다. 하지만 친구들의 시선 끝에는 조금 다른 구석이 걸려든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혼한 지 일 년밖에 안 됐는데 벌써 연애를 시작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맞아, 마음 정리할 시간도 좀 필요할 것 같아.”
그때 입 밖으로 “헐!”소리가 나올 뻔한 걸 살짝 눌렀다. 나와는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
“그렇지만 이혼 후 언제부터 연애를 시작해야 한다든가, 그런 기준은 없지 않나? 그런 기준이 있어서도 안 되고 말이야.”
친구들은 내 말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하지만 조금은 더 조심스러워야 하지 않냐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다. 한 단어로 줄여서 ‘사회통념’이라 곧잘 불리는 바로 그것 말이다.
사회통념 속에서 이혼한 사람에게 사람들이 기대하는 모습쯤은 잘 알고 있다. 이혼 후 이성과의 만남을 자제하고, 헤어진 사람의 부모와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함과 애틋함을 표현하며, 한층 성숙하고 차분해진 인간상을 기대하는 것. 그러한 사회통념이 틀린 것도 아니고 그럴 만하다는 지점도 이해한다.
그와 비슷하게 이별한 사람에게 기대하는 모습도 잘 알고 있다. 이별 후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까지 시간의 간격을 둬야 하고, 실패한 연애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예전 연인과는 다른 사람을 찾길 바라며, 이후 연애에서는 잡음 없이 좋은 모습만 보이길 기대하는 것. 이러한 사회통념 역시 이해한다.
결혼 전 연애와 이별을 할 때 “연애 좀 쉬어.”라는 말을 종종 들은 적 있다. 사람들은 그 짤막한 말을 하며 애처로운 눈길을 보내곤 했는데 그 말속에 무슨 뜻이 담겨있는지는 충분히 전달됐다. 이별했으니 조용히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정리하라는 뜻, 연애를 마치고 바로 새 연애를 하면 문란한 사람으로 보이기에 십상이니 조심하라는 질책, 이성에게 마음을 쉽게 주지 말라는 걱정, 연애를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연애를 시작하는 요란한 사람을 향한 질투심.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조언이려니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훼방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헤어진 후 마음의 정리는 집에서 심심하게 보낸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고, 일부러 새로운 이성을 만나지 않는다고 해서 훌륭한 이별을 완성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별한 다음 날 당장 다른 사람과 교제를 시작해 전 연인을 허무하게 만들 꼬인 심사만 아니라면 일부러 심심하게 보낼 필요는 없다.
게다가 이별은 연애의 과정 중 일부이기 때문에 헤어졌다고 해서 평소와 달리 침잠한 채 살아가는 건 몹시 답답한 처사였다. 이별 없는 연애는 결혼밖에 없는데 연애할 때마다 결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연애가 시작되면 반드시 이별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때마다 집에 틀어박혀야 맞는 걸까.
헤어져 아픈 마음은 그저 시간을 보내면서 옅어질 뿐이었다. 그 시간은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에도, 점심시간에 메뉴를 고르는 시간에도, 퇴근길에 음악을 들을 때도 흐르고 있었다. 오랜만에 연락된 친구와 맥주를 마실 때도, 우연히 알게 된 이성과 잠시 메신저를 나눌 때도 이별 후 정리는 진행형이었다. 그러다 울고 싶으면 울지도 모르겠다. 생각나는 횟수가 적어져 어느 날엔 ‘맞다, 나 헤어졌지.’하고 깨달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와중에 마음을 들썩이게 하고 이별의 감정을 밀어내는 설렘을 알아차리면 새로운 연애를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런 자연스러운 이별의 순서로써 일부러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이성을 멀리하고, 연애를 꺼리는 건 비유하자면 내게 ‘이별자다움’을 요구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범죄피해자라면 늘 위축돼 있고, 우울하고, 슬프고, 눈물 흘릴 것으로 짐작하는 피해자다움과 마찬가지로 이별자에게 기대하는 자제하고, 슬퍼하고, 조신해야 하는 모습은 요약하자면 이별자다움 아닐까.
미혼 시절 주변에서 요구한 ‘이별자다움’의 기억이 떡볶이의 붉은 접시 위로 쏟아져 나왔다. 이별한 나에게 그저 가만히, 조용히 있으라고 종용하는 듯한 이별자다움. 그 불편했던 시선과 충고의 기억 때문인지 나는 이혼 후 새로 연애를 시작한 지인을 비롯한 모든 이별자들이 당장 집밖으로 나와 활개치고 다녔으면 한다. 내키는 대로 외출하고, 전 세계 81억 인구 중 진정 자신과 잘 맞는 사람과의 만남에 다시 도전하고, 헤어진 다음 날 벚꽃 구경 다니고 맛집도 가는 게 훨씬 건강해 보인다.
물론 이야기를 나눴던 친구들이 새로 시작하는 사람을 비난할 부류는 되지 않는다. 이별해도 약속한 자리라든가 놀 거리가 있는 곳을 마다하지 않던 나와 달리 친구들은 차분한 시간을 선호했을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그 식사 자리에서는 구구절절 내 생각을 털어놓는 대신 “성인이면 알아서 판단하는 거야!”하고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럼에도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이별자다움을 요구받던 20대 시절의 머쓱한 기억들이 발치를 따라왔다. 이제는 연애는 물론 이별 기회조차 박탈당한 기혼자라서 이별자다움은 내 영역이 아니다만. 그래도 이 세상 모든 이별자가 이별자다움에서 자유롭게 지냈으면 한다. 이별한 세상에서도 나를 기다리는 아름다움은 너무 많으니까, 얼마든지 멋대로 그리고 쾌활하게 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