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 노동을 너무 싫어하는 여자가 아내로 거듭나는 과정
내 아내는 룸메이트
신혼 때의 일입니다.
남편이 지나가는 말로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나는 가끔 아내가 아니라
룸메이트랑 사는 기분이 들 때가 있어.
신혼인데 남편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적잖이 당황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곰곰이 생각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저의 개인주의적인 성향+ 웬만한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려는 성격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꿔 말하면 상대방 역시 본인의 일은 스스로 챙기고 정말 힘든 문제가 아니라면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나 남편은 나와 반대로 가까운 사람일수록 소소하게 오고 가는 정을 중요시하는 사람입니다. 남편에게 정을 차지하는 가장 큰 부분은 바로 '밥'입니다. 남편은 '끼니'를 너무나도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래서 항상 저를 보면 '밥'은 먹었어? 밥 먹어야지. 오늘은 뭐 먹을까? 등 하루 세 끼를 챙겨 먹는 것에 굉장한 의미부여를 합니다.
저요? 저에게 밥은 그냥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 살기 위해 먹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정해진 시간에 꼭 끼니를 챙겨 먹는다는 개념도 없는 저에게 한 상을 차려내는 일은 많은 노력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어쩜 이리도 우리 두 사람은 '밥'에 대한 개념이 다를 수가 있을까요?
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자라온 '집안 환경'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결혼 전 남편의 집안은 정해진 시간이 되면 온 식구가 모여 함께 밥을 먹었고 저의 집안은 끼니때가 돌아와도 배가 고프지 않은 사람은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곤 했습니다(물론 성인 이후의 얘기입니다). 쓰고 보니 저의 집안이 조금 특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듭니다만, 어쨌든 저는 결혼 전까지 그런 환경에서 생활해왔어요. 다 큰 성인이기도 하고 배가 고프면 언제든 제 스스로 차려먹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죠.
점점 멀어지는 부부 사이
결혼 전엔 늘 아침밥을 먹고 다니던 남편이 결혼 후 아침밥을 먹지 않는 아내와 사는 것이 처음엔 많이 힘들었나 봅니다. 저 역시도 마음이 편하진 않았고요. 주중에는 출근 준비로 바쁘니 서로 이해하며 넘어가곤 했지만 남편이 주말 브런치만큼은 포기하기 싫었는지 아침에 늘어지게 자고 있는 저를 대신하여 브런치를 준비하고 깨우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좀 보고 배워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던 것도 같네요.
하지만 저는 아침을 먹지도 않는 사람한테 아침밥상을 차려달라는 남편의 요구가 참 싫었습니다. 그리고 왜 하필 또 '아침'밥인지. 도무지 남편의 그 심리는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밥은 먹고살아야 하겠기에 겨우겨우 저녁을 차리는 수준 정도로 지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조금은 부끄럽네요. 남들은 꿀 떨어진다는 신혼이었는데 말이에요.
어쨌든 그 저녁마저도 어머님께서 주신 반찬으로 끼니를 연명하거나, 시켜먹거나 간단히 해 먹는 달걀프라이, 볶음밥, 반조리식품 등을 주로 먹곤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에는 불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먹고 싶은 사람이 차려먹으면 그만인데
왜 자꾸 내가 차려주길 원하는 걸까?
그때부터였을까요. 우리 둘의 사이가 전같지 않음을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꼬박꼬박 밥상을 차릴 자신이 없었습니다. 차라리 설거지를 하는 편이 더 좋았어요. 가뜩이나 요리를 잘하지도 못하는데 끼니에 큰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 제가 매일 아침 저녁을 차리는 일은 그 어느 가사일보다도 스트레스가 높은 노동었습니다.
아내는 밥 차리는 것이 왜이리도 힘들었을까
우선 제가 가부장제를 너무나도 싫어합니다. 그것 때문에 결혼을 두려워했었고 결혼한 이후로도 남편에게서 그런 조짐이 조금이라도 보인다 싶으면 날이 선 태도로 남편에게 공격과 방어태세를 취하곤 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일종의 트라우마였던 것 같습니다. 밥은 무조건 여자가 차려야한다라는 개념에 대한 강한 거부로 오히려 사랑하는 남편에게 밥을 차려줄 수도 있는 일 자체를 부정하고 있었습니다.
두번째는, 제가 요리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레시피를 보고 그대로 따라해도 이상하게 맛이 없더라고요. 이게 반복되자 의욕도 없어지고 더욱 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세번째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제 삶에서 밥은 그냥 ‘밥’일 뿐이예요. 정이니 어쩌니 하는 그런 의미부여따윈 없단 말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요리를 잘 못하는 것일수도 있겠네요. 맛이 있든 없든 그냥 먹습니다. 심지어 나물이 상한 줄도 모르고 먹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면 더이상 말이 필요없겠죠?
변화의 계기가 생기다
그렇게 지내온지 3년차, 남편도 일정부분은 포기하고 내려놓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제가 차리지 않는 날이면 남편이 대신 차리기도 했고 같이 먹을 시간이 안 되면 굳이 기다릴 필요 없이 먼저 먹고 치우는 게 일상이 되었습니다. 편하기는 무지 편했습니다. 그런데 뭔가 공허하고 외로운 마음들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건 왜였을까요?
그러던 어느날, 우리에게 아기가 생겼습니다. 아이를 낳고 저는 엄마가 되어 아기에게 줄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모성애 그거 참 무서운 거더라고요. 아기를 재우고 밤늦게까지 이유식 만들기를 반복하는 날들이 지속되면서 저는 조금씩 주방일에 익숙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아기는 조금 더 자라서 이젠 제법 어른들이 먹는 밥을 함께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기 밥을 열심히 차리면서 우리의 밥까지 자연스럽게 챙기게 된 지금. 그 과정은 고되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하다보니 점차 익숙해졌고 요령도 생겼네요. 밥을 차리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밥상에 그토록 목을 맸던 이유
남편과 밥을 먹는 동안 나눈 대화의 시간들이 쌓여가면서 전보다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 듭니다.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나누다보니 벌어졌던 사이도 점차 회복되는 것 같습니다.
돌아보니 사랑하는 남편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은 다름아닌 밥상머리 앞에 앉은 시간들이더라구요. 왜 그리도 남편이 밥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갑니다. 얼마 전, 남편과의 대화 속에서 제 스스로가 큰 오해를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꼭 아침밥이 아니더라도 아내가 차려준 따뜻한 밥상 속에서 온정을 느낄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아내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다구요.
맞네요.
지친 하루, 밖에서 열심히 일하고 온 남편에게 무엇보다도 큰 위로가 되는 건 아내의 정성이 담긴 따뜻한 저녁밥상이라는 것을 저는 왜 몰랐을까요. 맞벌이 부부들에게는 너나 구분할 것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차려주는 밥상이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는 것도요.
그렇게 차려먹다보니 골골대던 제가 아기 낳고 감기 한 번 걸린 적이 없습니다. 요리솜씨도 조금(?) 늘어서 어딜 가도 굶는 일은 없겠더라구요. 재료손질법부터 냉장고 정리까지 주부 내공도 쌓였습니다.
아기를 돌보며 남편의 저녁식사를 마련하는 일이 쉬운일은 아지니만 가정을 가꾸고 지키는 노력이 다 그런 것 아니겠어요? 그만큼 남편도 다른 쪽에서 많은 배려로 보답을 하게 되니까요.
이상,
초보아내에서 아내로 성장중인 결혼 4년차 주부의 사생활이었습니다. (요리 잘하시는 아내 두신 남편분들, 전생에 나라 구하신 분들입니다!! 제가 다 부럽네요. 아내분께 잘해주세요~ㅎㅎ 덧붙여, 맛없다고 한번도 투정않고 먹어준 남편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