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가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독일과는 아주 다른,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말라가 버스터미널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우리의 일정은 공항에 도착한 토요일부터 수요일까지 네르하에, 다시 수요일부터 토요일 독일로 돌아오는 날까지는 말라가에서 지낼 계획이었다. 그래서 네르하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말라가 버스터미널로 가야 했다. 버스를 기다리며 새삼 웃음이 났다. 불과 3~4시간 전만 해도 덜덜 떨면서 이제 겨울인가 싶었는데, 이렇게 따뜻한 곳에 있을 수 있다니.
2017년 독일에 처음 도착했을 때도 겨울이었는데, 나는 날씨에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런 독일이라도 전혀 문제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살다보니 막상 또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왜 다들 여름 햇살 좋을 때 기를 쓰고 나가 있으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독일의 가을, 겨울의 그 잿빛 하늘은 좋은 의미로 사람을 참 차분하게, 혹은 우울하게 만든다. 이제 독일 하늘에 모노톤 필터가 씌워질 때쯤 만난 스페인의 햇살은 나를 더 들뜨게 만들었다.
네르하는 작은 바닷가 마을 같으면서도, 곳곳에 으리으리한 집들도 즐비한 신기한 동네였다. 실제로도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은퇴 후에 여생을 보내러 많이 오는 동네라고 들었다. 이런 곳에서 여생을 보낸다면 꽤 만족스러울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부분 말라가 여행을 하면서 하루정도 당일치기로 네르하를 온다고 하던데, 그렇게 잠깐 스쳐가기에는 아쉬운 곳이라고 느꼈다.
사람들도 친절했고, 저렴한데다가 맛있는 식당도 있었지만, 내 기억에 가장 깊게, 가장 오래 남을 기억은 '부리아나 해변(Burriana Playa)'에서의 하루일 것이다.
첫 번째 날에는 네르하에 도착하니 이미 오후였기에, 브리아나 해변에 가서 눈으로 바다를 담으며 저녁식사를 하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두 번째 날에는 아직 정확한 결혼식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미리 셀프 웨딩 촬영 삼아 몇 장 찍어볼까 했다가, '역시 사진은 전문가에게'를 느끼며 길게 펴놓은 삼각대를 접었다. 안 그래도 내 표정은 어색한데, 게다가 블루투스 스위치로 사진 촬영 버튼을 누를 때마다 표정은 더 굳어버렸다. 촬영 중 건진 사진은 거의 없긴 하지만 동네 어르신들은 우리를 (사실은 나보다는 내 짝꿍을) 참으로 어여뻐하시면서 각자 핸드폰으로 열정적으로 찍어주셨다. 그래서 재미있는 경험이긴 했지만, 별개로 앞으로 다시 삼각대를 꺼낼 수 있을까 싶었다.
드디어 세 번째 날에 우린 바다에 몸을 던져보기로 했다(라고 하기엔 우린 튜브에 매달려있을 뿐이긴 했지만).
바닷가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선베드를 빌리러 가는데, 많은 선베드 옆에 밝은 색 커튼이 감겨있는 방갈로 한자리가 남아있었고, 가격 차이도 거의 없었기에 우린 고민 없이 방갈로를 선택했다.
자리를 잡았으니 바로 튜브를 들고 우린 바닷가로 뛰어들어갔다.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 둘 다 수영을 못한다. 그런데 부리아나 해변은 예상치도 못하게 수심이 갑자기 깊어지는 해변이었다. 튜브가 있었음에도 바닷물을 몇 번 먹고 나니 금세 지쳐버렸다. 물장구를 몇 번 치고 나서는 지쳐서 방갈로로 돌아왔고, 배도 부르겠다, 어느 정도 운동도 했겠다, 게다가 날씨마저 따뜻하겠다. 쿠션을 베고, 헤드폰을 얹고 엎드려서 여유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노래를 가만히 듣던 나는 깜빡 잠들었고, 잠에서 깨어나 헤드폰을 내려놓고 가만히 앉아 바람에 살랑이는 커튼 사이로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멀리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햇살은 따뜻했고 나는 근 몇 년간 내가 기억하는 잠 중에서 가장 달콤한 잠을 잔 후였다. 이렇게까지 아무 걱정도 없고, 아무 생각도 없이 완벽한 휴식 같은 잠을 잤다는 것에 놀랄 만큼 따뜻하고 달콤한 잠이었다. 게다가 뜨거운 햇살 아래 눈을 감고 있어도, 내 등위로 저 햇살이 내리쬐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행복하다는 감정에 수치를 매길 수 있다면, 가장 높은 숫자를 차지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지금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내 곁에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있고, 이 행복한 느낌을 그 사람과 나누고 있다는 것 마저 너무 완벽한 순간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번 여행 중 아니, 어찌 보면 지금까지 길지 않은 삶이었을지 몰라도, 그 인생 중 가장 완벽한 순간 중 하나였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생각해도 그날의 기억은 나를 부리아나 해변으로 바로 데려다준다. 어쩌면 이 여행기를 쓰게 된 계기가 이 날의 기억을 언제라도 잊지 않기 위함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만큼 내게 소중한 기억이다.
이 날은 내게 진정한 의미의 휴식이었고, 마음 깊이 느낀 평화였으며, 행복이었다.
어쩌면 이 날부터 진짜로 우리가 이 곳에 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