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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q mark May 23. 2022

쓰레기통, 그곳에 있으리라는 믿음.

 얼마 전 3주간 한국으로 휴가를 다녀왔다. 진작에 다녀왔어야 할 한국이지만 '그 몹쓸 질병'으로 인해 거의 3년 만에 다녀온 한국이었다. 역시 한국은 '+82의 나라'답게 빠르게 바뀌어있었고, 많은 것들이 없어지고 다시 생겨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그대로이기도 했다.


 다만, 독일에 살며 처음으로 한국을 다녀온 3년 전에 비해, 그보다는 오랜 시간을 이곳에 머물다 보니 이제는 독일의 삶에 익숙해져인지 한국에서의 생활 중 불편한 몇 가지가 느껴졌다. 그중에 가장 큰 하나가 '길에 쓰레기통이 너무 없다'는 것이었다.


 이 생각을 하면서, 나 자신이 좀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는데 거의 평생을 한국에 살다가 몇 년을 독일에서 살았으면서, 이제야 이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고? 아, 네가 유럽에서 잠깐 그거 살았다고 지금 잰 채 하는 건가? 대한민국 세금이 어디로 가는지, 행정에 대해서 비판을 하고 싶다는 얘긴가?


 잠깐. 혹시 이 글을 읽으면서 같은 생각을 하신다면, 그런 복잡한 의미로서가 아니라 그냥 정말 순수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다.

 꽤나 날씨가 좋았던 서울 하늘 아래서, 한 때 꽤나 인기가 좋았다는 '아샷추' 한 잔을 백종원 선생님네 카페에서 아주 큰 사이즈로 사서 '쭈웁'하고 다 마시고는 이제 버려야 하는데 아무리 걸어가도 길에 쓰레기통이 없었다. 버스 정류장에는 있겠지 하고 가는 데 거기도 없었다. ATM만 있는 은행에 가서 드디어! 쓰레기통을 발견했는데 그 바로 위에는 '외부 쓰레기는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쓰여있는 걸 보고 흠칫해서 결국 쓰레기는 집까지 들고 와서 버려야 했다.

 반면에 독일은 길에 쓰레기통이 꽤나 많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와도 쓰레기 통이 있고, 그렇게 집으로 향하다 보면 또 몇 개씩이나 쓰레기통이 있다. 독일에 살며, 길에 쓰레기통이 없어서 곤란한 기억은 손에 꼽을 정도였던 것 같다.


독일, 길 위의 쓰레기통.


 물론, 한국에서는 쓰레기 종량제 봉투를 돈을 주고 사서, 각 집마다 분리수거를 잘해서 버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길 곳곳에 쓰레기통을 둘 수 없는 것도 이해하고, 외부 쓰레기를 거부하는 은행의 심정도 이해를 한다.

 그렇지만 무지하고 단순한 나의 머리로는 이런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래도 쓰레기통이 길에 조금 더 있다면, 내가 그래도 이 쓰레기를 들고서 그래도 조금 더 걸어가다 보면 쓰레기통이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다면, 누군가 길거리에 그냥 버리는 일이 더 적어지지 않을까.

 당연히 쓰레기통이 없으니 그냥 길에 버려야지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이 문제인 것도 안다.(물론, 나도 쓰레기를 길에 버려야겠다 생각했다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적어도, 쓰레기통을 곧 마주칠 거라는 믿음이 있다면 그 쓰레기를 지니고 있을 '용기' 혹은 '책임'(이라기에는 좀 거창한 듯싶지만)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쓰레기통 이야기를 했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그곳에 있으리라는 믿음'의 필요성은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쓰레기라는 주제를 먼저 떠올리고 보니, 부정적인 것들을 떠올리기 쉬운데 이는 비단 부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것들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다만, 내 쓰레기를 두고 가야 하는 쓰레기통이 아닌, 내 소중한 것을 지켜나갈 수 있는 중간 쉼터라고 생각해보자.

 내가 어떠한 꿈이 있을 때 그 꿈을 이루기까지 가는 과정이 너무 멀다면, 그 과정에 있어 내가 너무 지치거나 이 모든 일들이 무의미하다고 여기지 않도록 내게 성취감 혹은 만족을 느끼게 해 줄 중간 단계가 있다면, 그 소중한 꿈을 쉽게 놓아버리지 않을 수 있다.


 내 인생의 목표로 하는 것 중 하나는 죽기 전에는 내 책을 하나 내는 것이다. 이렇게 적으면서도 가능한 일일까 싶기도 하고, 막연하기도 하다. 소설을 쓸지, 에세이를 쓸지 등등 아무것도 정해진 것도 없다. 그런데 적어도 내 이름으로 내가 쓴 책을 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고 있다.

 일단 글을 써야 한다. 그것만은 확실하기에 이렇게 브런치로도, 아주 짧고 간단한 글은 인스타그램으로도 쓰고, 사람들에게 좋아요를 받으며 좋아하기도 하고, 생각보다 조회수가 낮으면 좌절스럽기도 하다. 그래도 글감이 생각나면 이렇게 글을 쓰고 누군가는 내 글에 공감을 한다는 생각을 하면 글이 쓰고 싶어 진다. 이런 플랫폼이 아니었다면 나는 글감을 가지고만 있다가, 혼자서 묵혀두다가 그대로 잊었을 수도 있다.


 독일에 처음 와서 글도 쓰기 시작하고, 음악도 종종 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쯤 '나 혼자 뭐하냐'싶을 때가 있었다. 그래서 쓸데없는 일은 그만하자라는 생각을 할 때쯤 내가 참 좋아하는 뮤지션 중 윤석철 트리오의 인스타그램에 '곡 커버 이벤트' 공지가 올라왔다.

 나는 다룰 수 있는 악기도 없었고, 그저 제일 좋아하는 음악이었던 'Gentle wind'라는 곡에 내가 직접 가사를 적고, 곡을 부른 영상을 올렸다.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감사하게도, 내 영상이 선정작 중 하나로 뽑혔고 대단히 큰 상품이나 상금을 받은 건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내가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하는 게 의미는 있겠구나 하는 용기를 얻었다. 그 이후로도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해보고 있다. (항상 그렇듯 꾸준함이 문제지만...)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연인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고민 등을 혼자서 안고 가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내가 언제든 나의 이야기를 털어놔도 상대방이 들어주리라는 믿음만 있어도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해결되기도 한다.


 보통 연인 간 다툼의 큰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는 생각을 하는데, '물리적으로' 내 이야기를 아예 듣지 않는다는 경우보다는 내 앞에서 내 이야기를 듣고는 있으나, '듣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때가 더 많다. 그렇게 되면 '말해봐야 뭐해'라는 식으로 포기하게 된다. 포기하게 되면, 혼자서 짐을 짊어지고 계속 언덕을 올라가는 기분이 들고, 그렇게 되면 혼자 끙끙 앓으며, 연골 닳아가며 언덕을 올라가다가 지쳐버리거나, '에라, 모르겠다' 하고 언덕길 아래로 짐을 던져버리는 경우가 발생한다.


 물론 우리는 매 순간의 내 개인적인 고민, 생각 등 모든 것까지는 연인과 나눠야 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다만 꽤 오랜 시간을 머리에 담아둔 고민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 고민이 상대와의 관계에 이유가 있는 거라면 더더군다나 상대와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

 상대가 내 이야기를 들어줄 거라는 믿음, 이야기한다고 당장 해결되지는 않을 수 있지만 적어도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관계에 있어서 불만은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내 경험상으로는 내가 필요할 때 상대가 거기 있으리라는 믿음, 이 믿음 자체가 큰 힘을 준다고 생각한다.



 내가 안고 가야 하는 것이든, 짊어져야 하는 짐이든, 혹은 그냥 쓰레기든 내가 걷는 이 길에 내려둘 수 있는 곳이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한 걸음 한 걸음 내닫는 내 앞길이 좀 더 힘차지 않을까? 어차피 가야 하는 길이고 어차피 살아야 하는 오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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