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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튼애플 Jan 16. 2024

<리빙: 어떤 인생>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보이는

<리빙: 어떤 인생> 줄거리와 원작 비교 리뷰

리빙: 어떤 인생 줄거리


윌리엄스는 런던 시청의 공무원이다. 메트로놈처럼 정확한 시간에 맞춰 움직이는 그의 행동은 부하 직원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수십 년간 근무하면서 단 한차례도 지각하지 않았던 성실함. 그는 공무원의 표본과도 같다. 병원에 들렀던 그는 자신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쉽게 말해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게 된다. 그는 자신의 심각한 상황을 아들 내외한테 얘기하고자 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영화를 보고 늦게 들어오는 날이란 걸 알고 이들은 그의 험담을 한다. 얼른 재산만 넘기고 나가줬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그는 차마 자신의 시한부 선고 사실을 털어놓지 못한다.


다음 날, 그는 일탈을 결심한다. 대단한 일탈이라도 할 줄 알았건만 제시간에 출근하지 않는 것. 그리고 런던 시청이 아닌 해변으로 놀러 가는 것. 그게 그의 일탈이다. 커피를 마시던 카페에서 그는 한 예술가가 구시렁대며 수면제를 살 수 없어서 자는 게 괴롭다고 털어놓는다. 그 이야기를 듣던 윌리엄스는 자신이 수면제를 주겠다며 꺼내놓는다. 한 병, 두 병, 세 병, 그리고 더. 그의 가방에서는 끊임없이 수면제가 나온다. 그는 이 약을 먹고 자살을 하려 했다고 털어놓는다. 그의 사정을 듣고 짠한 마음을 가졌던 예술가는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주기로 한다. 윌리엄스가 생전 처음 가보는 클럽, 스트립쇼, 게임장. 그에겐 모든 게 새롭고 자극적이다. 하지만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 했던가? 그는 유흥 분위기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한다. 점점 악화되는 건강 상태도 그를 오랜 시간 유흥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서도 윌리엄스는 출근하지 않는다. 정장 가게를 배회하던 그는 부하직원 해리스를 만난다. 이전부터 퇴사를 꿈꿨던 직원인 그녀는 윌리엄스에게 추천서를 부탁한다. 그는 흔쾌히 추천서를 약속하며 대신 자신과 점심을 같이 먹자는 제안을 한다. 그가 데리고 간 곳은 으리으리한 식당. 추천서를 써주고는 이런저런 이유로 그녀를 저녁 늦게까지 데리고 다닌다. 이후에도 몇 번 더 윌리엄스는 해리스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 하루는 그의 행동이 달갑지 않던 그녀가 그를 뿌리치고 가려 한다. 그때 그는 다시 자신의 시한부 선고 사실을 털어놓는다.


얼마 간의 시간이 다시 흐르고 윌리엄스는 끝내 삶을 마감하게 된다. 장례식장에 수많은 동료 직원과 시청 관계자들이 방문한다. 시장과 그의 상사는 말년에 그가 고집스레 일 처리를 한 과정에 대해 놀라움을 표하면서도 결국 자신들의 공이 컸다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그의 부하들은 윌리엄스가 보인 적극적인 태도에 감화된 듯하다. 평소에는 온화하기만 하고 일을 넘기는 데 익숙했던 윌리엄스가 공원 조성 건을 두고 타 팀의 부장은 물론 시장에게도 강력하게 어필하여 끝내 이루어낸 성과를 말이다. 그리고 다짐한다. 우리 역시 윌리엄스가 그랬던 것처럼 적극적으로 민원을 듣고 행하는 공무원이 되기를 말이다.


전설적인 감독의 작품을 리메이크하다


영화는 일본의 전설적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대표작 <이키루>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플롯 역시 원작에 충실한 편이다. 오랜 기간 관직에서 근무한 주인공과 평탄치 않았던 아들 내외와의 관계, 그리고 무료했던 그의 삶의 파장을 일으킨 예술가와 어린 부하 직원. 새로운 요소는 거의 더하지 않고 원작 이야기를 충실히 따랐다. 다만 50년대 일본 관공서를 그렸던 모습에서 21세기 런던 시청을 그리는 모습으로 바뀌어 영화 내 분위기와 질감은 꽤 큰 차이를 보였다.


또한 최근 개봉하는 작품들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1.33:1 화면비를 차용했다. 이는 구로사와 아키라가 남긴 명작에 대한 예우이자 명감독에게 보내는 존경과도 같았다. 옛날 영화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화면비와 클래식한 숏의 구성은 작품이 얼마나 치밀하게 리메이크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각색은 일본계 영국인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맡았는데 노벨문학상, 맨부커상 수상 등 문학계에서 굵직한 성과를 남긴 그의 각본 덕에 영화는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거주한 기간은 아주 짧았지만 집안에서는 늘 일본어로 대화를 했다고 밝혔던 만큼 이역만리 땅에서도 동양적 사고와 접근법은 여전히 유효했다. 원작이 일본에서, 리메이크작이 영국에서 제작되었는데 두 나라의 특성을 모두 알고 경험한 가즈오 이시구로가 아니었다면 이 영화의 각본은 쓰이기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삶, 그리고 죽음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죽음이 있어야 삶이 있는 것처럼, 삶이 있어야 죽음도 있다. 우리는 죽음이란 이야기를 꺼린다. 죽음이 주는 단절성 때문인지 그 자체가 풍기는 흉악한 기운 탓인지는 모르겠다. 죽음이란 단어는 터부시되기 마련이다. 아주 역설적이게도 이 죽음을 인지하는 순간 삶을 더 또렷하게 보인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돌아온 사람이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었던 사람이 사고 과정을 송두리째 바꾼 이야기는 여러 사례로 증명된 바 있다. 삶이란 가치는 무한히 영속할 것 같지만 끝이 있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면 영원할 거라 믿고 인생을 낭비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면 어떨까? 그 누구든 한정된 시간 속에서 어떤 것이든 이루기 위해 더 노력할 것이다. 승진이라든지, 더 많은 돈을 벌어야겠다든지 이런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어떤 마무리를 지을지, 내가 떠나고 난 뒤에 어떤 가치를 남길지. 사람들은 고민하고 행동한다. 이들이 행동하는 이유는 하나다. 죽음이 보이기 때문에. 이제 그 끝이 다가오기 있기 때문에.


윌리엄스의 행동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전 같았으면 적당히 다른 부서로 떠넘길만한 민원을 적극행정으로 개선해나간다. 세차게 내리는 비도, 윗선에서 고깝게 보는 시선도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떠날 사람이고 해코지 당할 일이 없으니까. 그리고 내가 떠나고 난 자리에 내가 살았다는 걸 증명할 무언가가 있길 바랐으니까. 그는 정면돌파를 선택했고 그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은 머지않아 증명된다. 물론 그의 죽음이 모든 걸 바꿀 수 없다는 한계는 여실히 드러난다. 그렇게 한마음 한뜻으로 윌리엄스의 의지를 계승하기로 다짐했던 동료들은 금세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윌리엄스의 행동은 의미가 있다. 그가 남긴 공원은 마을 사람들이 이용하는 대표 휴식공간으로 자리매김한다.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가 되어준 것이다. 마지막에 그가 공원을 죽을 장소로 선택한 것 역시 자신의 가치를 곱씹어 보고자 했음이라 생각한다. 그곳에 가만히 앉아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며 그는 아직 채 빠져나가지 못한 낮 시간의 아이들 목소리를 듣는 듯했다. 그 목소리야말로 그의 삶에 딱 어울리는 레퀴엠이 아니었을까?


고전이 고전인 이유


영화는 윌리엄스라는 노인의 마지막 삶의 자취를 쫓는다. 그의 삶의 마지막 굴곡에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관객들은 몰입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설정 중 하나는 공무원의 복지부동레드테이프 현상을 꼬집으며 블랙 코미디로 풀어낸다.


공무원의 복지부동은 조금 더 쉬운 말로 보신주의, 무사안일주의 정도로 풀어낼 수 있겠다. 즉, 자신의 자리 지키기에만 급급하고 적극적으로 일을 처리하기보다 판에 박힌 대로 매뉴얼대로 처리하는 행동을 말한다. 이는 원작에서도 아주 잘 나타난 장면이다. 수도국은 공원국으로, 공원국은 건축국으로, 건축국은 다시 수도국으로. 조금이라도 다른 부서에 걸쳐 있는 업무라면 자신이 맡지 않고 떠넘겨버리는 행태를 공무원의 복지부동이라고 한다. 사실 시한부 선고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윌리엄스 역시 이 범주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시한부 선고를 받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이 현상을 보여주는 가장 적절한 예시가 되었을지 모른다.


레드테이프 현상은 <리빙: 어떤 인생>보다 원작인 이키루에서 더 잘 나타났다. 공원 설립을 요청하는 민원을 올리는데 담당 직원은 계속 서류가 미비하다며 다른 서류를 추가로 요청한다. 레드테이프 현상은 딱 이런 상황에 사용된다. 영국 관청에서 공문서 뭉치를 붉은 띠로 묶었던 데서 유래되는 말인데 형식주의를 기반으로 과도한 서류 요청과 불필요한 규제를 행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리빙: 어떤 인생>에서도 공원 설립을 위해 찾아온 민원인 여럿이 여러 부처를 차례대로 방문하는데 이 역시 레드테이프 현상이 어떤 것인지를 정확히 보여준다.


<이키루>는 70년이 넘는 과거에 제작되었다. 리메이크작이 등장한 지금 시점과 기술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큰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전히 공무원의 안일한 업무를 꼬집는 이 장면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국가 기관이라는 큰 조직, 매뉴얼화될 수밖에 없는 특성 탓에 공공기관이 유연하게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은 조금씩 나아지는 방향으로 변화해나가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공무원의 업무태도도 70년이 흐른 지금 어느 정도는 변화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70년 전 구로사와 아키라가 남긴 메시지는 현대의 관료사회를 정통으로 관통한다. 이는 고전이 왜 고전이라 불리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마 지금으로부터 70년이 더 흐른 2100년쯤 <이키루>를 돌려보아도 위와 같은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리라 확신한다.


잘 된 리메이크, 그러나...


작품은 충분히 잘 만들어진 영화다. 빌 나이가 끌어가는 이야기는 원작의 투박한 느낌과는 달리 부드러움을 선사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그리고 앤티크 한 영국 느낌의 미장센 구성도 훌륭했다. <이키루>에서는 느끼기 어려웠던 세련된 장면들이 많이 연출된 것도 적절한 재해석이 있어서였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원작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작품인지 묻는다면 고개를 저어야겠다. 단순히 구로사와 감독의 이름값이라든가, 과거 미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원작이 가지는 파괴적인 이야기 구성과 엄청난 롱테이크로 구성된 장례식장의 장면을 뛰어넘을 무언가가 없다. 단순히 원작을 충실히 답습할 뿐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내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그나마 그의 죽음을 알았던 해리스를 윌리엄스의 아들이 따져 묻는 장면 정도가 추가된 신일 텐데 그 부분도 엄청난 임팩트가 있다거나 은유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지 않다. 그저 원작에서는 별 이야기 없이 넘어갔던 부분에 물음표를 하나 더한 정도였다.


뛰어난 원작을 가지고 있는 경우 좋은 평가를 받기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 작품이 원작이 없던 완전한 창작의 이야기였다면 더 좋은 점수를 주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만큼 리메이크란 쉽지 않은 작업이다. 원작의 그늘을 벗어나는 동시에 그곳에 머물러야 하는 불가능한 미션을 수행해야 하는 과업이다. 그런 아쉬움의 이야기다. 영화는 충분히 훌륭했고 좋은 화질로 다시 만들어진 <이키루>를 만난 느낌이라 보는 내내 행복했다. 그럼에도 더 많은 걸 바라는 건 관객의 욕심이겠지만 이런 욕심이 쌓여 지금의 영화 콘텐츠가 있게 한 것도 사실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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