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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튼애플 Feb 10. 2024

<플랜 75> 닥쳐올 미래에 대한 서늘한 예언

영화 <플랜 75> 줄거리 및 리뷰

플랜 75 줄거리


피 칠갑을 한 청년 하나가 장총을 들고 건물 안을 누빈다. 그는 몇 사람의 목숨을 이미 빼앗고 남은 마지막 총알로 자신의 목숨까지 앗아간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다른 사람이 이해해 줄 거라 믿는다. 그가 살인을 저지른 건 지나치게 많은 노인 부양비 때문에 청년층이 힘들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주인공 미치의 시선으로 옮겨진다. 그녀는 78세의 독신이다. 호텔 하우스키핑 업무를 맡으며 근근이 살아가는 노동자이기도 하다. 같이 일하던 동료 중 하나가 플랜 75의 이야기를 꺼낸다. 정부가 75세 이상 노인의 죽음을 장려하고 도와준다는 정책을 말이다.


미치는 이 이야기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고령의 나이지만 일하는 게 충분히 즐거웠고 아직은 죽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백만 엔을 지원해 준다느니, 호화스러운 숙소에서 머물게 해준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그녀에게 먼 나라의 소식 같기만 했다. 하지만 하우스키핑 동료 중 한 명이 몸에 이상을 느끼고 쓰러지는 사고고 발생한다. 이에 호텔 측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노령 노동자를 내보내고자 한다. 명예퇴직이니 뭐니 하는 말로 포장했지만 사실상 권고사직, 혹은 해고였다.


하루아침에 직업을 잃은 미치는 생활고에 시달린다. 일자리를 찾으려 노력하지만 번번이 거절당하고 철거 통보서를 받은 집에서 다른 집으로 이사하려 해도 직업도, 재산도 없는 사람에게 집을 내어주는 곳은 없다. 결국 그녀는 플랜 75 담당 시청 직원인 히로무 눈에 띈다.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이내 플랜 75에 가입하게 된다. 한 달간의 유예기간 동안 그녀는 백만 엔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남편도 없고 마땅한 취미도 없던 그녀는 그 돈조차 제대로 쓰지 못한다. 죽음을 기다리는 미치의 유일한 낙은 플랜 75 가입자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해 주는 상담사 요코와의 통화시간뿐이다.


어느 날은 요코에게 부탁해 밖에서 따로 만나기도 한다. 원칙에는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요코는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고 미치 역시 처음으로 웃음을 지어 보인다. 미치는 이런 행복이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이 아쉽기만 하다. 요코 역시 한 번의 만남이었지만 미치가 곧 죽어야 한다는 상황을 알고 마음이 쓰인다. 죽음을 하루 앞둔 날, 미치는 특상 초밥을 시켜 먹은 이야기를 즐겁게 꺼낸다. 이윽고 15분의 시간이 흐르고 전화를 끊어야 한다는 알람이 울린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미치는 전화를 끊는다. 하지만 미치가 신경 쓰인 요코는 그녀에게 다시 전화를 걸지만 전화는 다시 연결되지 않는다.


일본의 이야기 혹은 우리나라의 이야기


작품은 초고령 사회의 기형적인 인구구조가 초래할 문제에 대해 다룬다. 인간의 기대수명은 증가하는 데 출생률은 꾸준히 감소하고 이는 소수의 경제 활동 구가 거대한 노령 인구 집단을 부양해야 하는 상황을 초래한다. 이런 갈등을 오프닝 시퀀스 노인 혐오 범죄로 보여주고 있다. 일본은 가장 먼저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 국가이며 장수국가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들의 자극된 불안함이 이런 상상하기 어려운 작품의 창작으로까지 연결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 얘기처럼 들을 수 없다는 데 우리는 더 큰 두려움과 경각심을 느낀다. 가파르게 증가하는 노령 인구 비율과 세계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는 출생률은 어쩌면 일본보다 우리나라가 먼저 암울한 플랜 75의 시대에 돌입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자극한다. AI, 로봇 등을 이용한 단순 노무 일자리 대체, 해외 이주민의 적극적인 유입 등 복합적인 문제의 해결이 뒤따르겠지만 알 수 없는 미래가 당도해 옴에 따라 우리나라 사람들 역시 이런 딜레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더 절절히 공포를 느낀다.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일본의 노인들이 대체로 높은 경제 수준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 노인은 체질적으로 허약한 것인데 이는 청년들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소가 된다. 상상하기 싫지만 영화 초장의 등장하는 노인 혐오 범죄 역시 우리 이야기인 것이다. 인구 문제를 해결할 뾰족한 수단이 등장하지 않는다면 <플랜 75> 속 허황된 정책 역시 언젠가 국회의 문턱을 넘을지도 모르겠다.


쉬운 죽음, 어려운 삶


78세가 넘은 미치는 더 살아가기 위해 직업을 구해야 했다. 철거 예정인 집을 떠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녹록지 않다. 그녀에게 따스한 손을 내미는 건 공원의 무료 급식소 뿐이었다. 어떻게든 살아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그녀에게 놓인 무료 급식소 라멘 한 그릇은 더 이상 그녀가 사회에서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는 사형 선고에 가까웠다. 그래서 미치는 받아든 라멘 그릇을 한참이나 바라본다.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앞으로 나란 사람은 이 사회에서 필요 없는 사람인 것인지. 그녀는 짧은 순간 길었던 삶은 되짚어본다.


아주 지독한 것은 그녀에게 라멘 그릇을 가져다준 것이 시청 공무원 히로무라는 점이다. 그는 플랜 75 가입자를 늘려야 하는 영업 업무를 한다. 이 플랜에 가입하게 될 사람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빈곤 노인들이다. 빈곤 노인들은 무료 급식소에 몰린다. 그래서 그는 무료 급식소에 진을 치고 앉아 가입자를 모은다. 어떻게든 살아보기 위해 급식소를 찾은 노인들에게 그는 죽음이라는 극약을 홍보한다. 삶은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지만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대단한 발견이라도 되는 것처럼.


물론 그 역시 사회를 구성하는 작은 톱니바퀴 중 하나다. 그 역시 원해서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며 맡은 바를 충실히 이행하는 청년일 뿐이다. 심지어 자신의 삼촌을 플랜 75 가입장에서 만나고 가입을 돕기까지 한다. 오래 왕래가 없었다지만 자신의 삼촌에게 시한부 선고를 내리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복잡한 심정이지만 그는 삼촌에게 뒷길을 열어준다거나 하지 않는다. 수많은 노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차분히 플랜에 대해 설명하고 다가올 죽음을 맞이하는 요령을 알려줄 뿐이다.


삶은 지속하기 너무나 어렵다. 반면 죽음은 너무나 쉽다. 나라에서 권장할 뿐만 아니라 돈도 주고 광고 속 플랜 75 모델도 행복해 보인다. 기초 생활수급 대상이 되면서까지 살아갈 이유는 무엇인지, 가늘게 늘리기만 한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 영화는 계속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그들의 폭력적인 정책에 감화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다소 폭력적이긴 해도 인구 구조 문제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 정책의 맹점은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들은 단순 노령 인구가 아니라 '가난한'이 포함된 노인이라는 점이다.


살면서 빈부격차를 느끼고 삶의 질에 차등이 생기는 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경제적 차이가 삶과 죽음까지 갈라도 되는 결정적 차이가 되는 건 지나친 문제가 아닐까? 똑같이 78세의 노인이지만 축적한 자본이 있다면 90세, 100세를 기대해도 되고 직업이 없다면 한 달 안에 죽어야 하는 게 정말 공정한 사회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부유한 사람이 영양 상태, 의료 접근성 등 이유로 기대 수명이 더 높은 건 사실일 테지만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강제로 남은 수명까지 거둬가는 국가라면 과연 누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란 의문이 짙어진다.


관객을 끌어들이는 '제4의 벽'


등장인물은 때때로 조용히 카메라를 응시한다. 노인 혐오 범죄 소식을 가만히 듣고 있던 미치, 배웅하는 히로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삼촌, 플랜 75 상담사 신입들에게 노인을 비하하고 있는 이야기를 듣던 요코까지. 중요한 순간마다 이들은 카메라를 본다. 이는 카메라를 넘어 스크린으로 작품을 관람하는 관객에 닿는다. 이른바 '제4의 벽'이라 부르는 가상의 벽을 허무는 순간이다. (제4의 벽이란 작품이 진행되는 공간과 관객 사이는 볼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으로 약속된 하나의 장막을 의미한다.)


노인 혐오, 친척의 마지막 모습, 가십거리로 소비되는 플랜 이야기. 무엇 하나 가벼울 수 없는 소재지만 영화 속 상황에서는 모든 것이 가볍게 다루어진다. 이것이 정의로운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고려되지 않는다. 이들이 겪어야 하는 아픔 역시 알 바가 아니다. 기형적인 사회지만 하나의 부품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이 외면하고자 하는 문제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들은 아직은 기형적인 사회에 살고 있지 않는 우리들에게 그 답을 듣고자 한다.


이렇게 된 사회가 옳은 사회인지, 우리의 죽음이 이렇게나 가벼이 받아들여져도 괜찮은지 묻는다. 누구나 나이를 먹고 노인이 된다. 그런 시대가 도래했을 때 당신들 역시 이런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묻는 것이다. 이 물음을 관통하는 대사 역시 작품 속에 등장한다.


젊음이 어떤 축복에 의한 것이 아니듯,
나이를 먹은 것도 어떤 저주나 잘못이 아니다.

우리가 노인이 되었을 때 공경 받기 위해서, 혹은 죽음을 강요받지 않기 위해서 이 플랜을 거절하자는 말은 아니다. 살아온 삶의 궤적이 다르고 행복함을 느끼는 순간 역시 시기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허나 천편일률적인, 속칭 플랜 75의 사회 속에서는 개개인의 행복, 겪어야 하는 수많은 사건의 시기마저 강요당한다. 개성이 통제당하고 삶의 양식 또한 정형화되는 사회 속에서 인간은 기계처럼 정해진 바만을 수행해야 한다. 이는 인간다움을 송두리째 빼앗는 행위이자 국가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방식이다. 삶은 개개인의 그대로이기에 아름답고 존중받는다. 하지만 강요받는 삶 속에서 사람들이 어떤 행복을 찾을 수 있는지 알기 어렵다. 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 <1984> 같은 삶이 우리가 원하는 미래라면 받아들일 만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소재는 날카롭지만 이야기는 뭉툭한


인구 고령화 문제가 피부로 와닿기 시작하면서 이런 소재에 대한 관심도 증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 읽었던 책 중에 가키야 미우의 소설 <70세 사망법안, 가결>도 이와 비슷한 주제를 다룬다. 70세가 넘으면 죽어야만 하는 사회가 도래했을 때 보여질 인간 군상에 대해 소설은 다각도로 조명한다. 근미래에 다가올지 모르는 이야기인 만큼 서늘함을 넘어 공포감을 주기까지 한다.


하지만 뾰족한 소재에 비해 이야기는 항상 둥글둥글 뭉툭하다. 사회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예리하게 찌르는. 그리고 너무나 현실적 이야기를 다루면서 공감을 사지만 결말 부분에서 항상 힘이 빠진다. 국가가 주도하는 존엄사 시행법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야기는 한 발 뒤로 물러선다. 그 자리를 채우는 건 지루하고 평면적인 등장인물 간의 충돌이다. 사회를 조망하는 이야기 안에 개개인의 이야기를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그쯤 이야기가 흐르고 나서 보면 존엄사 이야기는 이 갈등을 표현하기 위해 등장한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된다.


어쩌면 회피하는지도 모르겠다. 조금씩 다가오는 파괴적 법안의 그림자를 외면하고자 싶은 마음이 조금 떨어져 사건을 보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소재를 다루면서 등장인물들이 조금은 덜 불행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들을 가장 잔혹한 지옥에 떨어뜨리면서 사회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파생될 문제를 다뤄야 하는 것이 죽음을 소재로 다루는 창작물의 의무가 아닐까? 아쉽게도 이 작품은 그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지나치게 무거워지는 것을 피하기 위한 시도일 수도 있지만 무거워야 하는 이야기는 무거워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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