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고스 란티모스 신작 영화 <가여운 것들> 리뷰 및 줄거리
영화 가여운 것들 줄거리
영화는 한 여자의 투신 장면으로 시작된다. 만삭이었던 벨라는 교량 위에서 떨어져 투신한다. 이를 우연히 발견한 갓윈은 그를 살려내고 자신의 성인 벡스터를 그녀에게 붙여준다. 사실 그녀는 투신한 이후 사망했다. 하지만 천재 외과의였던 갓윈이 뱃속의 태아를 꺼내 벨라와 뇌를 교체하는 방식의 과감하고도 기괴한 방법으로 그녀를 살려내는데 성공한다. 그녀는 어른의 몸이지만 정신만큼은 어린아이와 다를 게 없다. 언어 습득력이 떨어지는 것. 걷는 방법이 이상했던 것. 갓윈에게 필요 이상의 애정을 보이는 것. 모두 그녀가 어린아이였기 때문이다.
갓윈의 조수였던 맥스는 몇 번 그의 집에 초대받는다. 신기한 생명체인 벨라를 관찰하는 게 그의 임무. 하지만 그는 아름다운 벨라의 모습을 보고 반하게 된다. 이를 눈치챈 갓윈 역시 그에게 벨라와 결혼할 것을 제안한다. 단 결혼 후에도 갓윈과 함께 이 집에서 사는 조건으로. 고민 끝에 맥스는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벨라 역시 그와의 약혼을 받아들였다. 이때 변호사 던컨이 나타난다. 그 역시 벨라라는 존재의 흥미를 가지게 되고 그녀의 호기심을 충동질해 사랑의 도피를 떠나게 된다.
그와 지내는 시간은 즐거웠다. 맛있는 음식과 화려한 도시 풍경, 그리고 쾌락이 넘쳤던 섹스까지. 모든 외출이 통제되었던 그녀에게 던컨이 보여주는 세상은 신세계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가난 때문에 굶주리고 죽어가는 아이들을 발견한다. 눈물을 줄줄 흘리던 그녀는 던컨의 전 재산을 크루즈 직원에게 넘겨주며 저 아이들의 도움을 주라고 부탁한다. 뒤늦게 사실을 안 던컨은 당연히 화가 머리끝까지 났으며 크루즈에서 쫓겨나게 된다.
돈 한 푼 없이 파리에 도착한 두 사람. 던컨은 묵을 숙소 하나 구할 돈도 없다며 화를 낸다. 벨라는 호텔을 잡겠다고 한곳으로 들어선다. 하지만 그곳은 호텔이 아니라 매춘 시설. 뭣도 몰랐던 그녀는 마담의 안내를 받고 방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처음 본 남자와 섹스를 하게 된다. 돈도 받고 그토록 좋아하던 섹스까지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그녀는 자연스레 매춘부의 길을 걷는다. 몸을 팔았다는 사실에 던컨은 분노하지만 벨라는 그런 던컨을 보며 재미없는 사람이 되었다며 멸시한다.
얼마 뒤 갓윈의 건강이 나빠져 벨라는 그를 찾아간다. 여전히 그를 따스하게 맞아주는 갓윈과 매춘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결혼을 하자는 맥스의 말에 그녀는 위안을 받는다. 하지만 며칠 뒤 던컨과 함께 블레싱턴이라는 귀족이 그를 찾는다. 자신의 아내인 벨라를 되찾아가겠다는 이야기와 함께. 이번에도 자연스레 블레싱턴을 쫓아갔던 그녀는 자신을 끝없이 옥죄고 매춘을 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해하려는 블레싱턴의 음모를 알아챈다. 그녀는 또 한 번 자신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블레싱턴에게 맞서는데.
아이와 원초적 본능
주인공 벨라는 성인의 몸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갓윈의 수술 과정에서 알 수 있듯 그녀의 몸을 컨트롤하는 것은 아직은 미성숙한 아이다. 그녀에게 과한 자극을 주지 않으려 하고 실수해도 크게 나무라지 않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깔려 있다. 하지만 아이는 자란다. 모든 게 낯설었던 세상은 하나 둘 익숙해져 가고 이전에는 몰랐던 어떤 욕구들이 차츰 고개를 들고 깨어나게 된다.
그녀가 처음 마주한 본능은 미각이다. 그녀는 갓윈과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데 반찬투정을 하는 모습을 보인다. 생선을 깨작거리던 그녀를 보고 맥스가 자신은 이 생선을 좋아한다고 얘기하는데 그런 건 벨라의 관심 밖이다. 그녀는 당장 자신의 미각을 자극하고 달콤하게 안기는 음식이 필요할 뿐이다. 던컨과 도피 여행을 떠났을 때 가장 먼저 먹었던 음식이 에그 타르트였는데 그녀가 아직은 어린아이의 입맛을 갖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극적이고 다양한 맛에 대한 탐닉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다음으로 마주한 것은 성욕이다. 그녀는 우연히 자위를 하는 방법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것이 엄청난 쾌락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집안일을 돕던 가정부에게 성추행과 같던 행위를 벌인 것 역시 그녀의 순수한 호기심 혹은 원초적 본능이 발아한 것으로 봐야 했다. 당연히 이는 용인되기 어려운 행동이다. 하지만 그녀의 뇌에는 아직 채 한 살도 되지 못한 아이가 있다고 한다면 비난할 수만도 없는 행동이었다.
그녀가 던컨을 쫓은 이유도 바로 이 성욕이다. 야심이 넘치고 어떤 면에서는 교활하기까지 한 이 남자는 처음부터 벨라에게 큰 흥미를 느낀다. 아름다운 외모뿐만 아니라 그녀가 정상적인 어른이 아니라는 점 역시 그를 자극했던 것으로 보인다. 던컨이 한 일은 사랑의 도피로 보이기도 하지만 제대로 된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는 아이를 휘둘렀다는 데에서 유아 약취유인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가 얼마나 파렴치한 인물인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와 나누는 섹스를 통해 다른 어떤 능력보다 먼저 발달하는 생리학적 본능을 표현하고 있다.
성(姓)의 세계에 눈을 뜬 그녀는 지속적으로 그와 관계를 요구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 매춘부가 되게 된다. 도덕적 관념보다 훨씬 앞서 발달된 원초적 욕구를 제어할 방법은 없다. 벨라는 그저 이 욕구와 쾌락을 즐기고 반복적으로 수행해나갈 뿐이었고 이는 그녀가 바라던 즐거운 세상이었다.
모성애와 공동체
이처럼 쾌락, 본능만 남아있는 것 같은 그녀가 눈물을 보이는 한 장면이 있다. 바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절단된 계단 아래로 굶주려 죽어가던 아이들을 바라볼 때였다. 생면부지의 타인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절절한 아픔을 느낀다. 조금 전까지 던컨과의 섹스에 심취했던, 순간순간 욕구에 움직이던 그녀의 모습과 배치되는 장면이었다.
그녀가 눈물을 흘렸던 이유는 결국 또 다른 본성이라고 봐야겠다. 맛있는 음식을 쫓고 쾌락을 탐닉하던 그녀의 모습이 본능이었다면 다른 사람의 아픔에 동감하고 감정을 헤아리는 것 역시 그녀의 본능 중 하나였던 것이다. 감춰져 있을 뿐 드러나지 않았던 연민, 동정, 혹은 사랑의 감정이 이들을 통해 깨어난 것이다.
이는 사람이라는 생명체가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악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도 선한 구석은 있으며 아무리 착한 성자의 얼굴을 한 사람에게도 흠결 하나 정도는 있다. 복잡다단한 인간이라는 생물을 '단순히 쾌락만을 좇아 향락에 젖어든 나태한 사람' 이런 식으로는 묘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러 층으로 켜켜이 쌓인 감정들이 모이고 나서야 비로소 한 사람의 상이 또렷하게 맺힐 수 있다. 그녀가 보여준 눈물이 가식이 아니라 인간을 구성하는 여러 감정 중 하나라는 건 이렇게 드러난다.
또 하나의 이유는 벨라가 어쨌든 어머니라는 점이다. 뇌와 신체 중 어떤 것이 그녀의 본체라고 볼 수 있는지 불분명하다. 다만 몸을 통제하고 기억을 관장하는 부분이 뇌라는 점에서 그녀는 뇌의 주인인 아이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신체의 남은 그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다는 것 역시 비현실적일 것이다. 벨라에겐 이미 아이를 꺼낸 흔적이 남아 있었으며 자신이 아이를 품었다는 기억은 없어도 무의식 속에는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을 보니 눈물이 흐른 것이다. 결코 아이가 될 수 없던 자신의 아이를 떠올리며 어머니의 마음으로 아파했다.
주도적인 개척자의 삶
벨라는 어린아이의 뇌를 이식받은 가련한 생명체처럼 보인다. 실제로 갓윈은 그녀를 철저히 외부 세계와 단절시키려 했으며 외출을 요구한 그녀가 창문을 통해 바깥세상을 보는 것 역시 원천 차단한다. 늘 누군가 보살피고 외부 충격으로부터 감싸 안아야 할 상대가 벨라였다. 그런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늘 새로운 것들에 대한 호기심을 가졌고 어떻게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인물이다. 갓윈이 그토록 반대했던 외출 역시 그녀는 요구를 통해 이루어냈고 자신을 옥죄는 통제를 피해 크루즈 도피 여행도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의 삶 역시 주도적이다. 섹스 후 완전히 뻗어있는 던컨 없이도 그녀는 이곳저곳을 쏘다닌다.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고 인간 사회의 다양한 모습도 보고 느낀다. 심지어 사회통념적으로 불온한 것으로 취급받는 매춘부 일을 하면서도 그녀는 당당하기만 하다. 벨라를 묶어두는 건 오래된 관습, 남성 중심으로 편성된 하나의 사회구조다. 이곳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맞춰져야만 했고 그들이 바라는 모습의 행동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런 교육을 받지 못했던 그녀는 아주 당당하게 묵은 관습을 타파한다. 자신이 원하는 걸 먹고 원하는 행동을 하는 게 개인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백지나 다름없던 그녀가 해낸 것이다.
따라서 영화는 여성 해방 혹은 계몽 등의 시선으로 읽힐 수도 있다. 단순히 성적 쾌락을 좇아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따랐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사회로부터 강제 받은 일련의 행동 양식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다는 사실에서 이런 부분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시발점이 섹스였다는 점은 사실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소비할 것이 아니라 그녀가 그 이후 어떤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는지를 봐야 한다. 주변 모두가 그녀의 행동을 부끄러워한 순간에도 벨라는 늘 당당하다. 구시대적인 발상의 착오를 뒤엎고 제대로 된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그녀의 모습은 경외감까지 들게 했다.
불쾌하고도 신비로운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늘 독특한 주제를 불쾌한 감정으로 풀어내는 데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섬뜩한 배경음악만으로도 이 감독의 영화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주 노골적인 묘사와 불쾌한 대사들의 적극적인 사용은 이 감독이 얼마나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진심인지를 알 수 있다.
이번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연출은 광각렌즈이다. 처음에는 벨라를 관찰하기 위한 CCTV로 보이기도 했던 이 광각 앵글은 공간을 바꿔가면서 중간중간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광각렌즈는 기본적으로 왜곡의 시선이다.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많은 시각적 데이터를 담아내는 장점은 있으나 가운데를 중심으로 화면이 둥근 구 위에 올라간 것처럼 뒤틀려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녀의 행동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메타포다. 또렷하게 상을 맺기에는 시대가 가진 수많은 불합리와 차별 등이 만연한 세상. 그녀 역시 세상을 바로 볼 수 없었다. 물론 그녀의 시선이 아닌 3자의 시선이지만 그 시선에서 역시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목한 시선 너머 세상은 넓고도 멀리 보이지만 지척에 있는 자신의 행동 하나조차 바꿀 수 없던 시대. 그 속에서 광각렌즈 너머의 삶을 바라보던 벨라의 행동을 아주 적나라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연출법이 아니었을까.
아쉬운 건 영화가 가진 신비로운 분위기와 메시지가 그저 높은 수위의 노출신으로만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벨라 역으로 분한 엠마 스톤이 노출 연기를 거리낌 없이 했던 건 그 자체의 행동이 아니라 그 행동을 함으로써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였다고 생각한다. 광각 렌즈 속 벨라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를 즐기는 관객도 코앞에 놓인 현실이 아닌 렌즈 너머의 이야기의 본질에 다다를 수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