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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han Dec 26. 2023

남 인생 말고, 내 인생에 참견하기

넘쳐나는 참견 속에 내 것은 어디에 있었나

시골 마을에서 초중고를 다녔던 나는, 작은 지역 사회에 길들여져 있었다. 아빠는 학생들과 동료 교사들 사이에서 모두 굉장히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좁은 사회 속에서 그 인정의 시선이 향하는 끝은 그의 자식이었다. 내가 선생님께 줄곧 듣던 이야기 중에 하나는 아버지 반만 따라가라 라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악착같이 그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하는 아들도 아니었다. 공부가 재미있지 않았을뿐더러 시험을 보면 나보다 아빠가 성적표를 먼저 받았다. 남들처럼 성적표 숨길 생각은 꿈에도 못했다. 당신이 먼저 보신 건지, 아니면 선생님들이 귀띔을 해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도 전에 이미 내 성적은 부모님께 공유가 되어있었고 그때마다 무기력하게 핀잔 어린 꾸중을 들어야했다. '학교 선생님 자제들' 라는 특이한 계층 내에서, '그 선생님의 아들/딸은 전교 몇 등이라더라' 가 나의 위치였다. 내 위에, 내 아래에 누가 있는지를 통해 나의 높이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어찌어찌 수능을 보았고, 운 좋게도 성적에 맞게 지원한 학교를 모두 붙었다. 그중 건축학과와 기계공학, 이 두 학교에 대해서 고민을 했다. 어떤 학교, 과가 좋을지 아빠는 빠르게 정보를 모았고 공교롭게도 아빠의 친구 아들이 같은 학교 기계공학을 다니고 있었다. 그 학교를 가라고 했다. 이과생으로서 기계공학, 나쁘지 않은 걸? 대학에 가게 되면 아이언맨을 만들 수 있으려나? 허황된 상상을 했더랬다. (당시에 아이언맨 첫 번째 시리즈가 개봉을 했었다)


대학에 갔다. 아이언맨은커녕 무거운 전공서적이 나를 반겼다. 동역학, 유체역학, 열역학, 정역학 등 이 모든 걸 빠르게 공부해야 했다.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에너지를 공학용 계산기를 두드리며 이해해야했다. 억지로라도 머릿속에 욱여넣으며 공부를 했지만, 성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나랑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은 우수한 성적을 받는 것을 보며, 공부 잘하는 놈 아닌 놈은 역시 나뉘나 보구나 라는 신세 한탄을 했었다.


그러다가 군 입대를 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내가 살던 강화에서는 상근예비역이라고 집에서 출퇴근하는 보직이 있었고, 나는 그 자격이 될 수 있었다. 편하게 다니고 싶은 마음, 그리고 친구들이랑 피씨방에서 게임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지원해보려 했지만, 이번에도 아빠의 입김이 작용했다. 학교에서는 ROTC 를 모집하고 있었고, 군 생활동안 간부로 복무하면서 월급도 많이 받고 전역하면 대기업 가기에도 수월하니 거길 가는 게 어떻겠냐. 다들 괜찮다고 하더라, 그 말에 ROTC 에 지원했다.


방학마다 군사 훈련을 다녀오고,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을 했다. 뭐 좀 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자대 배치받고 나니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였다. 2년 간 복무하면서 나름 부대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무렵, 나는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해야 했다. 이제 대기업이 나를 기다리고 있겠군, 자기소개서를 쓰려고 하는데 한 마디도 쓰지 못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



그저 주어진 선택지 내에서 실리를 따져가며 선택을 하며 살았을 뿐이었다. 시켜서 한 공부, 남들 가니 가야 한 대학, 군대, 아무리 살을 붙여봐도 그저 시간 순으로 나열한 무미건조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자기소개서 잘 쓰는 방법] 을 찾아보면 어떤 문제나 상황에 대한 심도 깊은 고민을 적으라고 하지만, 한 번이라도 내 인생에 대해 진중한 고민을 해 본 적이 있긴 했을까? 재미없는 군대 이야기를 절반 넘게 채워서 대기업 공채에 지원했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전역을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 한 달은 처음으로 만끽하는 백수의 삶이라 만족스러웠지만, 이내 현실에 부딪혔다. SNS에는 현대자동차 로고 앞의 동기들이 해맑게 웃으며 새로운 사회로의 진출을 자랑했고, 나는 그걸 보면서 조급함이 끝을 달렸다. 스펙을 쌓으려고 해 봤지만 당최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루저의 삶을 살게 되는 것만 같았다.




아는 형이 푸드트럭을 해볼 생각이 없냐고 했다. 트럭에 강화 특산품을 싣고 아침마다 서울로 나갔고, 아파트 단지 앞에서, 골목에서 열심히 팔았다. 가끔 그 지역의 터줏대감 과일장수 아저씨와 신경전이 있기도 했고, 경찰 단속에 급하게 접고 도망치기도 했지만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이목을 끌 수 있을지, 트럭의 컨셉은 어떤 게 좋을지 열심히 논의했다. 서울 내 행사가 있는 곳에 부스를 얻어 팔기도 했다.


전통시장에서 큰 축제를 열었다. 그곳에 강화에 사는 청년 사장님들이 자신의 상품을 판매할 수 있도록 부스를 채워보라는 역할이 주어졌다. 행사의 개요부터 시작해서 부스 운영 방안, 준비에 필요한 내용들을 문서에 담아 강화에 있는 청년 사장들을 찾아다녔다. 전단지 뿌리듯이 뿌리고 수소문을 해서 부스를 가득 채웠다. 사장님에겐 생소한 경험이다 보니 방문객들의 좋은 반응에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적극적인 모습들을 보였다. 전통시장에 놀러 온 사람들도, 사장님들도 굉장히 좋은 평을 남겨주셨다. 시작부터 끝까지, 이렇게 내가 해낼 수 있구나.


이후에는 피자를 팔면서 방송도 타고, 나의 모교에 초청을 받아 강연도 하고 왔다. 내 인생에 조금씩 참견을 시작하니 재미있는 일들이 하나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때부터였을까? 누군가의 참견과 나의 생각에 작은 마찰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동안 남의 생각에 순응하며 살아왔는데 제 생각대로 움직이려니 그럴 수밖에. 아빠는 열심히 졸업장 따놓고 뭐 하냐고 했다. 대학 동기는 '헷짓꺼리' 그만하고 자소서와 필요한 정보들을 줄 테니 이듬해 대기업 공채에 지원하라고 했다. 그들의 참견에 얼마나 많은 애정이 담겼는지 이해한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생각과 결이 맞지 않는다면 맞서 싸워야 할 것들로 전락하고 만다.


점점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따라가기 바빴던 '누군가'의 인생에서, 제 스스로 길을 만들어야 하는 '내' 인생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과 고민, 발버둥이 필요했다. 부모님께 약속 아닌 약속을 드렸다. 1년만 시간을 달라고, 그동안 내 인생에서 탐색을 하겠다고. 이후에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고, 카페에서 일을 하고, 학원에서 초중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읽은 책, [클라우스 슈밥의 제4차 산업혁명] 에서 인상 깊은 한 구절을 보게 되었다.


세계에서 가증 큰 택시 기업인 우버는 소유하고 있는 자동차가 없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활용되는 미디어인 페이스북은 콘텐츠를 생산하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소매업체인 알리바바는 물품 목록이 없으며, 세계에서 가장 큰 숙박 제공업체인 에어비앤비는 소유한 부동산이 없다.


소유하지 않고, 소유하는 시대이구나. 그리고 그걸 디지털 플랫폼이라고 하는구나. 그걸 알기 위해선 프로그래밍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더더욱 기회가 된다면 그 분야에서 일을 하는 게 경쟁력 있겠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무모한 생각이었다. 아는 게 없으니 무서운 줄 몰랐을지도. 그래도 알아보던 중에 이미 그 업계에 있는 친구가 학원을 소개해주었고 나는 바로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6개월이란 긴 시간 동안 학원에서 공부를 했다. 수강을 하고 , 여러 과제를 진행하면서 기초지식이 없어 고생했지만 재미있었다. 이 과정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때때로 대학교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것을 하고 있는 내게 여러 (감사한) 참견들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학원에서는 '비전공자' 라는 공공연한 딱지를 붙이고, 취업이 상대적으로 어렵다는 말을 했지만 '잘 하면 그만인 거 아닌가?' 라는 내 생각에 귀를 기울였다. 그 결과, 수강과정을 채 마치기도 전에 나는 취업을 결정지었다. 그 길을 시작으로, 개발자 커리어가 시작되었다.




나는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내 인생에 참견하기 시작했다. 이후부터 모든 게 잘 풀렸는가? 그건 또 아니다. 대체 뭔 생각으로 이렇게 한거야? 라고 스스로 질책할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결정은 내가 한 결정이라는 것이다. 누군가의 참견에 얼룩지지 않은 내 스스로의 결정. 그게 좋은 결과든 아니든 내 인생에 있어서 값진 경험이 된다.


앞으로도 계속, 내 인생에 참견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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